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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풍경이 있는 에세이]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재혼가정 많은데 계모는 아직 '악역'이 무슨 시대착오적 노래란 말인가고민중인 4살아이 엄마 후배 말하길"새로운 시선 동화는 새엄마 구박해도왕자님이 있어 괜찮다네요"… 맙소사다섯 살 된 아이는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생각나는 대로 한 곡씩 불러주는데, 곧잘 따라 한다. 곰 세 마리 겨우겨우 서툰 발음으로 부르던 시절이 이미 옛날 같다. 매일 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불러줄 노래도 다 동이 났다. 무슨 노랠 해주지. 문득 생각이 났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시작하자마자 선곡에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다. 가사가 좋지 않다. 하지만 아이는 '신데렐라'가 나오자마자 눈이 동그래졌다. 핑크드레스를 입고 파란 머리띠를 하고 반짝이는 유리구두를 신은 그 신데렐라! 다른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별수 없이 끝까지 불러주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노래란 말인가. 재혼가정이 수두룩한 시절이다. 하지만 동화 속 계모는 아직 악역이다. 친구는 여중생 딸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했다가 곧 헤어졌다. 견딜 수가 없었단다. "여중생 딸을 내가 행여 구박이라도 할까봐 내 눈치를 계속 보더라고. 시댁 식구들이 다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해. 하루 종일 감시를 받는 기분이었어."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구박은커녕 친해질 수도 없었다고 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서도 못된 계모가 된 것 같아 친구는 결혼생활을 끝냈다. 아이는 아직 신데렐라가 그저 예쁜 공주님인 줄 알고 있다. 계모가 뭔지, 구박이 뭔지 모른다. 그냥 따라 부른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신데렐라는 어려서……' 하고 노래를 불렀다. 아이는 이제 백설공주도 읽게 될 것이고 선녀와 나무꾼도 읽게 될 것이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구박한 계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고 뿔 달린 도깨비만큼이나 새엄마를 두려워하게 되겠지. 선녀의 날개옷을 숨겨 아내로 삼아버린 나무꾼이 범죄자인 줄도 모르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을 배운 뒤엔 스토킹 범죄자를 두고 의지가 강력한 자로 오해할는지도 모른다. 콩쥐는 예쁘고 팥쥐는 못생겨서, 못생긴 소녀는 못된 소녀라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별걱정을 다 하네. 니들도 어릴 때 다 그거 읽고 컸어."친정엄마는 나에게 유난을 떤다며 한소리 하지만 별걱정을 다 하는 게 아니다. 그걸 읽고 자란 내가 그 동화들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리고 아직 여전한 그 편견을 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데. 3년 동안 따라다닌 여자를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다는 노총각 친구의 말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너도나도 말을 보탰다. "무슨 소리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어! 포기하지 마. 언젠간 네 마음을 알아줄 거야." 그 분위기에 기겁을 했다. "하지 마, 하지 마! 그거 스토킹이야. 범죄야." 부추기던 친구들이 무안해했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그냥 위로해 주자고 하는 말인데 뭘 그렇게 유난을 떨어?" 그런 식의 위로는 하지 말란 말이다. 그건 듣기만 해도 불쾌하고 두려운 일이다. 어린이집에서 친구가 자꾸 괴롭힌다고 하소연하는 아이를 두고 상대 아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애가 널 진짜 좋아하나 봐. 네가 예쁘고 좋아서 그런 거야. 정말 미안해. 조심시킬게." 네 살 아이를 키우는 후배도 나와 똑같은 고민 중이었다. 어쩌다 신데렐라 노래를 불러주고 말았단다. "동화를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쓴 오디오북이 있다고 해서 신데렐라를 틀어줬어요. 결말이 뭔지 아세요? 새엄마가 구박해도 괜찮아, 신데렐라에겐 왕자님이 있으니까. 이거였어요." 아이고, 맙소사. 왕자님이 있어서 괜찮다니. 이 노릇을 어쩌나./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해인사와 팔만대장경

[풍경이 있는 에세이]해인사와 팔만대장경

천년세월 변함없이 지켜온 경판들오랜 침묵 전하는 메시지 크고 장엄고작 한나절에 불가사의한 말씀들다 새긴다는것은 허무맹랑한 욕심눈과 마음으로 차곡차곡 담아본다집을 나선 지 나흘째, 가야산 자락으로 들어선다. 계곡의 물소리는 짐승의 포효처럼 우렁차다. 다행히 바람은 알맞게 살랑거리고 햇살은 대지를 뜨겁게 달군다. 얼마 만에 찾아가는 해인사인가. 거두절미 천년의 시간을 견뎌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장경판으로 알려진 팔만대장경(불교경전을 종합적으로 모아 기록한 기록물)이 예전 그대로 잘 있는지 보고 싶었다. 해인사 가람 배치도를 보면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 구광루를 지나 정중탑과 대적광전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네모 모양의 장경판전이 기다린다. 그 뒤로 수미정상탑이니 영락없이 부처님께서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있는 셈, 여기서 북쪽 건물은 법보전 남쪽 건물은 수다라전이다. 해인사가 자리한 지형은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 돛대바위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겨 근자에 다시 세운 탑이 단아하기 이를 데 없는 8각 7층 석탑이다.해인사라면 그 무엇을 봐도 대장경을 보는 것이라 했던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20분쯤 오르막을 걸어 일주문을 통과 대적광전을 지나 가장 뒤쪽에 자리한 장경판전 앞에 서자 가슴이 설렌다. 아침나절이라 햇살이 서고 안쪽으로 길게 들어서고 나무 칸막이 사이로 천년의 시간을 변함없이 지켜온 경판들, 보일락 말락 하는 오랜 침묵의 시간들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는 크고 장엄했다. 생각해 보라. 우리 조상들은 후세를 위해 목판본을 만들고 이걸 지키기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했겠는가. 경판이 보관된 법보전에는 스님 한 분이 나지막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읊고 계셨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처럼 잠시 왔다가 서둘러 돌아가기 바쁘지만 나는 쉬이 자리를 뜰 수 없다. 천년의 시간과 불가사의하다는 말씀들을 나 같은 범인이 고작 한나절에 새긴다는 건 얼마나 허무맹랑한 욕심이겠는가. 허나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저 경판들, 손으로 쓰다듬을 수 없으니 눈으로 마음으로 더듬고 또 더듬을 수밖에, 그리고 차곡차곡 심연 깊이 눌러 담아 두는 도리밖에.해인사를 감싸고 있는 주변의 숲은 우람하고 계곡의 노거수들은 푸르다 못해 검다. 이 좋은 자리에 대장경을 모시고 유구한 세월을 견디고 있는 저 부처님의 살 같은 말씀들, 불자가 아니어도 사람인 우리가 새기며 살아야 할 말씀들은 얼마나 차고 넘치던가.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도 많을 것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판 팔만대장경은 1962년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1천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4천 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어 팔만대장경이라 이른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과 분사도감을 두어 만든 것이라고.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으며, 판가는 천지현황 등의 천자문 순서로 함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와 정수의 순으로 가장하였다고 한다.경판의 크기는 세로 24㎝ 내외, 가로 69.6㎝ 내외, 두께 2.6∼3.9㎝로 양 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으로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소나무, 후박나무 등의 목재를 썼고, 무게는 3∼4㎏가량으로 현재까지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천지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져 있는데, 그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고한다.처음엔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그 후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나

[풍경이 있는 에세이]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나

'인간의 존엄성' 훼손하는 범죄우리 사회에선 이상하게도 관대도덕 붕괴시키는 죄 침묵하거나무조건 용서는 오염 증폭시킬 뿐잘못 대가 따라야 건강사회 유지얼마 전 '뉴욕타임스' 보도에 의하면, 캉화 렌(Kanghua Ren)이라는 한 중국계 유튜버가 치약이 든 과자를 노숙자에게 주고 골탕을 먹였으며 이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 죄로 바르셀로나 법원에 의해 징역 15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그는 피해자에게 2만2천300유로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향후 5년간 유튜브를 비롯한 모든 SNS 계정을 폐쇄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그가 지은 죄목은 소위 '도덕적 정직성'을 저해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용어는 'moral integrit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정직성'이라고 하면 개념이 선명하지 않은 느낌이어서, 오늘은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영어 'integrity'는 우리말로 '정직, 청렴, 성실' 등은 물론 '완전무결, 나뉘지 않은 전체'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단어이다. 외연과 내포가 동일한 속성을 지녀 하나인 상태, 즉 겉과 속이 한결같은 사람을 일러 'integrity'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법률이나 철학에서 쓰는 공식 용어가 있겠으나, 나는 이를 '항상성'이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즉 'moral integrity'는 '변하지 않는 도덕성'인데, 조금 의역을 하자면 '(변치 않는) 기본적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랄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유튜버는 노숙자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은 것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아무리 누추하고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결코 유린당해서는 안될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법원의 판결을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다소 지나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모 여성 연예인의 기사에 "꽃뱀도 시집만 잘 가면 땡이로구나"라는 댓글로 모욕한 사람에게 벌금 100만원을 부과했다고 한다. 또 재작년 세상을 분노하게 했던 '땅콩회항' 사건에서 대법원은 놀랍게도 '항로변경'에 대해선 무죄를, '폭언폭행'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판결했다. 이는 아무런 처벌 없이 면죄부를 준 것과 다름없다. 그 외 많은 살인과 성폭력 범죄에 대해서도 법원은 심신미약, 혹은 우발적 범행인지 여부에 따라 정말 '관대한' 벌을 내리기 일쑤이다. 이런 식이라면 그 스페인 유튜버는 아마도 '훈계'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까.여기에서 나는 법적 판결과 '도덕적 정직성' 사이의 괴리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법은 대의기관인 국회가 만든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도덕을 어기는 법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지점에서 '도덕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나아가 '도덕은 개인의 판단인가, 아니면 한 사회의 공동 이데올로기인가'라는 오래된 문제를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철학자는 도덕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을 고려하고,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든 개인의 생각이 서로 같지 않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 없는 사회는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답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개인의 일이든 사회적 문제이든 모든 사건(events)은 관계망을 가진 주체에 의해 발생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무시하는 단일 가치관에 모든 개인 주체를 강제로 꿰맞추려 애쓰면서도, 그 개인 주체의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범죄에 대해서만은 이상하리만큼 관대하다. 도덕을 무너뜨리는 죄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오염을 증폭시킬 뿐이다. 우리도 스페인처럼 노숙자를 놀렸다면 15개월의 징역형을, 또 독일에서 준비 중인 법(NetzDG)에서처럼 SNS에서 거짓 혐오 뉴스를 걸러내지 않는다면 그 사업자에게 최고 500만유로의 벌금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잘못에 대해 돌을 던짐으로써 주체와 타자가 함께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 이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유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겉으로 시끄럽기만 할 뿐, 속으로는 끝까지 책임을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분명한 잘못에 돌을 던지지 않는다면 결국 그 돌은 나 자신에게로 날아올 것이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기녀 설죽의 만시와 석전

[풍경이 있는 에세이]기녀 설죽의 만시와 석전

노비였던 '설죽' 스스로 한문 익혀한시 167수나 남긴 빼어난 문장가詩 품격 황진이·허난설헌과 '비견' 송강 정철 수제자로 유명한 '석전'둘의 만남은 모두 시인이었기 때문설죽(雪竹)이 석전(石田) 성로(成輅)를 처음 만난 것은 봉화 유곡의 청암정 주연자리에서였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사대부들은 설죽에게 석전의 만시를 지어 눈시울을 적시게 하면 석전을 모시도록 천거하겠다고 제안했다. 젊어 아내를 잃은 석전은 홀아비로 30여년을 살고 있었다. 설죽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만시를 지어 읊었다. '서호정 초당문은 닫혀서 적막한데/주인 잃은 봄 누각엔 벽도향만 흐르네/청산 어느 곳에 호걸의 뼈 묻혔는지/오직 강물만 말없이 흘러가네' 숙연하게 듣고 있던 좌중의 여러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이 만시의 인연으로 설죽은 석전의 비첩이 되었다. 만시는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설죽은 봉화의 사대부, 석천(石泉) 권래(權來)의 시중을 드는 노비였다. 노비의 신분이었던 설죽이 어떻게 학문을 할 수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노비였음에도 15세가 될 때쯤 신분을 숨기고 명산대천을 떠돌며 사대부들과 교유했던 것을, 그녀가 남긴 시편으로 알 수 있다. 석전(1550~1615)은 송강 정철의 수제자로 꽤 알려진 당대의 시인이었다. 스승 정철의 잦은 유배를 보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던 석전은 상처 후 한강의 서호 부근에 서호정이라는 우거를 마련하고 술과 시로 세월을 보냈다. 오랜만에 봉화를 찾아 사대부들과 술자리를 가졌던 석전은, 설죽과의 첫 만남이 자신의 죽음을 노래한 만시여서 운명적인 조우였다. 설죽은 망설임 없이 석전을 따라 한양으로 올라와 10여년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설죽은 생몰연대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십대 후반에 석전을 만나 이십대 후반에 홀로 남았을 것이다. 노비와 사대부의 만남이었지만 사십년 가까운 나이 차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시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설죽은 스스로 한문을 익힌 문장가로, 그녀가 남긴 한시는 모두 167수나 된다. 그녀의 시는 빼어난 서정과 품격을 보여 황진이와 허난설헌에 비견된다.그녀는 석전을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사랑했다. '잠령은 안개와 노을의 주인이고/석전은 시의 주인이네/서로 만나 취하는 줄도 모르는데/양화진엔 달이 지네'라고 읊은 시가 '봉화 성석전'이다. 석전이 시의 주인이라 노래한 것은 최고의 시인이라는 의미다. 석전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쓴 시가 '님 떠난 후'다. 하강의 이미지가 시편을 압도하지만 서정 넘치는 시다. '낭군님 떠나간 뒤 소식이 끊어져/봄날 청루에 홀로 잠드네/촛불 꺼진 창에서 끝없이 우는데/두견새 울고 배꽃에 달이 지네'는 지극한 슬픔의 노래다. 우는 그녀를 따라 두견도 울고 배꽃에 달이 지면, 배꽃도 달도 따라 우는 것이리라. '비단 휘장'이라는 시편 또한 그녀의 외로움을 노래한다. '비단 휘장 닫아걸고 중문도 닫으니/모시적삼 소매에 눈물 흔적 보이네/옥굴레 금안장 임은 어디 계신지/삼경에 흐르는 눈물 감당할 수 없네.'로 마음이 아려온다. 석전과의 추억을 읊은 시가 '서호의 석전을 기억하며'다. '십년 동안 석전과 한가로이 벗하여 놀며/양자강 머리에서 취하여 몇 번이나 머물렀던가/임 떠난 뒤 오늘 홀로 찾아오니/옛 물가엔 마름꽃 향기만 가득하네'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녀의 사무치는 외로움은 서러운 춤사위가 되고 애절한 노랫가락이 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몇 해나 석전 없는 서호정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다. 서호정을 떠나 호서지방의 관기로 일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시편이 문헌에 남아 있다.석전이 드러내놓고 설죽을 노래한 시편은 전해지지 않으나 '고운 사람'이라는 시는 설죽에게 헌정되었을 시다. '돈대에 이슬이 막 내려 가을빛 서렸기에/흥이 일어 생선과 채소 안주에 술을 찾았네./고운 여인이 붉은 단풍잎을 손에 들고 와/시골 늙은이 취한 얼굴 같다 웃으며 말하네.' 서호정 뒤로 나즈막한 돈대가 있었다. 그렇다면 붉은 단풍잎을 들고 와 시골 늙은이 취한 얼굴 같다며 웃는 고운 여인은 설죽임에 틀림없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꽃

[풍경이 있는 에세이]꽃

목 잘리는 순간 삶을 떠난 '꽃다발'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며 숨거둬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릴땐 '비참'꽃을 보고 지나치지않고 걸음 멈춰찬찬한 눈길주는 사람이 나는 좋다 꽃을 선물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일이나 각종 기념일에, 혹은 입학식이나 졸업식, 시상식 같은 경사에 꽃을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 축하합니다! 기쁜 일에는 으레 꽃이 빠지지 않는 법이니까. 물론, 별다른 이슈가 없는 날에도 꽃은 곧잘 선물이 된다. 연인이나 가족끼리 꽃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전하는 일.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얼마나 너를 웃게 하고 싶은지. 실제로 꽃을 받아든 대부분은 웃는다. 소소하지만 풍족한 기쁨을 느낀다. 활짝 핀 꽃도 꽃이지만, 그걸 건네는 이의 뜻을 알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이토록 예쁜 걸 주시다니. 온 안면 근육을 동원해 감사를 표시한 뒤 꽃을 안고 돌아설 때면 어쩐지 사랑받는 사람이 된 기분. 버스를 기다리다가, 또는 상점에서 물건값을 치르다가 "어머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하고 누군가 알은체라도 하면 또 한 번 웃게 된다. 꽃이란 바로 그런 것. 그러나 꽃이라는 선물이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사정 때문이겠지만, 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다. 나 또한 이 그룹에 속한다. 나는 정말이지 꽃 선물만은 사양하고 싶다. 선물을 두고 이런저런 불평을 한다기보다, 세상에 하고많은 선물이 있다면 나는 되도록 그것이 식물이나 동물은 아니길 바란다. 하물며 목이 댕강 잘린 채 죽어가는 것이라면….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꽃은, 그러니까 꽃다발은 지금 막 삶을 떠난 존재다. 얼마 전의 일이다. 지방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학생 대표가 연단에 선 내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이런 융숭한 대접이라니! 그걸 받아들고 어색하게 웃던 나는 이내 고민에 휩싸였다. 자, 이제 이 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여느 때의 나라면, 앉은 자리에 슬쩍 두고 가거나 꽃을 선호할 만한 일행에게 "가질래요?" 하고 줘버렸을 것이다. 선물한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런 경우는 애매하다. 구색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어린 학생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좀처럼 요령을 부릴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집까지 그 꽃을 품에 안고 왔다.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내내, 행여 잎이라도 상할까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마치 로봇과도 같은 자세로 말이다. 진짜 문제는 이다음부터. 집에 돌아온 나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로 화병을 꺼내고 잽싸게 꽃다발의 포장을 풀었다. 그렇게 색색의 꽃들을 잘 간추려 병에 꽂고 나면 도리가 없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꽃들이 완전히 시들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침마다 화병의 물을 갈아주는 것뿐. 이때의 나는 중병으로 몸져누운 이의 병상을 지키는 무력한 보호자의 심정이 된다. (과장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하고 안색이 어두워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온 집안을 감도는 악취. 썩은 몸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레들. 그런 것들을 애써 모른 체하며 나는 전전긍긍한다. 차라리 어서 빨리 숨을 거두기를, 하고 바라는 한편 막상 임종의 순간이 닥치면 현실을 부정하며 어떤 기적을 갈구하듯 미련하게 군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은 더 난감해진다. 종량제 봉투에 마구잡이로 구겨 넣은 꽃을 쓰레기장에 내동댕이치는 일을 나는 해야만 하는데, 그야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너무 별스러운가. 그런 것도 같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별스러운 사람이 수두룩하다. 말간 얼굴 뒤에 아픔을 감추고 살거나 삶의 가장 환한 순간에 끝을 생각하는 사람들. 꽃을 보며 새삼 아름다움의 이면을 떠올린다. 너무 쉽게 꽃을 선물하지 말 것. 하지만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조차 알 수 없는 내 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을 지나치는 사람이 아니라 꽃 곁에 걸음을 멈추는 사람, 찬찬한 눈길로 그 꽃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것./박소란 시인박소란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깥 세상은 왜 아직도 불편해?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깥 세상은 왜 아직도 불편해?

내가 겪었던 불의가 그대로일까봐어린 생명을 낳아도 되나 망설일때아이가 자랄때쯤 달라지겠지 위로민망하게도 달라질 기미는 안 보여아무래도 어른들이 바빠져야겠다만삭 때였다. 나는 집을 떠나 친정에 머물던 중이었다. 배는 무겁고 시간은 더뎠다. 다섯 살 조카의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나갔더니 가방을 메고 호다닥 뛰어나오며 내게 물었다. "이모! 오늘도 애기 안 나왔어요?"그렇다고 하니 손으로 내 부른 배를 도닥이며 다시 물었다."그럼 배를 잘라서 애기 꺼낼 거예요?"그 말이 우스워 풀풀 웃었다."난 나오기 싫어서 막 고집을 부려서 우리 엄마가 배를 잘라서 꺼냈는데."왜 나오기 싫었느냐 물었다. 조카가 해맑게 대답했다."바깥은 음, 너무 춥고 불편할 것 같았어요."아이가 많이 자라기 전 엄마 뱃속 시절을 물으면 별별 귀여운 대답을 다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아이의 상상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엄마와의 최초 기억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대화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자란다면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고, 이제 다섯 살이 된 우리 아이는 꽤나 참신한 이야기를 나에게 소담소담 건네주었다."나는 엄마 뱃속에서 막 뛰었어. 너무 심심해서. 혼자 놀면 정말 심심해. 그리고 엄마 배를 간질이기도 했어. 그러면 엄마가 막 웃었어. 재밌어서 자꾸자꾸 간질였어. 어둡지 않았는데? 환했어. 여기로 불빛이 들어왔는데?"아이는 내 배꼽을 가리켰다. 엄마 배꼽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노란 불빛으로 뱃속 생활을 즐겼다 우기는 다섯 살 아이. 나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 나는 작은 일에도 분노하는 사람이 되었다. 작지만 사사롭지는 않은 일들이다. 실은 분노라기보다는 '걱정'이다. 자라면서 내가 겪었던 불평등과 불의가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이 작은 아이들이 마저 자란 세상도 변한 것이 없을까 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잠깐 고민했었다. 이런 곳에 어린 생명 하나 툭 떨구어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싶어서였다. 그때 나를 위로했던 생각은 한 가지였다. 적어도 이 아이들이 자랄 때쯤엔 세상이 달라져 있을 거야. 민망하게도 아직은 달라질 기미를 간파해내지 못하고 있다.서른다섯 살이었던 내 아버지는 포항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설을 쇠러 강원도 삼척으로 가곤 했다. 양복을 차려입고 넥타이를 매고 롱코트를 입고서 말이다. 좌석은 없었고 아버지는 다섯 시간 반을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버스 통로에 서서 꼬불꼬불한 7번 국도를 따라갔다. 다섯 살 나를 안고서 말이다. 너그러운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받아안아 겨우 한시름 던 아버지는 버스 차창 밖으로 흰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섯 살 둘째 딸이 서른이나 마흔이 될 무렵에는 세상이 말짱하게 변화해, 폭력도 위계도 추행도 없는 고운 날들이 올 거라 마냥 믿고 싶었을까. 보나 마나 나는 낯 모르는 아주머니의 무릎에 앉아 아무 노래나 흥얼거렸겠지. 노래를 부르다 말고 아버지를 쳐다보면, 당신은 눈을 반달처럼 접어보이며 나를 향해 웃었다. 그 장면은 여태 나의 뇌 속에 선연하다. 나는 마흔두 살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므로 내 아이는 또래 친구들보다 적어도 10년은 빨리 부모와 이별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애초 이 인연을 시작했다. 내 아버지가 딸이 앞으로 살 세상을 위해 그 어떤 대단한 일도 벌이지 못한 소시민으로 살았듯 나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껏해야 화나 내고 어느 청원엔가 서명이나 하겠지.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되다니.아이가 내 배를 더듬었다. 제왕절개 수술 자국은 희미하게 한 줄로 남아 있다. "여기로 나를 꺼냈어?"내가 끄덕이자 아이는 얼굴을 찌푸렸다."피가 많이 났어?"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또 끄덕였다.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된다."아팠겠다……"그런 말을 하는 아이를 가만히 안으면, 미뤄둔 일들이 무수히 떠오른다. 바깥세상은 왜 아직도 불편해? 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른들이 아무래도 좀 바빠야 할 것이다./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국사성황사, 5월 끝자락을 걷다

[풍경이 있는 에세이]국사성황사, 5월 끝자락을 걷다

백두대간 골마다 생명감으로 활기지친 일상 미소 짓게하는 온갖 꽃산신 영험 소문에 무속인 발길 잦아대관령 바람·안개·눈 소중한 자원천혜 자연조건 사계절 휴양지 엄지작은 창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잎은 피는데 열중하고 나는 바라보는데 집중한다. 자작나무 가지로 틈을 낸 창유리엔 숱한 잎들이 그림자를 만들고 부푼 하늘을 맘껏 들인다. 바람이 나들이를 하는 동안 동전만 한 잎들이 수다를 떨고 자리를 뜨자 푸른 햇살이 환하게 터를 잡는다. 나의 눈으로 창을 보는 일보다 창의 마음으로 세상을 들이는 고마움을 조금 알았을 때 선한 얼굴과 미소가 지천임을 알겠다.번다함을 뒤로하고 대관령 골짜기로 돌아오자 애써 내려놓지 않아도 호흡은 느리게 유지된다. 놀라워라. 이 짧은 시간에 모든 속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니. 나무의 심장소리를 듣겠다고 이 나무 저 나무 귀를 대자 서늘하면서도 따듯한 기운이 내 몸으로 건너온다. 너무 늦었다 싶을 때 늦은 것은 없다는 진리를 보여준 그분이 지금처럼 가까이 있는 그분이라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달라 애원하지 않고 주겠다 몸부림치지 않는 것, 내 몸에 붙어있던 가파른 속도가 해제되고 이 세세한 곳까지 찾아와주신 그분의 존재.이웃 담장에도 5월을 장식하는 장미가 치정처럼 붉다. 이 고원에서 여린 잎이 펼칠 세상을 염탐하는 일도 그러려니와 거칠고 투박한 토사를 부드럽게 개방하는 풀빛 온기를 생각하는 순간, '경이'라는 말을 조금 깨달았달까. 작은 풀잎 하나도 생산할 수 없으면서도 품격 없는 자만으로 타인을 분별하며 살아온 날들이 심히 수치스럽다. 좋은 것에 숨은 나쁜 것이나 나쁜 것에 깃든 좋은 것들, 보고도 못 본 눈과 듣고도 듣지 못하는 귀로 남을 탓하며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거나 너그러웠던 건 아닐까. 능력 밖의 것들, 본 것에 생각을 덧씌우려다 상처 준 일, 과적으로 점철된 시간, 아침이 오니 어둠이 물러나는 건 당연할 것이나 오늘따라 이 산골마을은 적요를 넘어 맑은 영성으로 가득하다. 대관령의 5월 바람은 달큰하다. 백두대간 골마다 줄기마다 생명감으로 활기가 넘친다. 선자령 들머리에 위치한 국사성황사(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로 향하는 길목엔 노란 미나리아재비가 한창이다. 해마다 이맘때 온갖 꽃들과 마주하는 일은 지친 일상을 미소 짓게 한다. 주중엔 자동차로 가도 되지만 걷고 싶은 사람은 구영동고속도로 상행선 주차장에 차를 두고 15분쯤(1.5km) 걸으면 도착한다. 이 길은 포장도로를 택할 수도 있고 양떼목장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이용해도 좋다. 초행인 사람은 국사성황사를 큰 사찰로 상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기대는 접어두는 게 좋다. 국사성황사는 김유신을 모신 산신당과 국사성황신 범일국사의 사당인 국사성황사(강원도 기념물 제54호)가 있는 우리 전통문화의 현장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성황사는 '城隍祠'라는 현판이 걸린 약 17㎡의 3칸 기와를 올린 목조건물이 있고, 산신당은 한 칸짜리 조그만 목조 기와집으로 건물 중앙에 '山神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세계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는 이곳 국사성황사에서 제를 지내고 그 신(神)을 강릉 단오장으로 모셔가는 행사로부터 단오제를 알린다. 때마침 내가 방문했던 날이 그날이라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인은 물론 도내 관료들, 전국의 무속인들, 많은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곳은 백두대간 그 어느 곳보다 산신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진정한 무당이 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연일 찾아오는 무속인들로 조용할 날이 없다. 국사성황사를 둘러봤으면 선자령도 한 번 걸어보길 권한다.국사성황사가 있는 대관령은 한반도에서 평균기온이 가장 낮고 적설량이 가장 많으며 겨울이 가장 긴 곳이다. 특히 이곳은 사철 바람이 심한 고원답게 바람을 이용하여 공해 없는 청정에너지(전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선자령 일대에 조성된 53기의 풍력발전기는 대관령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람 안개 눈이 많아 예전엔 악조건이었던 요소들이 지금은 소중한 자원이 되고 있는 대관령, 특히 목초지, 고랭지 작물, 각종 원시림, 전국 최고의 황태덕장과 동계 올림픽을 치를 만큼의 천혜의 자연조건들, 고도가 높아 여름에도 더위 걱정 없는 이곳은 사계절 휴양지로도 손색이 없다./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독재타도` 라는 거짓 프레임

[풍경이 있는 에세이]'독재타도' 라는 거짓 프레임

외치는 자체가 '독재시대' 아닌 증거모순 알면서 다른 속임수 있기때문근거없는 정치공세라는 것 알지만소속집단 띄워줘야 한다고 믿는식위기의 순간 국가의 역할 궁금하다요즘 일부 정치인이 '독재타도'를 공공연히 떠벌리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진짜' 독재시대에 교육을 받았고 독재를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온 사람들이기에, 자신이 말하는 독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자유당 시절에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서 수만 명을 죽였고, 유신시절에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 마음대로 임명하고 종신집권을 꿈꿨으며, 군사정권에서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 죽이고 반정부 인사들을 잡아다 간첩으로 조작했다. 그때는 '독재'라는 말 자체가 금기어였다. 그 '진짜' 독재시기에는 감히 입도 뻥끗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독재타도'를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공개석상에서 마이크로 떠들고 있다. 정권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국민을 모욕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독재타도'를 외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시대가 독재가 아니라는 증거인 셈이다. 목소리 높여 외치는 그들 자신이 이런 모순을 모를 리 없다. 이 모순을 뻔히 알면서도 거짓 '독재타도'를 소리 높여 외치는 데에는 다른 속임수가 있기 때문이리라.누구나 독재가 나쁘다는 건 잘 안다. 과거 역사에서 독재는 '민주주의'의 적이며 인권을 유린한 악마였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악마적 이미지를 현재의 정권에 씌우려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후예라는 숙명적 신분을 세탁하고, 역으로 자신에게 덮여있던 가면을 벗어 자신의 적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다면 그건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자기의 도덕적 결점을 희석하고 상대를 부도덕한 자로 몰려는 '프레임'을 설계한 듯하다. 이럴 때 진실이나 사실확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우기고 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선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게임이라고 작정한 것 같다.독재의 반대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민주주의 기본정신은 자유, 평등, 박애 등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책임과 의무이다. 즉 마음대로 할 수는 있지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가능하다. 민주주의가 무제한의 자유를 뜻하지 않는다. 그래서 권리와 의무가 조화를 이루도록 애써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갖고 자기만의 이익을 극대화 하고 싶어 하기에, 그 경계를 늘 염려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는 사회는 일부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독재로 쉬 빠지게 된다. 민주와 독재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그런데 '독재타도 프레임'을 보며 나는 보다 더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지금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서 우리의 의식을 결정하는 기제가 매우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노동 중심의 효율성은 이제 더 효력을 갖지 못한다. 지금은 각 개인이 무한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사회적 모순이나 부조리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고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상관할 바가 아니므로 거기에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타자와 공동체를 해체하고,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게 만든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스스로를 '내 집단'에 가두는 '자기 구속'의 늪에 빠져버린 것이다. 예컨대, 누구나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내가 다니는 교회만은 예외가 되길 바란다. 오랫동안 독재권력에 빌붙어왔다는 지적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내가 속한 검찰이 권력을 나눠주는 것에는 반대한다. 마찬가지로, '독재타도'가 분명히 근거 없는 정치공세라는 것을 뻔히 알지만, 내가 믿어온 보수세력을 위해 밀어줘야 한다고 믿는 식이다. 이 위기와 불안의 순간에 국가의 역할이 궁금하다. 마침 우크라이나 대선 소식이 들린다. 73%라는 압도적 지지로 코미디언 출신의 젊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취임하자마자 썩은 국회를 해산하고 내각을 개편하겠다고 일갈했다. 먼 나라 이야기지만 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달걀 한 판의 위로

[풍경이 있는 에세이]달걀 한 판의 위로

요즘 청년들 이야기 영화 '소공녀'주인공, 소확행 일상서 집만 포기옛 친구 찾아 신세지며 유랑 생활요리로 타인 챙기는 '마음 씀씀이'나도 마법 필요하면 떠올려볼 생각여기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며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주인공이 있다. 영화 '소공녀' 이야기다. 처음에는 요즘 청년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에 대한 비판적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주인공 '미소'는 일당 5만원이 채 되지 않는 가사도우미 일로 살아간다. 저축은커녕 월세와 약값을 대기에도 빠듯한 살림이지만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하루 한 잔의 글렌피딕 위스키, 한 모금의 담배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일상이다. 실제로 일러스트레이터와 청소를 겸업하며 '저, 청소일 하는데요?'라는 책을 펴낸 김예지 작가가 떠오르는 설정이다. 현실의 작가와 영화 속 주인공이 다른 점이라면 미소에게는 가사도우미가 잘 맞는다는 점이다. 그녀가 좋아지는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비싸지는 세상에서 포기한 건 단 한 가지, 바로 그녀의 '집'이다. 영화는 월세방을 포기하고 나온 주인공이 여행 가방에 세간을 넣고 옛 친구들의 집을 찾아 나서 하룻밤, 때론 며칠간 머무는 여정을 따라간다. 유랑의 여정답게 영화 속에는 아파트, 빌라, 고급주택, 오피스텔 등 다양한 집들이 등장하지만 내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이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시작부터 그렇다. 친구의 집을 청소해준 주인공은 일당과 함께 검은 비닐 '봉다리'에 담은 쌀까지 얻어오지만, 길거리에 다 흘려 버리고 만다. 집을 내놓고 가장 먼저 찾아간 회사원 친구는 끝내 미소를 재워주지 않으면서, 그 짧은 만남의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본인이 직접 주사기를 꽂아 넣어 포도당 링거를 맞는다. 미소는 '아직도' 담배를 피는 자신을 향해 "바람 든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와 어떤 음식도 공유하지 않은 채 거대하고 화려한 회사를 빠져나온다. 하지만 남자친구와의 데이트에서 음식은 중요한 매개체다. 가난한 연인은 나란히 누워 헌혈하고 받은 초코파이에 기뻐하고, 철분을 보충하기 위해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러 가자며 좋아한다. 미소에게는 남의 집에 신세 지러 갈 때 '계란 한 판'을 사가는 예의를 잊지 않는, 귀여운 구석이 있다. 이렇게 사간 계란으로 미소는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든다. 좁은 집에서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는 친구를 위해서 쇠고기계란장조림과 무국, 멸치볶음을 만드는가 하면, 이혼한 후배에게 차려주는 밥상에는 예쁜 계란말이가 올라온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주인공이 계란 한 판과 함께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유랑의 이야기인 셈인데, 집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요리가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비록 부잣집으로 시집간 친구에게는 미소를 잔뜩 경계하는 가사 도우미가 따로 있어 그녀의 요리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없었지만… 미소의 이 맛있는 위로는 비단 친구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임신 때문에 울고 있던 청소 의뢰인에게 따뜻한 차를 마시게 하고, "밥은 먹었냐"며 먹고 싶다는 닭백숙을 만들어준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게걸스럽게 보일 정도로 열심히 뜯던 백숙의 닭다리는 먹음직스럽기 그지없다. 관객마저 입에 침이 고이게 하는 그 와중에 "(소금) 찍어 먹어요" 라고 타인을 챙기는 미소의 마음 씀씀이가 참 예뻐 보였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 소공녀(小公女)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재산을 찾아 다시 잘 살게 되지만, 한국 영화 속 소공녀 미소는 처음부터 잘 살지도 않았을뿐더러 마지막까지도 집 없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는 한강변에 친 작은 텐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한강을 내려다보며 우뚝 솟은 아파트들을 함께 비추며 끝난다. 그 작은 텐트에서 미소가 뭘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했을지는 모른다. 다만 음식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함께할 줄 아는 미소가 영화 속에서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음식으로 위로받는 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어려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음식을 준비하는 그 마음, 음식을 기꺼이 함께하는 그 순간의 환대에 기댈 수 있다면 사람들은 '뭐라도 먹고' 또 힘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일상의 마법이 필요한 순간, 계란 한 판으로 누군가에게 기쁨과 위로를 선사하던 미소를 떠올려볼 생각이다./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함관령의 묏버들가지와 홍랑

[풍경이 있는 에세이]함관령의 묏버들가지와 홍랑

북해평사 '고죽'과 운명적인 만남진중 스캔들로 상소 이어져 작별헤어지며 돌아오는 길 고갯마루서비 맞으며 하염없이 울면서 읊은 시재회의 간절함·이별의 아픔 '절절'무릇 시인은 불후의 작품 한 편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이상의 '오감도', 김소월의 '진달래꽃', 윤동주의 '서시', 이육사의 '광야', 김수영의 '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들은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단 한 편의 시로 불후의 반열에 오른 시인이 있다. 조선시대의 기녀였던 홍랑은 '멧버들 가려 꺾어'라는 시조로 후세에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혹 여러 편의 시조를 지었을지도 모르지만 전해지지 않아 그녀의 작품은 단 한 편으로 한국문학사에 빛난다. 그 한 편은 연인이었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고죽유고(孤竹遺稿)'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불후의 명작 뒤에 숨겨진 그녀의 사랑을 짚고 나면 마음이 아리고 애틋해진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의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날을 보냈다. 아명은 애절(愛節)이라고 전한다. 어머니를 여의고 천애 고아로 살아가야 했던 그녀를 친자식처럼 돌봐준 사람은 어머니를 치료해주던 최의원이었다. 열다섯 살쯤 이웃에 살던 함경도 홍원관아의 노기가 찾아와 관아에서 의녀와 여악을 구하니 천거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여러 날의 고민 끝에 관기가 되기로 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창과 가야금과 춤사위를 알던 애절은 홍랑(洪娘)이라는 기명을 얻어 홍원관아에서 미색과 가무와 문장이 빼어난 관기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죽 최경창(1539~1583)은 영암군 구서면 구림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백광훈,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문장가였다. 1568년 과거에 급제했을 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참하관 등 여러 관직을 전전하다가 1573년 북해평사(병마절도사 보좌관)로 함경도 경성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경성으로 가던 중 홍원에 이르자 홍원사또가 축하자리를 마련한다고 그를 취우정으로 안내했다.이 취우정에서 홍란과 고죽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취기가 도도해지자 홍랑이 거문고를 타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고죽의 '채련곡'이었다. 노래를 마친 홍랑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고죽이 물었다. 누구의 시인지 아느냐고. 고죽 최경창 어른의 시라고, 홍랑이 대답했다. 앞에 있는 선비가 고죽인 것을 안 홍랑은 눈물을 왈칵 쏟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고죽은 홍랑에게 군복을 입혀 진중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조정에서 고죽의 진중 스캔들이 문제가 되어 상소가 잇따르자 고죽을 소환하게 된다.두 사람의 뜨거웠던 사랑은 예기치 않은 파탄을 맞게 된 것이다. 홍랑은 한양으로 떠나는 고죽을 따라나서지만 노비와 같은 신분이었던 홍랑은 쌍성, 지금의 영흥까지만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고죽과 헤어져 울면서 돌아오는 길의 고갯마루가 함관령이었다. 날은 저물고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그때 읊은 시가 '묏버들'이다. '묏버들 가지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줄로 여기소서'. 버드나무는 예로부터 이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시에는 재회의 간절함이 은유로 표현되고 있다. 묏버들이 홍랑인지 알아 고죽은 그녀의 시를 영원히 전하기 위해 한시로 옮겨 적고 번방곡(飜方曲)이라 이름하여 자신의 유고집에 남겼다. 고죽이 와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으로 고죽을 찾아가 간병했다. 이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자 홍랑은 다시 홍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때 고죽이 홍랑에게 준 시가 증별(贈別)이다. '서로 바라보다 난초를 드리나니/지금 멀리 가면 언제나 돌아오리/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디 부르지 마소/지금은 구름비에 청산이 어두워라'.이별의 아픔이 절절하다.고죽이 마흔다섯의 나이로 객사하자 홍란은 9년 동안 산중에서 시묘살이를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홍원으로 돌아간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아름다운 얼굴을 상처 내고 숯덩이를 삼켜 벙어리로 살았다고 전해온다. 고죽의 작품들을 잘 간직했던 그녀는 고죽의 유품을 유족들에게 전하고 연인의 무덤 앞에서 생을 마감한다. 두고두고 애달픈 서사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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