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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천)

[독립운동과 인천·(30)]인천항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

[독립운동과 인천·(30)]인천항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

상하이 후원활동 제대로 조명안돼'묻힌 자금줄' 등 추가 연구 필요인천항의 하역업체 우련통운의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은 인천항만 업계를 이끈 기업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인천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40년대 초반 일제의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무역업을 했을 때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의 재정적 버팀목이 돼주었다.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이렇게 독립운동 후원을 했던 상인들을 '상인독립군'으로 불렀는데 배인복도 그 중 하나였다. 상하이 한인 사회의 대부격인 대표 상인독립군 김시문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했다.아쉽게도 인천은 기업인으로서 평가에만 몰두한 나머지 일제 강점기 배인복에 대한 행적은 놓치고 말았다. 1940년대 상하이에서 어떤 독립운동가와 교류했고,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지원했는지도 현재로선 기록이나 증언조차 구하기 쉽지 않다. 일제의 수탈과 징집을 피해 상하이로 넘어간 인천의 이름 모를 상인들이 배인복처럼 상인독립군으로 활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는 못하는 상황이다.배인복은 코흘리개 꼬마 시절이었던 1919년 3·1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동네를 누볐고, 청소년기였던 1926년에 벌어진 6·10 만세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런 그가 외국에 가서도 서슬퍼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다는 사실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상인독립군을 연구한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실장은 "당시 상하이 한인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없었던 이유로 서로가 모르게 활동을 했을 수도 있어 배인복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지금으로서는 관련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독립운동과 인천·(30)]상인독립군 배인복

[독립운동과 인천·(30)]상인독립군 배인복

보성전문학교 졸업… 인천서 석유업 '첫발'일본 유학시절 징집 피해 상하이로 넘어가당시 한인사회 상업계 대부 김시문과 교류묘비에 지사들 후원 아끼지 않은 내용 기록배재고보때 '만세' 가담해 퇴학 당하기도해방후 청구양행… 우련통운 지금까지 이어일제 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중국 상하이.어떤 이는 총과 포로 무장해 일제에 맞서 싸웠고, 어떤 이는 말과 글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려면 재정적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상하이에 진출한 우리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그들을 후원했다.그래서 상하이의 상인들은 총대를 메지 않았고 펜대를 들지 않았지만, 독립군이라고 불리기 충분한 자격이 있다.이들을 '상인독립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상인독립군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든 이들의 총알이 됐고, 펜을 든 이들의 잉크가 돼주었다.이름 없는 상인들의 활약까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하나 기록됐으면 좋으련만해외 상인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진 못했다.상하이 상인독립군 중에는 인천 출신의 무역상도 있었다.인천항 하역업체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인천은 그를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하고 있을 뿐 독립운동과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충남 태안에 있는 배인복의 묘지에는 그가 자식들에 남긴 글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 인하대학교 최원식 명예교수가 배인복의 1인칭 시점으로 쓴 글이다. 배인복 일대기의 요약판이라 할 수 있는 이 묘비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가 1941년 상하이로 건너가 사업을 할 당시 독립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대목이다."자식들 보거라"라는 짧고 담백한 말로 시작하는 이 묘비문과 배인복의 남은 가족에 따르면 1911년 3월 15일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34년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상과를 졸업하고 인천 신포동에서 석유업을 시작했다.사세를 확장하던 배인복은 1930년대 말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석유 공급이 중단되면서 사업을 접었다. 당시 미국이 일본에 중국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일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석유·철강 등 지하자원의 수출을 전부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학병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피신했다. 상하이에서 사업을 재개한 그는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았다. 다만, '흑인시'로 유명한 그의 동생 배인철(1920~1947)도 몇 해 뒤 상하이로 뒤따라 왔는데 여기서 '무역업'을 하던 형 배인복의 도움을 받았다는 내용이 여러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배인철 연구자인 윤영천 인하대 교수가 2007년 계간지 황해문화(55호)에 쓴 글을 보면 "일제 징용령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간 그(배인철)는 거기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백씨(伯氏) 배인복씨 곁에 머물면서 3개월 남짓 상하이 영미조계 내의 쎈죤스(st. Jones) 대학에 다녔다"는 내용이 나온다.손과지(孫科志) 상하이 복단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쓴 '상해한인사회사(1910~1945)' 등 상하이 한인사회 연구서를 보면 상하이의 한인 숫자는 1930년대 중반까지 1천500여명을 유지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이후 크게 증가했다. 배인복이 이주하기 직전인 1940년 10월에는 7천800여명에 달했다. 일제의 대륙 침략 전쟁으로 한국이 일본의 병참기지로 전락하자 실업자들이 생계를 위해 이주하기도 했고, 배인복처럼 징집을 피해 도망쳐 온 이도 있었다고 한다.이 무렵 한인 자영업자는 400명 가량이었다. 자영업자들은 제과·식품·무역·잡화·철공·인쇄 등 다양한 업종을 운영했는데 고수익자로 분류됐다. 가난한 독립운동가들에 도움의 손길이 가능했던 배경이기도 하다. 상하이 한인사회는 1940년 임시정부의 충칭 이전으로 일본색이 짙어져 갔다. 친일적 단체인 상해거류조선인회 회비 납부자가 1939년 643명에서 1940년 1천700명으로 늘어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원을 끊지 않은 상인들이 다수 존재했다.당시 상하이 한인사회 상업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김시문(1892~1978)도 이런 상인독립군 중 하나였다. 그런데 김시문과 관련된 기록에서 바로 '배인복'이라는 이름 석자가 등장한다. 개풍군 출신으로 1916년 상하이로 이주한 김시문은 프랑스 조계 하비로(霞飛路)에서 김문공사(金文公司)라는 잡화점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는데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상인독립군'이었다.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인수해 잠시 경영하기도 했고, 그의 가게는 독립운동가와 임정 요인, 상인들의 사랑방과도 같았다.김시문은 해방 이후 어지러운 국내 정세를 살피느라 귀국하지 않고 1949년 9월 큰아들 김희원만 홀로 귀국시켰다. 김시문은 아들에게 1947년 먼저 귀국한 배인복을 만나라고 했다. 1949년 12월 아들 김희원은 배인복을 찾아갔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1949년 12월 30일 김희원이 아버지에 쓴 편지에는 "배인복 선생은 비록 뵙지 못했지만 그의 사무실에 메모를 남겼으며…"라는 대목이 있다.1949년 12월이면 배인복이 귀국해 고향 인천에서 '청구양행'이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운영했을 당시다. 그는 중국 상하이와 인천의 육상 운송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시문이 아들을 통해 남긴 메모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김시문은 홀로 귀국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아들을 위해 상하이에서 교류를 했던 사업가들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데 배인복 역시 이런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두터운 친밀 관계를 갖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 상인독립군의 대부였던 김시문과 교류했던 배인복 스스로도 독립지사의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밝혔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단순한 친밀감을 넘어 독립운동과 관련한 끈끈한 동지애가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김시문 연구자이자 '어느 상인독립군 이야기'의 저자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은 "편지 외에 배인복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1940년대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했다면 당연히 김시문의 김문공사를 찾아가 어떤 식으로든 교류했을 것"이라며 "당시 김시문을 비롯한 상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기 때문에 어떤 명단이 있는 조직을 갖추거나 기록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광재 실장은 또 "당시에는 독립운동가와 상인이 명확히 구분됐다기 보다는 상인을 하다가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도 있었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돈이 필요해 상업에 종사했던 사람도 있었다"며 "사실 앞에서 총을 들고 뛰어든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던 상인들도 독립운동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벌인 독립운동가 후원은 그의 국내 행적을 살펴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배인복과 한국 고고미술사학의 개척자인 우현 고유섭의 태극기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그 이야기도 묘비문에 새겨져 있다. 1918년 인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창영초)에 입학한 꼬마 배인복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네살 위의 형 고유섭과 함께 집 담장에 태극기를 꽂아놓고 만세를 불렀다가 혼이 났다고 한다. 배인복도 1988년 고유섭 특집 기사를 게재한 잡지 '월간공예'와의 인터뷰에서 "우현 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만, 7~8세의 어린 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 선생은 유치장에 있다가 사흘째 되던 날 큰아버지가 찾아가 겨우 나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그가 서울 배재고보를 다니던 시절 1926년 6·10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한 사실도 있다. 6·10 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였다.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라는 격문이 살포됐고,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 전국적으로는 1천여 명이나 됐다. 1930년 4월 5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학생운동으로 퇴학당한 학생 이름을 실었는데 전체 497명 중 배재고보 11명의 명단에 배인복의 이름이 등장한다.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누구와 어떻게 교류했는지는 한 번도 연구된 적이 없다. 배인복의 여동생인 배경숙(90) 전 인하대 법대 교수가 큰 오빠의 옛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지만, 고령이라 인터뷰가 이뤄지지 못했다. 그의 다른 가족들도 상하이 상인독립군 시절의 이야기는 알지 못하고 있다.그가 해방 후 세웠던 청구양행은 이후 무역에서 하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1958년 우련통운으로 재출발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기업인 배인복은 1950년대 말 대한해운공사 인천지점 하역권을 유치해 급속히 성장했다. 배인복은 1976년 동생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가 1997년 11월 11일 중구 송학동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배인복. /배준영씨 제공배인복이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하던 시절 교류했던 상인독립군 김시문의 '김문공사' 1950년대 중반 전경. 처음 지어진 1910년대와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상하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여기를 드나들었다. /어느상인독립군이야기 발췌

[독립운동과 인천·(29)]잊히고 묻힌 의사 출신 이민창

[독립운동과 인천·(29)]잊히고 묻힌 의사 출신 이민창

1929년 인천 정착해 병원 운영하다 1941년 '합병 30년후 독립 약속 지켜라' 투쟁엘리트 인생 버리고 감옥서도 항거 해방전 출소 거부 1년6월 형기 받고 4년 살아이후 모습 드러내지 않고 '두문불출' 가난한 자들에 인술 펼치고 과학공부 매진'開國(개국) 495년 5월 11일'1941년, 인천에서 병원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이민창(李敏昌)은 신상 카드 나이를 기록하는 곳에 이렇게 적었다.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지 30년이나 더 흐른 때임에도 이민창은 여전히 자신의 생일을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따졌다.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변절하던 시기에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그 이민창의 드라마 같은 항일운동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자료는 1955년 고일 선생이 펴낸 '인천석금'이 유일하다시피 하다.'인술(仁術)에 여생 바치는 노투사 '이민창' 씨'란 제목의 글은"1941년 일제의 황혼시절이다. 융희(隆熙) 4년 경술한일합병(庚戌韓日合倂)의 국치(國恥)의 시간이 30주년이 지난 그해에 서슬이 시퍼런 독오른 일제 면전에서 단독육탄으로 항쟁하던 투사가 깊은 밤중에 총소리 같은 뉴~스를 던졌으니" 이렇게 시작한다. '인천석금'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1941년, 이민창은 '너희들이 합병 후 30년이 지나면 독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뿌렸다. 조선 총독과 일본 내각 대신들에게도 서한을 발송했다. 이민창은 의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의사 역시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그는 활짝 열려 있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버리고 일제에 항거하고 나섰다. 그는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주독립의 필연성을 국제정세에 맞추어 연설했다. 청중들은 다들 "미쳤다" "큰일 나겠다"고 말하며 꽁무니를 뺐다. 이민창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권오연이 담당했다. 그는 이민창을 고문했다. 그래도 이민창은 굽히지 않고 목청을 돋워 취조하는 형사를 나무랐다. "아무리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네놈이지만 한국인의 피를 받았다면 내 주장이 그래 그르냐? 옳으냐?" 그렇게 꾸짖음을 받았던 권오연은 해방 후 '노죄수의 굳고 곧고 깨끗하고 거룩했던 그 기개 용기 명석 준엄에는 고개가 수그러졌다'고 고백했다.이민창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가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독립문에 이르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문의 유래를 연설했다. 지나던 행인들은 목례로 답했다.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항거했다. 옥중에서 조회 때마다 불러야 했던 기미가요를 거부했고, 황국신민선서도 일축했다. 이 일로 형기가 더 늘어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5년 새해 만기 출소일이 되었다. 찾아온 부인에게 이민창은 말했다. 나는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나가지 않고 감옥에서 죽을 테니, 어서 돌아가오. 집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경들이 가족들을 못살게 굴 게 분명하니 오히려 감옥에 있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좋을 것이오. 그렇게 만기를 더 넘겼고, 해방이 되어서야 출옥했다.이민창은 일본인과 섞이기를 싫어했다. 투옥되기 전의 일이다. 큰딸이 영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일본인이 새로 설립한 송현심상소학교로 옮겼다. 그 얘기를 나중에 들은 이민창은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말했다. "내 딸은 당신 학교에 보낼 수 없으니 내가 도로 데리고 가겠소." 사립학교일지라도 일본인이 교장인 곳에서는 딸을 근무하게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큰딸은 다시 영신학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이민창은 '가장 뛰어난 의사는 나라를 고치고, 그 다음이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실천하기 위해 약관의 나이에 한성병원부속학교에 입학하여 강제병합 이전에 졸업, 서울에서 개업했다. 이화학당 출신을 부인으로 맞아 잘 살았으나 1916년쯤에 일제의 학정에 분개한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하지만 고국을 잊지 못해 몇 년 뒤 다시 양강도 경흥과 황해도 재령에서 공의(公醫) 생활을 했다.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 이중설병원 자리에서 먼저 병원도 운영했다. 그렇게 인천에서 10년 정도 병원을 하다가 '약속한 30년이 지났으니 나라를 내놓으라'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일제에 맞서 혼자서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이민창은 일제 말기 4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이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독립이 되기 전에는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도 바라던 해방이 되었건만 이민창은 초가집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했다. 웬 혁명가가 그리 많고, 애국자가 쏟아지고 정치인이 범람하는 거냐는 이유였다. 정당인도, 지도자의 타이틀도 마다했다. 그저 집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술(仁術)을 펼치고, 과학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인천 시내의 어떤 의사는 피란민 환자가 숨을 거두었는데 약값을 내지 않았다면서 사망진단서를 발급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이민창은 앞장서서 사망진단서를 끊어주었다. 그는 또 환자들의 형편에 맞게 치료비와 약값을 받았다. 비용을 지불할 여유가 되면 받고 그렇지 못하면 받지 않고 치료를 해 주었다.고일 선생이 그려낸 노투사 이민창의 인생 스토리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아니,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이 없겠다 싶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민창과 관련해서 '인천석금'을 넘어서는 것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인천석금'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게 더 궁금해진다.고일 선생의 기록은 정확하다. 약전 형식으로 정리할 만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하여 그의 인생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던 듯하다. 1941년에 독립만세를 부르고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서대문형무소 담벼락을 배경으로 찍은 이민창의 사진은 1941년(소화 16년) 7월 14일로 되어 있다. 또 경성지방법원에서 최초 언도받은 형기도 1년 6월이었다. 죄명은 치안유지법위반이었고, 언도일은 1942년 2월 26일이었다. 7개월 넘게 미결수 신분으로 고초를 당했다. 그는 1943년 8월 26일에 만기출소해야 했으나 감옥생활을 더 했다. 일제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규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더 치렀다. 그는 또 1945년, 해가 바뀌면서 청주형무소에서 출옥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야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요즘 교정 시스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아무리 수감자가 나가지 않겠다고 버틴다 하더라도 더 있을 수는 없다는 거다. 기한을 넘겨서 교도소에 머물게 되면 그 시간만큼 교정 당국에서 수감자를 감금하는 죄를 짓게 된다는 얘기다.이민창이 인물카드에 쓴 '개국 495년'으로 따지면 그는 1886년에 태어났다. 이 인물카드의 본적지는 '경기도 인천부(仁川府) 화정(花町) 165'로 되어 있다. 당시 화정은 지금의 중구 신흥동 지역이다. 하지만, 이민창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고일 선생은 이민창이 서울 태생이라고 했다. 이민창이 인천에 이주한 뒤 본적지를 바꾼 것인지도 확인해야 할 일이다.이민창은 직업란에는 '의사(醫師)'라고 적었다. 강제병합 이전에 한성병원부속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개업했다고 했으니 1910년쯤부터는 의사생활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했다가 귀국해 북한 지역에서 공의생활을 했으며, 인천에는 1929년쯤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인천에서도 의사생활을 했을 터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1942년 인천에서 '신외과'를 개원한 신태범 박사는 '인천 한 세기'를 쓰면서 어쩐 일인지 대선배 의사인 이민창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1942년이면 이민창은 이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이기는 하다. 그래도 신태범 박사가 책을 낸 1983년까지 인천에서 생활하던 여러 의사들의 이야기는 하면서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민창을 외면하고 있다는 게 언뜻 납득하기 어렵다. 이민창은 해방이 되고 청주형무소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그는 곧바로, 너나없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들어대는 세태에 신물을 느꼈던지 병원을 이중설 씨에게 넘겨주었던 듯하다. 이민창이 병원을 하던 자리에 새로 연 게 이중설병원이다. 이중설병원은 중구 내동 94번지에 있었고, 진료 과목은 내과와 소아과였다. 1946년에 개원했다. 이민창이 이중설에게 병원을 넘겨주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금은 그 병원 자리를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그동안 여러 차례 지번이 변경되는 바람에 '내동 94번지'를 한 곳으로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민창은 병원을 넘기고 동구 화평동 오두막 초가에서 은거하면서 인술을 펼치고 과학 이론을 탐구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잘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국가와 민족을 위하다가 희생된 인물이 쓸쓸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신령의 가호를 빌어마지 않는다."고일 선생이 이민창 이야기를 끝내면서 쓴 말이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올해 여기저기서 들려온 얘기이기도 하다. 자신을 내던져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비뚤어진 세태에 안타까워 한 고일 선생의 충심이 읽힌다. 그 60여 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들의 후손 역시 여유롭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올 한 해 끊이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1955년 고일 선생이 쓴 '인천석금' 표지(1979년 재판)와 '인천석금'속에 실린 이민창 이야기. /'인천석금' 촬영이민창의 인물 카드에 적힌 내용. 출처/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감시인물 카드

10회째 `송도국제마라톤` 사상 최대 1만5천여명 참가

10회째 '송도국제마라톤' 사상 최대 1만5천여명 참가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한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사상 최대 규모인 1만5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29일 송도국제도시 일원에서 열렸다.이날 전국에서 모인 1만5천여명의 건각들은 인천대를 출발해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송도국제도시를 질주했다.경인일보와 한국실업육상연맹이 주최한 송도국제마라톤대회는 국내 엘리트 남자(하프), 마스터스(풀코스, 하프코스, 10㎞, 5㎞)로 나뉘어 진행됐다. 엘리트 하프코스 부문에서는 최민용(25·국군체육부대)이 1시간07분56초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하며 우승을 차지했다.이날 대회에는 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윤관석(인천시당위원장·남동을), 박찬대(연수갑) 국회의원, 자유한국당 안상수(인천시당위원장· 중구·동구·옹진군·강화군), 민경욱(연수을), 윤상현(미추홀구을) 국회의원, 정의당 이정미 국회의원, 양현주 인천지방법원장, 허인환 동구청장, 김정식 미추홀구청장, 이태훈 가천대 길병원 의료원장, 김양우 가천대 길병원장, 조동성 인천대 총장, 최미리 가천대 부총장, 박등배 인천육상연맹 회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김명호기자 boq79@kyeongin.com달리고 싶어지는 청명한 날씨-29일 오전 인천 송도국제도시 인천대학교에서 열린 '2019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국내·외 마라톤 선수와 동호인 등 1만5천여명의 건각들이 힘차게 출발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전문 마라토너·동호인·시민 `빌딩 숲 질주`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전문 마라토너·동호인·시민 '빌딩 숲 질주'

풀·10㎞등 4개 부문 '열띤 레이스'엘리트 하프 최민용 67분56초 '1위'2019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 참가자들은 29일 오전 9시 인천대 대운동장(송도캠퍼스)에 모여 풀(42.195㎞), 하프(21.0975㎞), 10㎞, 5㎞ 등 모두 4개 부문에서 레이스를 펼쳤다.빌딩 숲이 우거진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열리는 유일한 마라톤 축제의 현장을 찾은 국내 정상급 실력의 전문 마라토너들은 하프 코스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풀·하프·10㎞(이상 마스터스) 부문에선 전국의 마라톤 동호인들이 대거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일반 시민들도 5㎞ 코스에서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송도국제도시 한복판을 걷고 뛰었다.올해 대회는 인천대 송도캠퍼스를 출발해 동북아트레이드타워, 잭니클라우스 골프클럽, 인천아트센터, LNG 생산기지, 연세대 송도캠퍼스,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을 돌아오는 코스로 이뤄졌다.전문 마라토너들이 경합한 엘리트 하프 부문에서는 최민용(국군체육부대)이 1시간07분56초의 기록으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어 김종윤(청주시청, 1시간08분00초)과 강승길(제천시청, 1시간08분14초)이 각각 2·3위를 차지했다. → 표 참조마라톤 동호인들이 참가한 마스터스풀 코스에선 손수돈이 2시간43분24초09로 남자 부문 정상에 올랐다. 2위는 이재철(2시간48분04초46), 3위는 송재영(2시간51분34초11)이 기록했다. 여자 부문은 Mamiko SHIN(일본)이 3시간25분52초93으로 1위로 결승선을 지났다. 이어 오현희(3시간40분45초44)와 이하나(3시간41분19초18)가 뒤따라 들어왔다.마스터스 하프에선 양도훈이 1시간15분41초44를 기록하며 최준환(1시간16분56초25)과 김정모(1시간20분04초51)를 제치고 남자 부문 1위에 등극했다. 여자 부문은 윤선미가 1시간31분57초19로 우승했다. 홍서린(1시간35분45초58)·박미영(1시간36분34초14)이 그 뒤를 이었다. 10㎞ 코스는 안현욱(34분56초49)과 이소륜(42분45초98)이 남·여 각각 1위를 차지했다. /임승재기자 isj@kyeongin.com29일 인천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엘리트 부문 참가 선수들이 전력을 다해 질주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영광의 얼굴|엘리트 하프코스 우승 최민용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영광의 얼굴|엘리트 하프코스 우승 최민용

최민용(25·국군체육부대·사진)이 엘리트 하프코스 부문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며 우승을 차지했다.최민용은 이날 대회에서 1시간07분56초의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최민용은 "개인 기록보다 2~3분 정도 늦었지만,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며 "주변에서 도와주고 응원해준 사람들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참가자들의 기량도 좋아 경쟁을 하면서 즐겁게 뛰었다"며 "오늘 함께한 선수들과 우승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그는 "송도국제도시 코스를 처음 달려봤는데, 코스가 전체적으로 평탄하고 바닷바람이 많이 불어 달리기에 매우 좋았다"며 "날씨가 조금 더워 개인 기록을 경신하지는 못했으나, 다음 대회에 참가하면 더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최민용은 다음 달 6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하며, 18일부터 중국 우한(武漢)에서 진행되는 '제7회 세계군인체육대회'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해 대회에 나선다.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있는데, 이번 대회 우승을 통해 좋은 기운을 얻어가는 것 같다"며 "우리나라 군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최상의 경기력을 선보일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하겠다"고 말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가을 해풍속 경쾌한 첫걸음… `내안의 레이스 본능` 깨웠다

[2019 인천 송도국제마라톤]가을 해풍속 경쾌한 첫걸음… '내안의 레이스 본능' 깨웠다

■이모저모#인천지법원장은 '마라톤 마니아'○…인천지방법원 마라톤동호회 회원 23명과 함께 뛴 양현주 인천지법 법원장 눈길. '마라톤 마니아'로 알려진 양현주 법원장은 이날 인천지법 마라톤 동호회원들을 격려하며 10㎞ 코스를 완주. 인천지법의 한 직원은 "양 법원장이 평소 인천지법 동호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며 참석하는데, 특히 마라톤을 좋아해 직원들과 가뿐히 뛰었다"며 흐뭇한 미소. 인천지방변호사회의 마라톤 동호회 '인천달변'(회장·김유명)도 이날 회원 40명이 참가. '인천달변' 변호사들은 지역 법조계 현안인 '인천고법 설치', '해사법원 유치' 등 문구를 가슴에 달고 질주. 이날 회원들과 함께 달린 이종린 인천지방변호사회 회장은 "인천고등법원이 신속하게 설치되고, 해사법원 유치까지 성사하길 염원하며 달렸다"며 "인천시민들이 편리하게 사법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풀코스 100회 완주 '무쇠다리'○… 지난해 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서 풀코스 300회 완주자를 배출한 인천고마라톤클럽. 올해 대회에서도 장길석(55)씨가 풀코스 100회 완주 기록을 세워 2년 연속 경사. 장길석씨는 2014년 9월 풀코스 첫 완주를 시작으로 5년 만에 풀코스 100회 완주. 2005년 출범한 인천고마라톤클럽은 현재까지 풀코스 완주 700회 기록자를 배출하는 등 인천지역 고등학교 대표 마라톤 클럽으로 자리 잡는 중. 4년째 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참여한 장길석씨는 "즐겁고 뛰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마라톤인데, 벌써 42.195㎞를 100번이나 달렸다는 점에서 이번 대회는 매우 뜻깊은 대회"라며 "달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마라톤을 이어가겠다"고 소감.#10년째 출석도장 70대 노익장○…"10년 째 출석 도장 찍었습니다. 송도마라톤이 인천을 알리는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 올해 10회째를 맞은 송도국제마라톤대회에 한 해도 빠짐 없이 참가했다는 문연경(78·남동구 도림동)씨는 이날 10㎞ 코스에 도전하면서 송도마라톤 '홍보맨'을 자처. 그는 가슴에 '송도 마라톤 10회 참가'라는 문구를 붙이고 달리며 대회를 홍보 눈길. 문씨는 "짜임새 있는 행사로 참가자를 배려하는 대회라는 느낌을 받아 매년 참가하고 있다"며 "10년 동안 인천과 송도지역을 다른 곳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황영조 선수 깜짝 팬 사인회○…인천송도국제마라톤 10주년을 맞아 황영조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 금메달리스트의 깜짝 '팬 사인회'가 열려 참가자 호응. 마라톤 동호인들은 황영조 선수와 사진을 찍고 황 선수의 사인을 받기 위해 땀도 식기 전에 줄 서는 모습 연출. 이날 10㎞를 완주한 미추홀러너스클럽 소속 이종빈(58)씨는 '1번'으로 선수의 사인을 받아 흐뭇한 미소. 두 번째로 사인을 받은 동호인 안선옥(45·여)씨는 이날 입은 티셔츠 등에 사인 인증. 안 씨는 "평소 팬이었던 황영조 선수를 만나서 기쁘다. 그의 끈기 있고 열정적인 모습이 매력적이며 앞으로도 건강을 유지해 마라톤에 계속 참가하고 싶다"고 다짐. #길병원직원·가족 '651명 하나'○…인천 구월동에 있는 가천대길병원은 이날 직원, 가족들 651명 참가해 화합을 다져. 직원들은 직접 준비해온 풍선을 참가한 모든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즐거운 시간. 서승현(49) 총무과장은 "직원들이 많다 보니 여러 직종 간 모여 화합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는데 이번 마라톤 대회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었다"며 "앞으로도 많은 직원이 마라톤대회에 꾸준히 참여했으면 한다"고 웃음. 세 딸과 함께 참여한 길병원 직원 서인자(42)씨는 "이번에는 5살 막내딸도 함께 걷기로 했다. 아이들이 힘들어해도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올해로 3번째 참가하고 있다"고 웃음.몸푸는 건각들-2019 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린 29일 출발점인 인천대학교 운동장에서 참가한 건각들이 출발에 앞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격려하는 내빈들-2019 송도국제마라톤대회가 열린 29일 인천대학교 출발점에서 안상수·민경욱·박찬대·이정미 국회의원,이용범 인천시의회 의장, 조동성 인천대 총장, 곽희상 인천시체육회 사무처장, 이태훈 가천대 길병원 의료원장, 최미리 가천대 부총장, 김양우 가천대 길병원 병원장, 이영재 경인일보 인천본사 사장 등 내빈들이 참가자들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유모차 어린이 "우리 아빠 파이팅"-대회에 참가한 한 아버지가 아이들을 태운 유모차를 끌며 송도2교 인근 1차 반환점을 통과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이색복장 외국참가자 풀코스 '손가락 하트'-젖소무늬 옷을 입은 외국인 참가자가 손가락 하트를 보이며 풀코스에 도전하고 있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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