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인천)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개항기 인천항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별다른 장비는 커녕 일자리 불안정 시달려항운노조 시초 '모군청' 조합해 취업 주선인천항운노동조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130여 년 인천항의 역사를 함께한 주역이자, 지금의 인천항을 있게 한 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은 맨몸으로 항을 드나드는 짐을 날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인천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후에는 기계화, 상용화(항만 인력 공급 체제 개편), 내항 통합 등의 고비를 극복하며 인천항 격동의 시기마다 온몸으로 맞섰다.우리나라에 부두 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건 '개항기'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어 빌어먹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로 몰려들면서다. 이들은 처음에 어민, 소농민 등 일시적인 노동에 종사했다. 항만 물동량이 많아지면서 상시적 노동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었다. 부두 노동자 특성상 일정하지 않은 작업 시간과 작업량으로 안정적인 노동 공급이 어려워지자 한국인 하역원은 중구 내동에 '모군청(募軍廳)'이라는 하역조합을 꾸려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이 하역조합이 항운노조의 시초다. 조합은 개항 이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관리하에 독점적 노무공급체제를 인정받으며 성장했다.인천 부두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본격화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부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본의 군수 물자와 수탈 물자를 하역했다. 강경애(1907~1943) 소설 '인간문제'를 보면 당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은 '고통'에 가까웠다."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어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했다."일제 수탈시기 파업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산업화 접어들면서 고용대책 등 관철시켜내항 TOC 통합·경쟁 심화로 줄어든 입지정부·정치권 접촉하며 시설투자 활로모색시대흐름 맞춰 성장 "인천항의 주인" 자부부두 노동자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에 거쳐 파업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쟁의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들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고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부두 노동자들은 광복 이후 미 군정, 한국전쟁, 4·19혁명 등의 역사적 혼란기에서도 하역 작업을 계속하며 노동조합을 정비해 나갔다. 1945년 10월 부두노동자들이 '인천자유노동조합'을 창설했을 당시 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운송 사업을 중심으로 한 '인천부두노동조합'이 따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 노조는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하며 세를 키워 나가다가 항만과 운수 분야 노동자들을 통합한 인천항운노조를 1981년 8월 설립했다. 1998년 경인항운노조로 명칭을 바꿨다가 2004년 인천항운노조로 다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항운노조는 '기계'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1966년 인천항에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되면서 중량화물 하역 작업이 기계화됐다. 1968년에는 마그넷(자석) 사용으로 고철, 철제류 작업도 기계화됐다. 항만 하역의 기계화는 노동조합의 존속을 위협했다.1978년 부두 노동자로 처음 조합에 들어온 이해우(69) 인천항운노조 위원장은 "당시 맨몸으로 일할 때는 어떤 물건이든 어깨에 지고 메는 게 전부였다. 석탄도 실제로 삽으로 떠서 포대에 담았다. 만석부두에 가면 속옷만 입고 막걸리와 원당(설탕)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모두 부두 노동자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모든 게 기계화가 되면서 몸은 편해졌지만, 이후에는 실직의 두려움에 직면해야 했다"고 했다. 노조는 '근로자에 대한 대책 없는 기계화'를 반대하고 나섰다.대표적인 사건은 1974년 사료 도매업체 대한싸이로주식회사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와 진공 흡입식 하역기 2기를 완공한 것이었다. 1995년 인천항운노조가 발간한 '인천항변천사'를 보면, 당시 인천항의 양곡 하역량은 20~3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대량 실직은 불 보듯 뻔했다. 인천지부는 '대한싸이로에서 필요한 노무직은 조합원으로 둘 것', '작업 단계에서 감축한 분야는 보상할 것' 등의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해 모두 관철했다.오광민 인천항운노조 쟁의부장은 "기계화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계로 인해 손상되는 노동의 대가를 노조의 강력한 요구로 보상받아 실제로 잘리거나 임금이 감소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컨테이너 도입 등 기계화의 큰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노조는 1988년 인항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당시 노조 간부들이 "부두 노동자의 못 배운 한(恨)을 풀어보자"며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전국 항운노조 중 학교를 설립한 곳은 인천이 처음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노조위원장이 인항학원 재단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조합원 자녀들에 대한 복리 후생도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지원했다. 1978년부터 최근까지 1만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2007년에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이라는 큰 고비를 맞는다. 상용화 개편이란 기존 조합 소속 일용직 인력을 하역 회사별로 상시 고용하도록 항만 인력 공급 체제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노조 채용 비리 재발 방지, 항만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상용화 개편을 추진해왔다. 지난 100여 년간 부두 노동자를 공급해왔던 항운노조의 독점 고용권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다.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하역 노동자 1천700여 명 중 48%가 희망퇴직을 신청해 노조가 철회 기간을 두기도 했다. 정부가 희망퇴직 시 생계지원금을 최대 1억7천만원까지 줬기 때문이다. 2천800여 명에 달했던 전체 조합원 수는 1천 명 초반대로 추락했다. 노조는 "인천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한발 양보해 합의를 이뤘다.최근 인천항을 두고 노조에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으로 부두 노동자 수가 대폭 줄어들게 될 처지인 데다, 물동량 유지·확대를 위해 평택항 및 부산항과도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항운노조는 '항만 배후단지 조성을 위한 정부 지원', '부두 임대료 인하 촉구' 등 인천항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기업 관계자, 국회의원 등을 만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이해우 위원장은 "인천항이 수도권이기 때문에 다른 항보다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인천항만공사는 시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항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인천항운노조는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격동의 인천항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인천항운노조는 다른 지역 노조보다 더 빨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하며 성장했다"면서 "앞으로도 조합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노조의 목표"라고 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운노조는 지역 내 조합원들의 후생복지시설 마련을 위해 정부에 복지회관 건립을 건의, 2006년 '근로자의집'을 개관했다. 신협, 체력단련실, 인천항운노조 사무실, 휴게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1903년 제물포항 건어물 하역장에서 건어물을 나르고 있는 부두노동자들. /인천항운노조 제공1930년대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자들이 미곡 수출품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33년 가마니를 수송하던 우마차. /인천항운노조 제공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를 소형차에 싣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70년대 부두 내 적재한 화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7)]선교와 음악(下)

여성대상 선교 위해 제물포 찾은 마거릿벵겔126년전 국내 첫 서구식 학교 '영화학당' 세워탄압 당하던 우리 음악 대신 찬송가 등 교육이를 시작으로 애국가·계몽가요까지 가르쳐졸업생 김영의,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로 성장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초기에는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1892년 당시 24세였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됐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두 차례 서양의 침략을 겪은 인천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전도사들이 전파하는 종교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백헬렌은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을 싸게 팔면서 여인들의 인심을 얻는 방식으로 전도를 시작했다.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부분은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도록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당이 126년 전 문을 열었다.영화학당의 개교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위한 근대식 교육기관의 출발을 의미하며, 최초로 음악 교육을 실시한 곳이라는 의미도 지닌다.미션스쿨인 배재학당(1885년)과 이화학당, 경신학교(1886년) 설립에 이어 6년 후 인천 영화학당이 개교한 것이다.<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따르면, 1890년 한국에 온 벵겔은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의 총애를 받아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주로 성악을 가르쳤다고 한다.이처럼 음악적 소양이 풍부했던 벵겔이 1892년 영화학당 설립 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음악 교육을 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영화 백년사>에는 아펜젤러가 쓴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0년 7월 18일자를 인용해 그해 6월 23일 개최된 영화학당 방학식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이 글은 당시 방학식이 폐회 찬미를 부르면서 마무리 되었음을 알려준다."(전략) … 이와 같이 모든 학도들은 이 말을 기억하여 두 달 동안 쉬일 때에도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미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오직 지극히 보배로운 진주를 사랑하며 잘 지니고 있기를 구주님의 이름으로 바라노라 하시고 폐회 찬미를 부르고 방학식을 마쳤다."우리 교회사와 근대 음악사 관련 자료에도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는 '창가'라는 이름으로 찬송가 교육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풍금 반주로 찬송가를 가르쳤는데, 이를 시작으로 점차 나라를 사랑하자는 내용의 '애국가'를 비롯해 자주독립의 정신과 자유민권 사상을 고취시키는 '계몽가요', 학업에 열중하고 실력을 배양해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교육창가' 등을 가르쳤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우리 생활 속 자유를 완전히 박탈했다.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앗아간 것이다.1917년 3대 헤스(M. I. Hess) 교장은 부설 영화유치원을 설립했다. 1914년 이화유치원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유치원이었다.<영화 백년사>에 실린 유치원 보육과목과정을 보면 1년 차 어린이들은 16시수로, 2년 차는 18시수(이상 1주일 단위)로 짜여졌다. 이 중 창가는 1·2년 차 각각 3시수로, 여타 과목에 비해 가장 많은 시수를 배정 받았다.당시 영화유치원에서 창가 과목을 통해 어떤 교육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찬송가와 함께 일제가 허용한 서구 음악을 교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영화유치원과 영화학당이 서울 지역 선교사들이 지은 학교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부분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앞서 언급했듯이 벵겔은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다가 인천에 와서 영화학당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서울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경신학교 등과 활발한 소통을 했고, 영화학당 출신들이 이곳으로 많이 진학했다.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첫 미국 줄리어드 음대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김영의(1908~1986)는 영화학당 출신이다. 김영의는 영화학당 졸업 후 서울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했다.어린시절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한 음악과 스포츠 등이 20세기 중반 우리나라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화창한 오후에 인천 동구 창영동의 영화초등학교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1910년 3월에 준공한 영화초교 본관동(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9호)에 눈길이 갔다.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있는 이 건물은 학생들의 예배와 체육 활동을 위한 강당으로 사용됐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건물 내부 구조는 'ㅁ자' 형 평면 형태로 설계됐다. 요즘 대부분 학교가 획일적인 일자형 구조로 지어진 점을 감안하면 신선한 시도였다.하상교 영화초교 교장은 "우리나라 교회와 교육 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옛 본관 건물을 박물관 형태로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며 "순례객들도 많이 찾는 만큼, 인천시와 협의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영화학당 설립 당시 교직원들(왼쪽부터 강세실리아, 마거릿 벵겔, 백헬렌).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11년에 세워진 영화초등학교 본관의 옛 모습.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1930년대 말 건물 출입구 돌출 부분을 증축한 본관 건물 . /인천영화초등학교 제공·경인일보DB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국내 젓새우 70~80% 잡히는 강화도… 배에서 바로 염장해 뛰어난 품질 '전국 입소문'매년 김장철마다 북새통 이루는 외포항 수산시장, 저렴하고 맛 좋은 '추젓' 인기 높아 현대식 냉동 창고 갖춘 경인북부수협 경매장, 지역 모든 제품 거쳐가는 '유통 중심지'김장에 빠질 수 없는 젓갈의 원재료가 되는 젓새우는 인천의 바다가 선물하는 중요한 수산자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인천 강화도 인근 바다는 젓새우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강화에서 생산하는 새우젓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명품 대접을 받는다.때문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강화의 포구는 새우잡이 어선으로 들썩이고 전국 각지에서 새우젓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지난 6일 찾아간 강화군 외포리에 있는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은 김장철을 맞아 새우젓 등 젓갈을 사러 온 손님과 관광객으로 북적였다.현재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18개 젓갈 판매 매장이 성업 중이다. 새우젓을 주력으로 밴댕이, 멸치 등 어림잡아 20여 종류가 넘는 젓갈을 판매하고 있다.이날 시장에서 만난 조경숙(50)씨는 서울 강남 수서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조씨는 추젓 12㎏을 샀다. 김장 100포기를 하려면 10㎏ 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강화 새우젓이 명품이라기에 올해는 강화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아보려고 멀리까지 찾아왔다"며 "김장 맛이 좋으면 앞으로 계속 강화 새우젓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충남 논산 강경에서 젓갈을 구매해 김장을 했다고 한다.새우젓은 가을에 담근 것을 '추젓'이라고 부른다.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을 '오젓', 6월에 담근 젓을 '육젓'이라고 하고, 겨울에 담근 젓을 '동백하젓'이라 부른다.김장철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은 추젓이 인기다. 오젓과 육젓은 추젓보다 가격이 비싸다. 이날 추젓이 1㎏에 2만원, 오젓은 2만5천원, 육젓은 4만원 선에서 판매됐다.잡히는 시기에 따라 새우 크기도 다른데, 추젓은 길이가 1~2㎝, 오젓은 2~3㎝, 육젓은 3㎝ 이상 된다.짠맛의 세기를 결정하는 염도 또한 시기별로 다르다. 가장 더울 때 잡히는 육젓은 부패 방지를 위해 소금이 많이 들어가야 해 짠맛이 강하다. 오젓이 중간 맛, 추젓이 가장 덜 짜다.이곳 상인들은 강화 새우젓이 다른 어떤 지역의 새우젓보다도 품질이 우수하다고 자랑했다.중국산 등을 속여 팔다가 적발돼 홍역을 치르기도 한 다른 지역과 달리, 오직 국산만을 고집하며 믿을 수 있는 새우젓이란 이미지를 지켜 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란다.정찬요(54) 강화새우젓축제사무국장은 "우리나라 젓새우의 70~80%가 강화에서 잡히는데, 산지에서 잡아 배에서 바로 염장하는 강화 새우젓은 전국 어디보다 경쟁력이 있다"며 "국내에 유통되는 새우젓의 70~80%는 외국산으로 보면 되는데, 강화에서 사는 새우젓은 원산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젓갈 상점 곳곳에는 새우젓이 가득 담긴 드럼통이 보였다. 매장 한 곳에 진열된 물건만 수천만 원어치가 된다고 한다. 새우젓 국물이 닿지 않아 노랗게 색이 변한 부분을 '윗밥'이라고 부른다. 이 윗밥을 걷어내고 판매하는데 먹어도 상관은 없다. 따로 가져가는 곳이 있다고 한다.강화 새우젓이 명품 소리를 듣게 된 것은 강화의 자연환경과 큰 연관성이 있다. 강화도는 한강이 임진강, 예성강과 만나는 곳이다.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의 변동이 심해 갯벌도 발달해 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합류 지역이라 어종도 풍부해 큰 새우 어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석모도에 염전이 있던 시절에는 품질 좋은 소금이 생산되면서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됐다고 전해진다.젓새우는 조업 방법이 크게 두 가지다.'닻배'라고 부르는 배를 이용하는 연안자망 어업 방식과 '꽁지배'를 이용한 안강망 어업 방식이다.자망 어업은 새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해 잡는 방식이다. 안강망 어업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지점에 자루그물을 투하해 닻으로 고정 부설한다. 그러면 새우가 조류에 의해서 자루그물 속으로 들어가 잡힌다.강화도 어민들은 젓새우에 집중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어종도 많이 났다고 전해진다. 과거에는 조기, 밴댕이, 민어, 병어 등을 잡는 데 주력했다. 지금은 홍어, 까나리, 농어, 숭어 등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강화부지(1783년)에는 민어, 숭어, 석수어, 새우, 가리맛조개, 굴 등이 당시 강화의 수산물로 기록돼 있다.어민들이 생산한 새우젓은 창고로 옮겨 보관 숙성된다.수산시장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새우젓 보관창고 겸 경매장이 있는데, 이곳이 새우젓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새우젓이 모두 이곳을 거친다고 한다. 인천시와 강화군 등이 5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해 2011년 완공한 수산물 처리·저장시설이다. 저온 냉장창고, 냉동창고, 급속 냉동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옛날에는 새우젓을 토굴에 보관했는데, 지금은 현대식 냉장·냉동창고 등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판매를 위해 물건이 빠져나가 창고가 비어 있지만, 10월 초가 되면 창고들이 모두 새우젓으로 가득 찬다.김용순(54) 경인북부수협 판매사업소장은 "옛날에는 토굴에 새우젓을 보관하다가 이곳에 보관시설을 설치하고 장소를 옮겼다"며 "최신식 시설에서 새우젓을 잘 숙성시켜 강화 새우젓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강화 새우젓은 인천의 명품 수산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가을에 수확한 젓새우로 만든 '추젓'은 김장에 빠질 수 없는 재료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지난 9일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수산물 처리·저장 시설에 보관 중인 새우젓이 숙성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판매장 18곳이 운영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장철을 맞아 시장에서 젓갈을 고르는 손님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낡은 시설을 고쳐 지난 2009년 새롭게 조성된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 전경.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IFEZ 스마트시티운영센터 누적 방문객 1만7178명송도국제도시 G타워에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 스마트시티운영센터에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센터가 문을 연 2014년 2월부터 올해 10월 말까지 1만7천178명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전체 방문객의 65%(1만1천204명)는 외국인이다.지난 7일에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연계해 독일, 중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이탈리아, UAE 등 세계 7개국 18개 주요 해외 언론사 관계자가 센터를 찾았다. 인천경제청은 "올해 46개국 2천215명이 센터를 방문했다"며 "쿠웨이트 주택부 장관, 노르웨이 환경부 장관, 에콰도르 산업부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의 센터 방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365일 24시간 체제로 운영되는 센터는 ▲CCTV 실시간 영상 감시 및 관계기관 공조 체제 구축 ▲비상벨 호출 등 상황 발생 접수 및 전파 ▲방범·방재·교통·환경 정보 제공 등의 기능을 한다.■아·태 방송개발기구,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견학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센터장·이충환)에 아·태 방송개발기구 관계자들이 방문했다.시청자미디어재단 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는 최근 아·태 방송개발기구 10개국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국형 미디어교육 현장을 소개하고 센터의 미디어사업을 설명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주최하고 시청자미디어재단이 주관한 이번 행사는 아·태 지역 시청자의 권익 증진과 협력 방안 모색을 위해 마련됐다.말레이시아, 몰디브, 미얀마, 방글라데시, 브루나이, 인도, 캄보디아, 태국, 독일 등 10개국 방송·통신 관계자들은 해송중학교 '찾아가는 미디어나눔버스' 미디어교육 현장을 둘러본 뒤 센터에서 미디어사업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이후 드론교육과 1인 방송 체험에 참여하는 등 스마트 미디어교육 프로그램을 참관했다.■경제청 "송도자원순환센터 고형연료시설 정상 운영"송도자원순환센터 고형연료 사용시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밝혔다.송도자원순환센터는 연수구 지역에서 발생한 생활폐기물을 고형연료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올해 3~9월 고형연료 사용 시설의 일평균 대기오염 물질 배출 농도는 배출 허용 기준 대비 먼지 4.9%, 질소산화물 6%, 일산화탄소 24.3%, 염화수소 32.5%다. 이 기간 시간당 평균 배출량은 먼지 0.02㎏, 질소산화물 0.2㎏, 일산화탄소 0.38㎏, 염화수소 0.2㎏ 수준이다. 염화수소의 경우, 굴뚝자동측정기 교정 과정 등에서 간헐적으로 배출 허용 기준을 초과했으나, 송도 주민에게 건강상 피해를 줄 정도의 농도와 양은 아니라고 인천경제청은 설명했다.인천경제청은 송도자원순환센터 시설·설비 운영 상황을 확인하는 시민검증단을 구성해 운영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인천시청자미디어센터 제공

[zoom in 송도]美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HOPE`

[zoom in 송도]美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HOPE'

오라카이 송도파크호텔 개관5주년 기념희망찬 이미지 마지막 유작 설치 '눈길'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앞에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가 설치됐다.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이 2019년 1월 개관 5주년을 앞두고 정문 앞에 조형물을 새롭게 설치했다. 이 조형물은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Robert Indiana, 1928~2018)의 작품 'HOPE'다.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LOVE' 'HOPE' 'EAT' 'DIE' 등이 있다.'HOPE'는 올해 5월 타계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주요 도시 랜드마크로서 많은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울 명동 대신금융그룹 신사옥 앞에 'LOVE'가 설치돼 있으며, 인증샷 스팟으로 유명하다.호텔 관계자는 "내년 1월 개관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HOPE'를 설치했다"며 "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의 희망찬 이미지 형성과 더불어 큰 포부를 가지고 성장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또 "호텔을 방문하는 고객분들이 정문 앞에 있는 작품을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다"며 "환영 인사와 함께 작품으로 하여금 희망을 발견하고 품길 바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오라카이 송도파크호텔은 'Orakai Hotels & Resorts' 1호 브랜드로, 인천 송도 중심부에 있다. 275개 객실과 2개 연회장, 'Level 19 뷔페 레스토랑', 'Thirsty Monk 탭하우스', 'illy CAFF', 실내외 수영장, 남녀 사우나, 피트니스 센터를 갖추고 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정문 앞에 설치된 미국 팝아트 거장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HOPE'. /오라카이 송도파크 호텔 제공

[zoom in 송도]韓·우즈베크 교류 플랫폼 `송도시대` 열다

[zoom in 송도]韓·우즈베크 교류 플랫폼 '송도시대' 열다

주한 무역대표부 포스코타워에 개소관련외국기관 최초 인천에 둥지 틀어수출입·투자 상담부터 특산품 전시장경제청 "통상 핵심役 기대 적극 지원"우즈베키스탄 주한 무역대표부가 인천 송도국제도시에서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우즈베크 주한 무역대표부는 지난 9일 송도 포스코타워(동북아무역센터) 29층에서 개소식을 하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무역대표부는 대한민국과 우즈베크 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설립한 우즈베크 정부 공식 기관이다. 약 1년간 준비 기간을 거쳐 올해 8월 업무를 시작했으며, 우즈베크에서 파견한 공무원 3명과 주한대사관 상무 관련 외교관 2명 등이 근무하고 있다. 주로 서울에 위치하는 외국 무역대표부가 인천에 둥지를 튼 건 처음이다. 무역대표부 초대 대표는 김창건(에버그린모터스 대표이사) 주한 우즈베크 명예영사다.김창건 대표는 개소식에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한국에 처음 설립돼 양국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됐다"며 "초대 대표를 수행하게 돼 영광"이라고 했다. 이어 "무역대표부가 양국 교류·발전의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 적극적으로 활용해달라"며 "양국 우호 증진과 경제 발전에 초석을 놓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무역대표부는 수출입과 투자 관련 협의를 진행할 수 있는 회의실등을 갖추고 있으며, 우즈베크에서 만든 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개소식에는 김창건 대표를 비롯해 우즈베크 비탈리 펜(Vitaly Fen) 주한 대사와 묵슨크자(Mukhsinkhuja) 페르가나주(Ferghana Regeion) 부지사, 김진용 인천경제자유구역청장, 신명진 한국수입협회 회장, 김승동 (사)유라시아21 이사장 등 우즈베크와 국내 기관·단체·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비탈리 펜 대사는 축사를 통해 "(무역대표부는) 우즈베크의 특산품을 전시·수출하고, 관광과 직접 투자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양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우즈베크는 금, 원유, 가스 등 자원이 많고 정치적으로도 안정돼 있다.김진용 청장은 "포스코타워에는 중국 웨이하이(威海)관이 있고, 포스코대우가 들어와 있다"며 "무역대표부가 한국과 우즈베크 간 무역과 통상에서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앞으로 인천경제청은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다.우즈베크 사브카트 미르지요예프(Shavkat Mirziyoyev) 대통령은 경제자유구역 개발 등 한국의 경제·교육·관광 모델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기존 3개 특별산업지구 명칭과 운영 제도를 경제자유구역으로 단일화했으며, 추가로 4곳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서울이 아닌 인천 송도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한 것도 인천경제자유구역을 롤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으로 인천경제청은 보고 있다. 이와 관련, 인천경제청은 올해 4월 우즈베크 경제자유구역 개발 및 주한 무역대표부 활동 지원 등에 관한 상호협력 양해각서를 주한 우즈베크 대사관과 체결했다. 7월에는 우즈베크 페르가나주, 3월엔 부하라주(Bukhara Region)와 각각 협력 의향서를 체결했다. 이들 지역은 경제자유구역을 개발하는 등 우즈베크의 경제 성장을 이끌고 있는 도시다.인천경제청은 우즈베크 경제 관계 공무원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송도에서 운영되도록 협의하고, 우즈베크 무역대표부 개소를 계기로 다른 나라의 무역대표부도 유치할 계획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입주한 송도 포스코타워 전경. /경인일보DB우즈베크 주한 무역대표부 송도 입주 개관식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옷,와인 등 우즈베크에서 만든 제품이 전시된 무역대표부 모습.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6)]선교와 음악(上)

[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6)]선교와 음악(上)

1885년 아펜젤러, 인천에 내리교회 세워"초기 양악 개신교 선교와 때를 같이 해"오늘날 찬송가 통한 전파 통설로 굳어져인천 영화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가 지난 1일 저녁 인천 남동소래아트홀 대공연장에서 창단 연주회를 했다. 명칭(윈드)에서 알 수 있듯이 관악 주자 30여명으로 구성된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는 2017년 11월 설립 이후 올해 학교 졸업식과 입학식을 시작으로 5월 동구청 주최 어린이날 기념행사 축하 공연을 비롯해 내리교회 행사 등에서 연주회를 했다. 지난 8월에 열린 제16회 춘천관악경연대회에선 은상을 획득했다.지난 1일 연주회는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내걸고 연 첫 번째 무대였다. 영화 윈드 오케스트라의 창단 연주회에는 역시 영화초교 학생들로 구성된 영화 엘피스(헬라어로 소망을 의미) 합창단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영화 엘피스 합창단은 지난해 열린 제2회 인천시 어린이 합창대회에서 우수상을, 올해 인천 소방동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함께 꾸미는 제임스 스웨어린젠의 '아이거(Eiger)'와 골드먼의 '치리오 행진곡'으로 시작한 연주회는 금관5중주 무대와 영화 엘피스 합창단의 공연, 졸업생 임재인의 가야금 독주로 이어졌다. 후반부는 쇼스타코비치 '재즈 모음곡 2번 중 왈츠'와 영화 '미션' OST 중 '가브리엘의 오보에', 김광진의 '마법의 성', 최완규 편곡의 '코리안 사운드 셀렉션'까지 연주를 마무리하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앙코르곡으로 '마징가 Z 주제곡'을 연주하며 더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영화초교는 1892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개교한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이다. 126년 전통의 영화초교 학생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자리였다.100년 앞서 천주교 박해때 '순교자들 성가'"군악대 창설후 양악 퍼져" 능동적 시각도일제의 국악 탄압… 감수성 변화 앞당겨"서양음악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까"의 물음에는 3가지 정도의 답변이 존재한다.그중 개신교의 찬송가 전파로부터 한국의 양악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설은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유선은 1985년에 쓴 '한국 양악 100년사'에서 "우리나라 초기 형태의 서양음악(찬송가 등)은 개신교의 선교와 거의 때를 같이 했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서양음악의 시작은 개신교의 선교를 기점으로 보는 1880년대 초부터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제물포) 해변에 배 한 척이 닿는다.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가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파견된 것이다. 인천학연구소에서 발간한 '간추린 인천사'(1999년)에는 당시 인천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뱃머리에서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 부활하시던 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시어/ 이 백성을 속박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고/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사/ 빛과 자유를 주옵소서"라며 기도했다고 적었다. 당시 국내는 갑신정변으로 인한 어수선한 시국이어서 외국인 부녀자의 입경(入京)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언더우드만 서울로 향하고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해 6월 21일 다시 인천에 온 아펜젤러는 한 달 정도 머무르며 예배를 보았는데, 이때 국내 첫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세워진다.우리나라 개신교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선교사의 입국을 시작점으로 본다.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 만주에서 세례 받은 교인들이 있기는 했으나, 시기적으로 크게 앞선 것도 아니었고 수적으로도 약소했다고 우리 교회사와 근대음악사 연구서들은 전한다.1911년 평양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이유선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2005년 타계 때까지 '한국 양악 100년사'를 비롯해 서양(기독교)음악 관련 연구와 저서를 다수 남겼다. 이유선은 아펜젤러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 등이 인천에 온 1885년을 기점으로써 100년 후인 1985년에 '한국 양악 100년사'를 출간했다. 개신교의 시작을 기점으로 한 '한국 양악 100년설'이 통설로 굳혀지는 순간이다.천주교의 전례를 시점으로 보게 되면 그보다 100년이 늘어난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진 조선 사람들은 베이징에서 유입된 서적을 통해 복음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 이후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최초의 교회와 함께 조선교구가 설립됐다. 자생적인 교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가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앵베르 주교와 샤스탱 신부의 입국 등 프랑스 성직자에 의해 탄압 속에서도 교세를 키워나갔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외국인 신부였던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압송될 때 성가와 성영(聖詠)을 부른 기록도 있다. 이때의 성가는 당시 프랑스 신부였던 이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교육받았기 때문에 찬송가와 시편(Psalm)의 낭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서양 선교사에 의한 수동적 전래가 아닌 한국인 스스로 행한 능동적 측면을 부각해 바라본 견해는 국악학자 장사훈(1916~1991)에 의해 제기됐다. 그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찬송가와 창가를 가르쳤으나 당시의 사회실정은 지금과 달리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인식을 얻지 못했다"면서 "1900년대 우리 군악대 창설로 말미암아 비로소 한국에 양악이 들어와 퍼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한국음악학 1세대 중 한 명인 송방송(76)도 '대한제국 국가'를 작곡한 프란츠 에케르트의 도착 이후 우리 땅에 양악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더한다.1910년 8월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했다. 여기에 더해 서구의 찬송가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악적 감수성을 크게 바꿔놓는다. 우리 음악을 듣고 즐기던 감수성이 서양식 노래를 듣고 즐기는 감수성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해방 이후 미군 주둔과 우리나라의 선진화 추구도 결국 서양에서 관습화된 음악이 이 땅에서 위세를 떨치는 데 이바지했다. 서양음악이 본래 음악이며, 우리 고유의 전통 음악은 국악이라는 통념으로 자리하게 된다. 오늘의 음악 상황에 대한 주체(반성)적 인식은 '우리 음악의 비전'이다. '서양 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20세기 서양음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은 큰 울림을 준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1901년께 초창기 내리교회 모습. 1892년부터 1903년까지 내리교회 담임목사를 지낸 존스(G.H.Jones) 목사는 영화보통학교와 영화여자학교를 세우는 등 인천에 근대식 교육의 씨앗을 뿌렸다. 오른쪽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 /내리교회 제공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영화 윈드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에서 영화 엘피스 합창단과 합동 공연 모습. /영화초교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2]인천항 관문 `갑문` (하)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2]인천항 관문 '갑문' (하)

1910년대 미곡 수출 중심으로 떠오른 인천日, 곡물 반출위해 축항… 죄수등 강제동원처참했던 공사현장 '백범일지'에도 기록돼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10월 26일. 일본우선주식회사 깃발을 단 기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사도(沙島)를 지나 바다 위 거대한 철문 앞에 멈췄다. 두 개의 갑문을 지난 배는 400m가 넘는 거대한 길이의 부두에 정박했다. 8년여 동안 진행한 인천항 축항(갑문 건설) 공사를 마무리하고 준공식에 앞서 가진 시험 운항이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30분께 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700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인천항 축항 공사 준공식이 개최됐다. 수심이 얕고 9~10m에 달하는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24시간 선박 접안이 어려웠던 인천항에 4천500t급 기선 세 척이 항상 정박할 수 있는 항만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조선총독부는 물자를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해 1911년 현재 인천항 제1부두 근처에서 갑문 건설사업을 시작한다. 1933년 발간한 인천부사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한 공사에는 391만 4천455엔이 사용됐다. 1918년 당시 일본 내 쌀 한 섬(150㎏) 가격이 10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 돈으로 300억 엔, 우리나라 돈으로 3천억 원이 넘는 예산이 사용된 셈이다.조선총독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이유는 인천항이 우리나라 미곡 수출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천항은 1910년대부터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가 됐다고 한다. 1910년대 인천에서 투기의 일종인 '미두(米豆)'가 가장 성행한 것도 인천으로 쌀이 모였기 때문이다. 미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기간 내에 쌀을 사거나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일본이 우리나라 곡물을 자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진행한 축항 공사에는 조선인이 동원됐다. 특히, 인천 내동에 있던 경성감옥 인천 분감에 수감된 조선인 죄수들이 대거 끌려갔다. 그 가운데 백범 김구(1876~1949)도 있었다. 김구는 1911년 '안악 사건'(1910년 11월 안명근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서울에서 옥살이를 한다. 1914년 39세 때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그는 백범일지에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매고 축항 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 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그러면 같이 쇠사슬을 맨 죄수들도 함께 바다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참고 일했다'고 참담한 심정을 기록했다. 인천항 내항 1부두 동쪽과 남쪽 시설은 콘크리트로 덧씌운 탓에 옛 축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북쪽 석축은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석축 위로 정박한 배를 묶어 두는 계선주(繫船柱) 역시 당시 모습대로 열을 지어 서 있다. 1930년대 인천 지역에 군수공장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인천항을 확장할 계획(제2선거 건설)을 세웠다. 인천항만공사가 2008년 발간한 '인천항사'에 따르면 당시 제2선거를 계획했던 지역은 지금의 인천 북항 일대로 추정된다. 인천도시역사관 배성수 관장은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조선목재, 동양방적(현 동일방직) 등 군수 물자 보급을 위한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많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제2선거 건설 계획은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공사 비용을 확보하지 못해 백지화됐다.경제개발로 화물 급증 1974년 새 갑문 준공한계 넘는 선박 드나들며 산업화 견인 역할역사적 명암 공존 '100년사 기념' 가치 충분일본이 시작하지 못한 공사는 1960년대 우리 정부에 의해 추진됐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5년 서울 구로와 인천 부평·주안에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화물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0년 46만 6천259t이었던 인천항 물동량은 1969년 279만 8천t으로 600%나 올랐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도시경영센터장은 "당시에는 육로 운송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산 등 다른 지역까지 화물을 운반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다"며 "구로, 부평, 주안 등 공장에서 필요한 원자재 가운데 대부분이 인천항으로 수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1974년 현재의 갑문이 만들어지면서 인천항은 컨테이너 하역 전용 부두인 4부두를 포함해 2부두와 3부두 등 5만t급 이상 대형 선박들을 동시에 접안해 하역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다. 항만 인프라가 만들어지면서 인천항 물동량도 급증했는데, 1979년에는 2천 400만t의 물동량을 처리했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3천만t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갑문은 항상 배들로 가득했다는 게 당시 근무자들의 설명이다. 1978년부터 인천항 갑문에서 근무한 김익봉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장은 "인천항 갑문에 하루 50척의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데, 58척의 선박이 통항한 적도 있었다"며 "인천 앞바다와 내항 안에는 갑문을 이용하려고 대기하는 선박이 항상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입출항 선박이 너무 많아 갑문을 거의 온종일 열어 놓다 보니 내항의 물이 계속 줄어들어 수심이 낮아지는 현상까지 벌어졌다"며 "내항이 일정 수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외항의 물을 내항으로 공급하는 공사도 실시했다"고 덧붙였다.지난달 27일은 인천항 갑문이 처음 만들어진 지 100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인천 지역에서는 별도의 행사 없이 이를 조용히 지나쳤다. 현재 남아있는 갑문이 100년 전 만들어진 것도 아닌 데다, 일제 수탈의 역사를 굳이 기념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인천항 갑문의 축조일은 역사적으로 기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지적한다.김창수 센터장은 "인천항 갑문은 100년 전 조선인의 피땀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한 시설"이라며 "명암이 함께 공존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갑문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인천시 등 관계 기관이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918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에 선박이 입항하는 모습. 초창기 갑문은 현재 운영되는 '슬라이딩 게이트(미닫이)' 방식이 아닌 '마이터 게이트(여닫이)' 형태로 제작됐다.1911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된 인천 내동 경성감옥 인천 분감 조선인 죄수들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1918년 10월 27일 열린 인천항 축항공사 준공식 모습./인천항만공사 제공현재의 갑문이 지어지기 전인 1966년 인천항 전경.1974년 인천항 갑문타워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

[zoom in 송도]송도국제도시 브리핑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 9일인천시와 외교부가 공동 주최하고 인천관광공사가 주관하는 '2018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가 오는 9일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다. 국제기구-MICE 커리어 페어는 국제기구와 MICE 분야 진출 희망 인력에 대한 전문교육 및 정보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해당 분야 일자리 창출을 위해 2015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올해에는 UNDP(유엔개발계획) 뉴욕 본부, ICC(국제형사재판소) 헤이그 본부, 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 등 9개 국제기구 본부 인사 전문가들과 태국 전시컨벤션뷰로와 인센티브&컨벤션협회 임원 등이 참석한다.주요 행사로는 ▲국제기구 분야별 주요 업무와 인사 채용 방법을 소개하는 '국제기구 진출 설명회' ▲국제기구 내 이벤트 매니지먼트에 이르기까지 MICE 분야의 참신하고 다양한 글로벌 커리어를 알려주는 '글로벌 MICE 아카데미' ▲NGO 채용 계획 및 진출 사례를 소개하는 'NGO 진출 설명회' 등이 있다. 국제기구 및 MICE 기관·업체 약 60여 개소가 참가하는 진로·채용 상담 및 홍보 부스도 운영된다.■이달중 'IFEZ 투자유치·일자리박람회'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2018 IFEZ(인천경제자유구역) 투자유치 홍보 및 일자리 박람회'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이번 박람회는 핵심 국정과제인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것이다. 송도 등 IFEZ 입주기업과 잠재투자기업의 일자리 정보를 구직자들에게 알려주고, 국내외 법인·기업에 IFEZ 투자 가치를 홍보하는 행사다. VR(가상현실), 로봇, 드론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부대행사도 진행된다. 인천경제청은 이달 중 송도컨벤시아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주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 9일 개소식송도국제도시 포스코타워 29층에 둥지를 튼 주한 우즈베키스탄 무역대표부가 오는 9일 오전 11시 개소식을 한다.우즈베크 무역대표부는 대한민국과 우즈베크 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설립한 우즈베크 정부 공식 기관이다. 개소식은 우즈베크 통상부, 주한 우즈베크 대사관, 주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가 공동 주최한다. 주한 우즈베크 무역대표부 김창건(주한 우즈베크 명예영사) 대표는 "글로벌 국제업무지구로 급부상하고 있는 송도에서 무역대표부를 오픈하게 됐다"며 "양국 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zoom in 송도]송도 3개 조성계획 `정부 수요조사` 포함

[zoom in 송도]송도 3개 조성계획 '정부 수요조사' 포함

인천 송도국제도시는 공유수면을 매립해 만든 도시이기 때문에 바다와 접하고 있다. 특히 외곽의 수로와 호수를 연결해 'ㅁ'자 모양의 물길을 만드는 워터프런트 조성사업이 계획돼 있어, 마리나(Marina) 조성의 최적지로 꼽힌다. 마리나는 스포츠 또는 레크리에이션용 요트와 모터보트 등을 위한 항구로, 선박 계류시설뿐만 아니라 주차장·호텔·놀이시설 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항만을 말한다. 해양관광산업 핵심 기반시설이다. 소득 수준 향상, 여가 시간 확대 등으로 해양스포츠 등 해양관광 수요는 증가하는 추세다. 중국도 해양관광산업이 성장하고 있어, 마리나 개발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하지만 '해양도시' 인천에는 영종도에 있는 왕산마리나가 유일하다. 2천552만 명의 수도권 인구를 배후에 두고 있지만, 그 지리적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인천공항·항만 가까워 접근·시장성 '우수'항만公, 국제여객부두에 크루즈연계 전략연수구, 10공구 연구·수리시설 대규모 유치경제청, 워터프런트 남측 수로에 조성 추진해수부, 3곳등 현장조사 타당성 검토 거쳐 내년중 2차 계획·정책방향 수립 '귀추 주목'그나마 최근 인천시가 실시한 '(해양수산부) 제2차 마리나항만 기본계획(2020~2029년) 수요조사' 결과에 송도 마리나 조성계획 3개가 포함됐다. 1개는 '제1차 마리나항만 기본계획(2010~2019년)'에 반영된 사업이고, 나머지 2개는 신규 사업이다. 이들 사업은 아직 계획 또는 구상 단계이기 때문에 본격화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 표·위치도 참조■ 마리나 최적지 '송도'송도는 다른 수도권 마리나 예정지에 비해 접근성, 시장성, 이용성 등이 매우 우수하다.인천항만공사와 연수구 자료를 보면, 송도는 대한민국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인천항이 가깝다. 인천공항은 제2여객터미널 개항 등으로 여객 처리 능력이 커지고 있고, 인천항은 국제여객부두 신설 등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는 "해양관광의 핵심 시설인 마리나를 도입해 국내외 해양관광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지역 및 국가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했다.송도는 지하철과 도로 등 기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배후 수도권에 풍부한 인적·물적 관광 인프라가 있다. 송도와 서울을 잇는 GTX,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인천~안산 구간이 개통하면 접근성이 더욱 향상될 전망이다. 연수구는 "송도는 항공, 해상, 육상교통 등 접근 수단이 다양하다"며 "인천공항과 인접해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유리하고, 인천항 국제여객부두와의 연계로 시너지 효과도 발생한다"고 했다.■ 송도 마리나 조성 계획·구상인천항만공사는 송도 9공구 국제여객부두(크루즈·카페리 접안 시설)에 마리나를 조성할 계획이다. 육상 165척, 해상 135척 등 총 300척이 계류할 수 있는 규모다. 인천항만공사는 국제여객부두에 국제여객터미널을 건설하고 있다. 또 그 배후 부지에 숙박시설과 상업시설 등 다양한 분야의 시설을 유치할 계획이다. 크루즈와 카페리를 이용해 인천에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마리나에서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국제공항, 크루즈부두, 배후 단지가 연계된 국내 유일의 마리나가 될 것이라고 인천항만공사는 설명했다.연수구는 송도 10공구 준설토 투기장에 마리나를 유치할 계획이다. 사업비 6천787억 원, 119만 4천㎡, 2천800선석(육상 2천 척, 해상 800척) 등 규모가 크다. 연수구는 이곳에 선박 계류시설뿐만 아니라 마리나 관련 연구·전시·판매시설과 수리·공장시설도 계획하고 있다.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송도 워터프런트 2단계 사업 대상지인 남측 수로에 마리나를 조성할 계획이다. 워터프런트는 기존 호수와 수로를 연결하고 송도 11공구에 수로를 내 'ㅁ'자형 물길을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다. 수 면적 4.66㎢, 수로 연장 16.19㎞ 규모이며 2027년 완성을 목표로 한다. 인천경제청 관계자는 "남측 수로 너비가 400m 정도 되는데, 약 100m를 매립할 계획"이라며 "매립지를 매각해 워터프런트 사업성을 높이고 마리나 조성 비용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한편, 송도 6·8공구 중심부 128만㎡ 개발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던 '블루코어 컨소시엄'도 6공구 호수 변에 마리나 시설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블루코어 컨소시엄은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되찾고자 인천경제청과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마리나 조성 시기는?마리나 조성사업은 경제성과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연수구와 인천경제청이 계획한 마리나 사업은 우선 '마리나항만 기본계획'에 반영돼야 하고, 민간 투자도 유치해야 한다. 인천항만공사와 인천경제청 마리나 사업은 각각 국제여객부두 배후 단지 개발, 워터프런트 조성과 연계돼 있어 이들 프로젝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연수구 사업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사업 타당성 확보 여부가 사업 추진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해수부는 지자체 등이 제출한 마리나항만 기본계획 수요조사 결과를 토대로 현장 조사, 타당성 검토 등을 벌여 내년 중 제2차 기본계획과 마리나 정책 방향을 수립할 예정이다. /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연수구 송도동 국제여객부두 인근 마리나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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