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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

[풍경이 있는 에세이]고달사지의 봄

[풍경이 있는 에세이]고달사지의 봄

통일신라 경덕왕시절 창건한 사찰폐사지 입구 늙은 느티나무 신고식석조 지나 상부의 원종대사탑 웅장노란산수유 계곡옆 거니시는 스님내가 꿈꾸던 '한폭의 그림' 펼쳐져내 기억에 저장된 여주 신륵사는 메타세쿼이아가 붉게 물드는 늦가을 타종소리가 강을 건너는 오후 6시쯤 강 맞은편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오늘 나의 목적지는 멀찍이서 신륵사를 볼 수 있는 강천이다.겨우내 움츠렸던 마음에 기지개를 펴보겠다고 봄 강물 따라 강천으로 향했다. 강가에는 버들가지가 다투어 피고 저 멀리 연노랑 물감 번지듯 퍼지는 산수유 꽃이 행자를 유혹하기 바쁘다. 눈앞에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강원도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김포 월곶 보구곶리에서 서해에 합류하는 강으로 강원 오지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 모인 것이니 해빙기가 되면서 강의 유속이 빨라지는 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강에만 오면 부질없는 장난을 한다. 납작한 돌멩이를 찾아 물수제비를 떠보는 것이다. 더러는 성공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얼마 못 가 강 속으로 몸을 숨기는 돌, 강은 바닥에 내려앉은 돌을 자기 몸처럼 안아주기 위해 얼마의 품을 허락했을까.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강천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시간은 오후로 건너뛴다.이번엔 강천에서 멀지 않는 고달사지로 향한다. 지난 가을에 다녀왔지만 새봄의 고달사지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직 잔디가 온전히 초록을 띠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 꽃 덕분인지 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고달사지, 언제 가도 한적해서 걷기 좋은 길로 이만한 곳도 없을 듯하다.여주시 북내면 혜목산 동쪽에 자리 잡은 고달사는 일명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며 통일신라시대 764년(경덕왕 23)에 창건한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근처 다른 폐사지와 비교하면 터가 넓어 예전 사찰의 규모를 가늠해보는 건 물론,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트이게 한다. 차에서 내리면 폐사지 입구 400살 나이를 가진 늙은 느티나무에게 신고식을 마치고 낮은 스펜스 안으로 들어서면 지정된 관람로를 따라 걷는 건 지극히 정석이다. 사찰이 번성했을 당시 수조로 쓰였을 석조 구조물은 단아한 지붕을 이고 있어 그것이 중요 유적임을 말해주고 있다.석조의 용도는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곡물을 씻기도 하지만 평소엔 물을 담아두거나 사찰 중심 공간에 두고 부처님 전에 나갈 때 몸을 깨끗이 씻고 가라는 의미도 있다. 지붕이 있는 두 개의 석조를 지나 가운데 상부에 자리 잡은 원종대사탑은 스케일이 웅장하고 위쪽 부서진 모서리 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형태는 양호하다. 탑신부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고 아래 석탑에 새긴 조각은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거북이와 용이 꿈틀거리며 노니는 형상이다. 넓은 폐사지에는 부도, 석불대좌, 석불좌, 승탑, 쌍사자 석등 총 7종의 보물이 있으며 중앙 위쪽에 자리 잡은 원종대사탑을 지나면 폐사지 고달사와 무관한 고달사란 절이 기다린다.그 고달사를 왼편에 끼고 산 쪽으로 올라가면 평평한 터에 최근에 세운 듯한 2기의 석불을 만날 수 있다. 이 석불에서 오른쪽 숲길로 꺾어들면 오래 전 불심이 가득한 석공들의 섬세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단아한 석등이 반긴다. 거기까지 갔다면 등이 있는 자리에서 아래 너른 폐사지를 내려다보는 여유는 누구라도 놓치지 않았으면 싶다. 홀로 석등 주변을 서성대다 폐사지로 내려오니 노란 산수유가 망울을 트기 시작한 맞은편 계곡 옆으로 스님 한 분이 봄햇살을 받으며 한가로이 거니신다. 내가 꿈꾸던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 폐사지에 핀 노란 산수유꽃이 지난해 결실인 붉은 열매를 그대로 안고 있는 걸 보고 '고달사지의 봄'이란 시를 썼던가 아니었던가.꽃의 사리, 열매의 사리,저 고운 것이 하늘에서 떨어졌겠느냐.아니면 누가 몰래 매달기라도 했겠느냐.꽃이 부르니 열매가 왔겠지.열매가 부르니 꽃도 좋아서 같이 살자 했겠지.-시(詩) '고달사지의 봄' 중에서/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사회적 거리`의 두얼굴

[풍경이 있는 에세이]'사회적 거리'의 두얼굴

사람 얼굴 맞대고 만나는걸 삼가라처음엔 당혹스러웠으나 이젠 익숙 좋게 말하면 격리 조금 심하면 유폐차별과 동시에 배려의 의미도 담겨 예방위해 거리는 멀리 실천은 함께요즘 코로나19가 전염되는 걸 막기 위해 소위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하고 있다. 사람 사이에 얼굴을 맞대고 가까이 만나는 걸 삼가라는 뜻이다. 처음 당혹스러웠던 이 말도 꽤 익숙해졌고 이젠 다른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요구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전염병이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적잖이 바꾸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든 아니되었든 거의 한 달 이상 우리는 스스로 정해놓은 거리를 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좋게 말하면 '격리',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자발적 '유폐' 생활을 하는 셈이다.이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라는 용어는 1900년대 초,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미국 사회를 연구하면서 등장했다고 한다. 그는 개인보다는 집단 사이의 거리, 즉 인종이나 계급 사이의 물리적 거리에 연구 초점을 두었다. 미국에선 흑백 사이의 오래된 인종차별은 물론, 20세기 초에 빈부격차라는 새로운 차별이 생겨났고,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이민자 사이에서도 갈등이 빚어졌다. 즉 짐멜의 연구에서 말하는 '사회적 거리'는 '차별'을 의미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 학교가 들어오는 걸 주민이 막거나, 임대아파트 거주자의 통행을 막기 위해 담장을 치는 등의 문제가 불거진 바 있다. 빈부격차가 계급 간 '사회적 거리'를 만든 예이다.거리가 멀수록 차별이 심하다 할 것인데, 나는 짐멜의 연구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때,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좋은 예를 목격한 일이 있다.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바다처럼 큰 호수가 있었는데, 더운 여름날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수영을 갔다. 그런데 호숫가 백사장에 누가 금을 그은 것도 아닌데 백인과 흑인이 100m쯤 거리를 두고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지금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살던 1960년대도 아닌데, 나는 너무나 놀라 무엇을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백인도 흑인도 아닌 나는 어느 쪽으로 가서 수영해야 하나 참으로 난감했었다.짐멜의 개념은 이후 많은 학자에 의해 더욱 심화한 연구로 발전했다. 그중에서 1950년대 에모리 보가르두는 '사회적 거리'의 물리적 측면보다 심리적 측면에, 또 집단보다 개인에 주목하여 '거리'를 결정하는 요인들을 측정했다. 예를 들면 같은 집단 내의 사람이라 해도, 늘 가까이 있고 싶은 사람과, 가급적 멀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엄마와 아기 사이의 거리는 0m(100)일 것이고, 가족은 10m(101), 이웃사촌끼리는 100m(102)…. 그리고 보기 싫은 원수지간이라면 1천km도 부족할지 모른다.보가르두의 연구는 모든 개인에겐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낯선 사람 사이에는 접근이 불허되는 거리가 있고, 만약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할 때는 양해와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기본이다. 오래 전에 이민갔다 고국을 방문한 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40년 가까이 미국에 살았으니 그쪽 문화에 더 익숙할 터,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인의 관습이, 어릴 적 익숙했던 그것이, 아주 새롭게 달리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는 서울 시내를 걷다가 타인과 너무 자주 몸을 부딪는다는 것, 게다가 아무도 '실례' 혹은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 갈 길로 가더란다. 한국인의 친밀성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엔 사뭇 아쉬움이 남더라는 것이다.'사회적 거리'는 차별과 동시에 배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강조하는 것은 우선 전염병을 막기 위한 조치이지만, 나는 그 안에 차별 철폐와 배려 실천까지 포함하면 좋겠다. 일전에 '국제엠네스티'로부터 받은 한 메일에 'Socially distant, but together'라는 글귀가 적힌 포스터가 동봉되어 있었다. 코로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사람 사이의 거리는 띄어야 하지만, 그 실천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전염병을 막을 수 없다. 지금이 타자에 대한 배려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이러스와 모카빵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이러스와 모카빵

구로콜센터 확진 88명은 모두 여성비정규직삶 장거리거주 동선 치열대구아파트 감염 46명도 근로여성세간은 신천지 교인 사실에만 주목 집단감염조차 불평등한 현실 씁쓸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나 싶어 마음을 놓으려 할 때쯤, 구로 콜센터 집단 감염이 터졌다. 88명의 확진자 모두 여성이었다. 새벽에 여의도에서 녹즙을 배달하고 콜센터로 출근해 근무했다는 어느 확진자의 동선은 너무 치열해서 슬프기까지 했다. 교대 근무를 하며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콜센터의 특성상 아파도 쉬기 어려웠을 근무자들의 거주지는 서울은 물론, 의정부와 인천까지 뻗어 있었다. "인천 확진자의 64%는 인천이 아닌 서울 직장에서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기사로 확인하고 나자 두 배로 씁쓸해졌다. 장거리 출퇴근의 피로감을 잘 알기에, 확진자들의 동선이 공개될 때마다 그 시간대와 장소에 언젠가의 나 자신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면 너무 나간 걸까? 확진 판정을 받은 88명의 여성들이 직장이 폐쇄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집단 감염 이후 발음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콜센터의 근무 환경은 나아지기는 했을까 궁금할 따름이다.대구 한마음아파트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여성 46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은 이들이 모두 신천지 교인이었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했다. 1985년 지어진 여성근로자 임대아파트는 2명이 36.36㎡(약 11평)의 공간을 나눠서 쓰는 구조다. 대구에서 3개월 이상 일한 35세 미만 미혼 여성이라면 입주가 가능했다고 한다. 이런 아파트는 대구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다. 대부분 공단 바로 옆에 지어져 있고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가 '잠만 자고' 출퇴근하며 열심히 일할 수 있기 위해 지어진 산업 성장시대의 유물 같은 곳이다. '한마음' 신천지의 실체를 파헤친다며 비장한 내래이션과 음악이 계속되는 시사 고발프로그램에서 내 기억에 남은 장면은 그러니까, 의외로 모카빵 레시피가 적혀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화이트보드였다. 버려진 지 오래된 듯 색바랜 화이트보드에는 '모카빵' 글자가 크게 쓰여져 있고 그 아래에는 재료로 보이는 강력분, 물, 이스트, 소금, 설탕, 마가린, 분유, 계란, 커피, 건포도 등의 용량이 함께 적혀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집을 나와 모여살고 있던 신천지 신도들이 "새로운 교인을 포섭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문화 교실을 열면서 제빵 클래스, 비누 만들기, 자신에게 맞는 소원 팔찌 찾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신천지에 '청춘 반환 소송'을 냈다는 한 여성은 1심에서 승소했지만 "지나간 시간은 돈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을 뿐더러 가족 누구와도 연락을 하고 있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은 그 낡고 좁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모여 살면서 무엇을 했을까? 신천지 교인들은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친구 만날 시간도 없이 신천지의 각종 활동에 전념했으며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해주는 각종 마을만들기나 공동체 프로그램, 문화예술 지원 프로그램도 적극 활용했다고 한다. 신천지와 상관없이 살던 청년 누군가는 자신을 환대해주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함께 하자고 끈질기게 권하는 또래 친구들과의 교류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TV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한 무리의 여성들이 제빵 클래스에 모여앉아 빵을 만들며 이야기 나누는 풍경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마음아파트가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그 좁은 아파트 한 켠에 모여앉아 모카빵을 만들고 있었을, 포교 활동 전략인지도 모르고 친구들을 만났다고 좋아했을 얼굴 모를 20대의 여성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어서 마음을 자꾸 달래야 했다.콜센터와 요양원처럼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많이 일하는 곳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바이러스의 감염조차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 바이러스가 바꿔놓은 풍경과 앞으로 달라질 일상이 낯설면서도 두려운 요즘,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다시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진다고 해도 동네 옆집에 놀러가 모카빵을 만들며 함께 하는 시간을 의심해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가난이 부끄럽지 않았던 임벽당

[풍경이 있는 에세이]가난이 부끄럽지 않았던 임벽당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불려궁핍한 삶 시에 가식없이 드러내'이별한 님에게 바치다' 널리 회자나그네 꿈 거울속 시든얼굴과 겹쳐'헤어진 님'은 자신의 초췌한 모습가문으로 보면 임벽당은 가난하게 살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시아버지인 유기창은 중종반정 때 거제 유배에서 풀려 병조참의 혹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 받았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결의로 사양하고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로 낙향했다. 남편 유여주는 신진사류로 조광조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자 고향 남당리에 우거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가난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임벽당 부부는 집 근처에 연못을 만들고 연못 가운데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선취정과 임벽당을 조성하고 주변에 배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어 봄이면 배꽃과 복사꽃 흐드러진 풍광을 즐겼다. 부부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유여주가 학인이나 현인 또는 의인으로 불렸던 것은 그들의 이와 같은 청빈한 삶과 권력을 멀리한 때문이었을 것이다.남당리에는 부부가 중국을 다녀와서 심었다는 500년 된 은행나무가 우울한 봄 하늘을 이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김임벽당(金林碧堂·1492~1549)은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린다. 그녀는 사후에 더 유명해진 시인이다. 1683년, 김두명이 중국 사행을 다녀오면서 청나라의 전겸익이 1652년에 편집한 명대의 2000여 명의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엮은 '열조시집'을 구해 왔다. 이 시집에 그녀의 시 '증별(贈別)' '빈녀음(貧女吟)' '고객사(賈客詞)'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를 본 조선시단에서는 명나라에까지 유명해진 임벽당의 시세계에 경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그녀는 자수에도 조예가 깊어 베갯모에 '임벽당'이라는 제목의 시를 새겨 넣었다. '그윽히 깊은 작은 고을에/자연을 사랑하니 마음의 근심 잊을만 하네/인간의 옳고 그름 얽매이지 않고/꽃 피면 봄인줄 알고 잎 지면 가을인가 하노라'라는 시 속에는 세월을 깁고 있는 그녀의 애잔하고 초탈한 모습이 보인다. '가난한 여인의 노래'에는 그녀의 궁핍한 삶이 가식 없이 드러나 읽는 이의 마음이 저려온다. '궁벽한 곳에 살다보니/산골이 깊어서 속세의 일 접하기 힘드네/집안이 가난하여 말술조차 담가놓기 어려우니/잠재워 보내야할 손님도 그 밤길로 돌려 보내네'. 가난하게 살다보니 궁벽한 곳으로 찾아온 귀한 손님에게 술을 낼 수도 없고, 잠을 재워 보낼 수도 없어 그 밤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처지가 안타까워 부른 노래다. '조카 강에게 주는 노래'에는 흩어졌던 피붙이가 찾아와주어 재회의 기쁨과 함께 정성껏 차린 가난한 밥상이 부끄럽지 않다고 노래한다. '피붙이가 뜬 구름처럼 흩어졌는데/오늘 이같이 만나볼 날이 있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멀리서 찾아와 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명아주잎과 콩나물국만으로 밥을 먹여도 부끄럽지 않구료'가 주는 감동은 혈육 간의 깊은 정이다. 서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형편을 알고 있으니 명아주잎과 콩나물국만을 먹여도 부끄러운 게 아니더라는 그녀의 심사 뒤에는 넉넉히 살았다면 진수성찬으로 조카 강에게 먹이고 싶은 간절한 소망도 보인다.'이별한 님에게 바치다'라는 시는 그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고 있는 시다. '안타깝게 헤어진 지 3년이 넘었는데/가죽 옷 한 벌로 추위를 막네/가을바람은 짧은 귀밑머리에 불어오고/차가운 거울은 시든 얼굴을 비추네/나그네 꿈은 먼지바람 속을 떠돌고/이별의 아픔은 관문처럼 막아서네/이리저리 거닐며 지난날 생각하니/흐르는 눈물 방안 가득하네'로 끝을 맺는 이 시는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기 어렵다. 그녀의 다른 시와는 구별되는 것이 시적 자아와 시적 대상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죽 옷 한 벌로 겨울을 나야 하는 사람은 그녀이기도 하고 헤어진 님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의 궁핍한 삶이기도 하고 님의 곤궁한 삶이기도 한 것이다. 먼지바람 속을 떠도는 나그네의 꿈은 거울에 비친 시든 얼굴과 겹쳐진다. 헤어진 님은 그녀 자신의 초췌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이러스가 던진 사소한 질문들

[풍경이 있는 에세이]바이러스가 던진 사소한 질문들

빠르게 적응하며 안정된 집 생활'아프면 연락하라'는 어색한 전화오랜만의 외출서 만난 유팀장에"마스크 왜 안썼냐"고 묻자 울상'사기 힘들다'는 말에 "선물입니다"한동안 집 안에서만 지냈다. 늦겨울 추위가 갑작스레 찾아든 2월 중순의 며칠을 바깥에서 종종거리다 감기에 걸린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격리에 든 것이다. 목이 아프고 열이 나는 데다 잔기침이 쏟아지는 걸로 봐서 단순 감기가 아닐 수도 있겠어, 괜히 나돌아다니다 엄한 사람들한테 폐 끼치지 말자, 마음먹었다. 혹시,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서점에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 다이어리에 기재된 몇몇 약속을 취소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모조리 생략했다. 당분간 집에만 있기로. 워낙에 집순이를 지향해왔으나 더 열심히 집순이가 되기로. 프리랜서라 가능한 일이다. 자고 일어나도 내리지 않는 열 때문에 보건소에 가 검진을 받아봐야 하나 망설이기를 몇 차례. 약국에서 사다 둔 감기약을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자 컨디션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런데 주변 분위기는 점차 심각해져만 갔고. 바이러스의 기세가 하루가 다르게 거세지더니 확진자가 단숨에 수백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업무와 관계된 회의나 미팅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함께 일하는 강사들 사이에선 어쩌면 개강이 더 미뤄질 수도 있겠다는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 자의 반 타의 반의 이 격리 생활도 자연히 길어지겠구나 싶었다.생필품을 공수하기 위해 이따금 들른 동네 마트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빠르게 적응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들쭉날쭉하던 혼자만의 일과에도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면서, 집 생활은 제법 안정되었다. 솔직히 말해, 더없이 좋았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과 얽히지 않아도, 귀찮은 일에 골머리 앓지 않아도 된다! 나는 좀처럼 맛볼 수 없었던 해방감까지 느꼈다. 생활은 간소했고, 군더더기가 없는 만큼 여러모로 무해했다. 이 속에서 마침내 안전하고 또 온전하다는 느낌. 책상 앞에 앉아 밀린 일을 처리하면서, 간간이 일과 관계된 전화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불과 며칠 만에 그 일이라는 것들이 너무도 낯설어졌음을 나는 알았다. 평범한 사회적 대화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 문득 고민이 일었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 이런 식으로 적응해버려도 좋을까? 몇 달 몇 년을, 어쩌면 평생을 지금처럼 계속 혼자만의 집에, 세계에 살아야 한다면 그래도 나는 좋아, 괜찮아, 답할 수 있을까? 어떤 대답을 다그치듯 불쑥 걸려온 전화. "별일 없죠? 감기는 좀 어때요?" 하는 말. "아프면 꼭 연락해요"하는 당부. 고마운 사람 같으니…. 어색하지만 참 따뜻하구나. 이런 나날들 속에 나를 염려하는 그는 과연 누구일까? 곰곰 되짚어보았다. 여태껏 그와 나는 어떤 일들을 통과해왔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왔는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얼마나 먼지, 혹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지. 내일이라도 아프면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까? 나 좀 도와줄래요, 말하게 될까? 그리고 잇따라 떠오르는 얼굴, 얼굴들. 불쑥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싶은 충동. 무탈하신가요? 행여 혼자 앓고 계신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그는 또 누구일까? 나는 왜 하필 그를 떠올렸을까? 오래전 이미 연락이 끊어진 그를.몇 달 같은 며칠이 지났다. 실로 오랜만의 외출. 피할 수 없는 일 약속 때문이었다. 마스크를 눈 밑까지 바짝 당겨쓰고서, 어딘가 조금 달라진 듯한 대로변의 풍경을 두리번거리면서. "어, 왜 마스크 안 끼셨어요?" 묻자, 일로 만난 사이의 유 팀장님은 울상을 지었다. "마스크 사기 너무 힘들어요. 여기저기 검색을 해도 죄다 품절이라고 하니…." 직장에 매인 그는 마트나 약국을 뒤지고 다닐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에그…. 자, 선물입니다!" 가방에 여분으로 챙겨둔 마스크를 주섬주섬 꺼내 내밀면서 속으로 잠시, 그러나 실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떠올리고 재고 망설인 나는 과연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박소란 시인박소란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50세 서 부장

[풍경이 있는 에세이]50세 서 부장

47세때 처음 내집을 갖게된 독신녀집들이친구들 반응 대단해 축하해근데 너 곧 퇴직? 대출금은 어쩌니조카 챙기는것도 노후걱정 타박해삶이 멋진데… '오지랖시선'은 그만서 부장은 한국 나이로 50세가 되었다. 집을 산 건 3년 전이다. 수도권의 30평대 아파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또래보다 집 장만이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담하게 벌인 집들이 날, 친구들의 반응은 달랐다. "뭐야, 완전 멋져. 네가 집을 사다니. 너무 놀랐잖아!""정말 대단해. 내 친구지만 진짜 기특하다. 축하해."서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이 직장엘 다녔다. 그리고 마흔일곱 살이 되어 서울도 아닌, 작은 위성도시에 아파트를 샀는데 왜들 이렇게까지 놀라는 것일까. 서 부장은 고추잡채와 유부전골을 식탁에 날랐다. 맞춤제작을 한 아카시아나무 식탁은 아무리 봐도 색이 고왔다. 마음에 들었다. "결혼 안 하고 혼자 산다 할 때 걱정 많이 했는데, 이렇게 잘 사는 거 보니 내가 다 기분이 좋네. 집도 너무 예쁘고.""그런데 너도 곧 회사 나올 때 되지 않아? 대출금은 어떡해?"아하, 그제야 서 부장은 친구들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47세의 독거여성의 노후를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서 부장의 친구들은 예의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심 없이 집들이에 참석한 따뜻하고 다정한 친구들이었다. "대출은 없어. 회사는 언젠간 그만두게 되겠지. 이후에 뭘 할는지는 고민 중이고."대출이 없다는 말에 더 눈이 동그래진 친구들 앞에서 서 부장이 말했다. "아이고, 별걸 갖고 다 놀라네. 한 사람 월급 갖고 세 식구 살고 두 사람 월급으로 네 식구가 사는 거랑 한 사람 월급 갖고 한 사람이 사는 거, 어느 편이 낫겠어? 이 간단한 계산법이 어려워?"서 부장에게는 조카가 둘 있다. 조카들이 어릴 땐 자주 만나 소고기도 먹이고 그랬지만 이제는 제법 컸다고 이모 집에 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고기를 먹이는 대신 옷을 사보내고 가방을 사주고 운동화를 사준다. 학원비를 내줄 때도 있고 연수를 떠날 때 비용을 내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이 타박을 했다. "그런다고 걔들이 나중에 이모한테 효도할 것 같아? 네 앞길이나 챙겨. 100세 시대야. 노후 준비 제대로 못 하면 끝장이야. 돈 아껴."한 달에 조카들 사교육비로 100만원, 200만원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이모가 생색 좀 내는 일에 무얼 그리 걱정을 하나, 생각했는데 나이 든 독거여성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시선은 참말 고칠 요량이 없다. 그래도 친구들이니 '안쓰러운' 정도이지 낯 모르는 사람에 이르자면 숫제 패배자 취급이다. 아이고, 불쌍해라. 나이 들어 새끼 하나 없이 외로워 어쩌나. 그들은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다. 서른 살엔 예쁘고 좋았지? 마흔 살만 해도 자유롭고 좋았지? 그런데 쉰 살 되니 너도 두렵지? 고독사할까 봐 겁나지? 그런 시선에 살이 따가울 때가 많다. 한 마디 한 마디 대꾸하기 싫어 그냥 하하 웃고 말지만. 서 부장은 우리 옆집에 산다. 가끔 나와 맥주를 마시고 고추잡채를 만들어준다. 서 부장 언니의 고추잡채 솜씨는 정말 끝내준다! 언니네 회사에서 만든 화장품을 늘 공짜로 갖다 주고, 사실 나는 과일을 살 필요가 없다. 언니가 박스째 사서 나에게 언제나 넉넉히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30대 독신들이 40대 독신으로 자라고 또 50대 독신으로 무럭무럭 자라 대한민국 세금의 한 축을 만든다는 걸 깨치고, 늦게라도 좋은 짝 만나 노후 편하게 보내라는 오지랖 따위 부리지 않는 그런 세상이 얼른 왔으면 싶다. 서 부장은 멋지다. 이대로 쉰 살이 되어서 더욱 멋지다./김서령 소설가김서령 소설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원주 부론의 거돈사지

[풍경이 있는 에세이]원주 부론의 거돈사지

숱한 역사 품고 잔잔해진 폐사지기단 돌·나무·새들마저도 고요앞쪽 중앙엔 삼층석탑만 덩그러니정산저수지 둑에 앉아 내려다보며늙은나무 향해 나만의 의식을 한다어느 시인은 부론에서 길을 잃었다는데 나는 부론을 눈앞에 두고 어디쯤에서 길을 버린 걸까. 예기치 못한 만추 풍경에 끌려 두 번이나 다른 길로 드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럴 때 이것이 일이 아니고 여행이라 생각하면 초조나 불안이 안도로 바뀌는 건 신기하다.나는 차장을 열어 싸한 바람을 들이킨 후 마음을 다독여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는 남한강을 끼고 여주를 지나 내비가 알려주는 대로 얌전히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갔다. 오른쪽에는 붉은 함석지붕을 가진 작은 폐교건물이 눈에 들어오고 왼쪽으론 석축 기단 모서리에 서있는 한 그루 노거수, 내가 찾고자 했던 바로 그곳인가 싶었는데 역시 이런 예감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다. 때는 만추였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저녁 답이었다.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 부론 어디쯤에서 돌아갈까 하다 예까지 왔으니 거돈사지는 보고 가야지 하면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어느 해 거돈사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은 금세 날이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려 변변한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한 채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가. 거돈사지는 내게 그냥 뭔가 보여주려다 보여주지 못한 그 무엇으로 남았던 폐사지였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고 나는 지난 늦가을 다시 그곳을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시간에 쫓기지 않으려고 조금 일찍 서둘러가서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다. 빈 절터에 서서 지난 시간의 흔적을 지켜본다는 것이 딱히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나답지 못하게 왜 이제야 하는 것인지.그래, 다 왔다. 거돈사지다. 나는 천년의 나이를 가진 느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햇살이 노거수 아래로 부서져 내렸다. 굳이 외면하고 싶은 것들은 늘 왜 그리도 눈에 잘 들어오는지. 운전석에서 차 문을 열고 왼 발을 땅에 놓고 일어서려는 순간 자연스럽게 살짝 아래로 닿은 시선, 석축 사이에 기다란 무엇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긴다.나의 나쁜 시력은 그것이 무엇이든 상상을 고무시키는데 일조를 해온 건 사실이다. 저게 뭘까? 어찌 보니 긴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것도 같고 그게 아니면 뭔가 산 녀석이 꿈틀거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노라니 나의 생각은 이미 추월선을 넘었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심호흡을 하고 몸을 낮춰 가만히 들여다보니 맞다. 뱀의 허물이다. 어쩌면 돌과 돌 사이에 한 생의 풍파를 감당한 제 몸의 껍질을 철저히 인간의 눈높이를 무시하고 저토록 가지런히 벗어둔 채 뱀은 천년의 비밀을 간직한 느티나무 아래나 모퉁이가 닳은 삼층석탑 어디쯤에서 이른 동면에 든 건 아닐까.무심한 듯 생각이 많아지는 곳으로 폐사지만 한 곳이 있을까. 한때는 건물과 승려와 부처님의 말씀이 그리워 찾아온 불자들로 붐볐을 이곳, 비어있다는 것, 오래되었다는 것, 황량하다는 것, 숱한 역사를 안고 사라졌으나 영 지워지지 않는 그 무엇들, 세월이 흘러 모두가 평면으로 잔잔해진 이곳 폐사지, 기단을 둘러싼 돌도 나무도 심지어 새들도 고요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절대 고요, 그것을 대변하는 조형물, 바로 폐사지에 남아있는 고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석탑이 아닐까 싶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앞쪽 중앙에 위치한 삼층석탑을 향해 걸어가는데 발밑으로 무언가 스멀거리는 듯한 이 간지러움의 정체는 뭘까.기록을 보면 원주는 남한강을 따라 100여개의 절터가 흩어져 있었으나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남아있는 폐사지로는 거돈사지, 흥법사지, 법천사지다. 모두가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거돈사지는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로 추측되는 금당터와 불좌대, 그 앞에 삼층석탑이 전부지만 세 개의 절터 중 가장 넓고 주변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한나절 탑 주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근처 현계산자락에서 발원한 정산저수지 주변을 둘러보고 저수지 둑에 앉아 거돈사지를 내려다본다. 무심한 세월을 대변하듯 천년을 고독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늙은 나무를 향해 나만의 의식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운다. 매번 이런다. 서둘러야겠다. 쫓기듯 서두르지 않고 돌아가는 길은 없는 걸까./김인자 시인·여행가김인자 시인·여행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혐오라는 바이러스

[풍경이 있는 에세이]혐오라는 바이러스

누군가를 증오하면 증오로 '부메랑'중국에서 '코로나19' 시작됐지만중국인 자체가 바이러스는 아냐역지사지만이 피해 막는 지름길이해와 관용으로 극복해 나가야엊그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 네 개 부문을 휩쓸었다. 비영어권 영화가 하나 받기도 어려웠던 전례를 깬,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영화 자체에 대한 찬사는 물론 봉 감독의 수상 소감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유머러스하게 소감을 말했다. 그런데 남이 잘 되는 걸 못 보는 놀부 심보는 어디에나 있는지, 그의 어투에 딴죽을 거는 어느 미국인의 SNS 포스팅이 알려져 우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 미국인은 '영어와 한국어를 섞는 말투가 미국을 파괴하고 있다'고 썼다. 대부분 언론이 봉 감독의 재치에 열광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적대적 태도이다.혐오는 또 다른 혐오를 낳는다.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의식은 뿌리 깊이 박혀있다 어떤 계기가 되면 슬그머니 머리를 들곤 한다. 꽤 오래전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창작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지역 주민이 여는 환영 파티에 나를 포함해 각국에서 온 작가 이십여명이 참석했다. 우리를 초대한 주민 중에는 중국계 미국인도 있어, 나는 같은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반가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나이 지긋한 그 부인은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본 듯 얼굴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백인으로부터 평생 받았을 인종차별을,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한국인에게 분풀이로 퍼붓는 순간이었다.이런 혐오는 해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퍼져가고 있다. 현재로선 언제 이 역병이 수그러들지 예측하기 어려운 듯하다. 각국의 대응이 조금씩 달라, 어떤 나라는 중국인 입국을 전면 통제하는가 하면 어떤 나라는 선별적으로 허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중국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막지는 않고, 대신 바이러스가 유입되지 않도록 나름 최선의 방역대책을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SNS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한 젊은이가 중국인을 멸시하는 글귀와 대통령을 '재앙'이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일인시위를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하지만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한 미국인의 억지 주장에 봉 감독이 말투를 바꿀 리도 없고, 한국인이 갑자기 모두 영어를 잘 하려고 노력할 리도 없다. 오히려 그 '영어 중심주의'에 우리가 분개할 뿐이다. 또 그 중국계 미국인의 한국인 멸시가 중국이 한국보다 우월하다는 표시이거나 자신이 백인 그룹으로 편입되는 계기가 될 리가 없다. 우리가 소위 '중화주의'에 더 반감을 느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입장을 바꿔 지금 우리가 중국인을 '더러운 바이러스'라고 부른다고 해서 중국인이 한국을 깨끗한 나라로 동경할 리가 없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혐오는 혐오로 되돌아올 뿐이다.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영어만 쓰라고 주장한 사람이 한국에 온다면 그는 한국어를 사용할까? 우리도 그에게 "너도 한국에 왔으니 한국어만 쓰라"고 요구한다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그 노부인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서 인종차별을 당해온 사람들, 예컨대 히스패닉계나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보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을 멸시한다면 그 역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되는 것 아닐까? 언제든 처지는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혐오하는 건 자신을 '혐오의 바이러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다. 중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되었지만, 중국인 자체가 바이러스는 아니다. 더구나 SNS상의 그 시위꾼이 목적하는 바, 현 정부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비판이 아닌)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 현실적으로 중국을 봉쇄했을 때 더 큰 손해를 누가 볼 것인지는 대충 계산을 해도 답이 뻔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만이 혐오라는 바이러스를 막는 지름길이다. 쉽게 전염되는 혐오 바이러스, 이를 극복하는 길은 내가 그 혐오의 대상이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와 관용은 저절로 생겨난다./정한용 시인정한용 시인

[풍경이 있는 에세이]나의 미니멀리즘 도전기

[풍경이 있는 에세이]나의 미니멀리즘 도전기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美에 유행 신드롬 신조어 '곤도잉' 집정리 하면서 어렴풋이나마 이해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안쓸 물건중고 앱 활용 '비우는 삶' 깨달아 미니멀리즘(minimalism) 열풍을 기억한다. 사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때만 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곤도잉(Kondo-ing)'이라는 신조어를 미국에 유행시키며 미니멀리즘 신드롬의 중심에 섰던 곤도 마리에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영 시큰둥했다. 곤도 마리에는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집과 대화를 나누는 명상의 시간을 갖고, 의뢰인에게 버릴 물건을 끌어안고 작별 인사를 하라고 시킨다. 오리엔탈리즘처럼 보이기도 하고 선뜻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행동이었는데, 이번에 집 정리를 하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정리를 하다 보니 버리긴 아깝고, 그냥 두자니 안 쓸 것이 뻔한 물건들이 꽤 나온다. 요즘 유명하다는 동네 중고거래 앱을 깔고 방치되어 있는 자전거부터 올려보기로 했다. 하도 안 타다 보니 바퀴 바람이 빠진 지 오래지만 상태는 괜찮다. 사진 몇 개 찍어서 싼 가격으로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신기할 정도로 실시간으로 관심과 채팅이 쏟아진다. 그 밤에 당장 집 앞으로 오겠다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덜컥 겁이 나 제대로 가격을 올린 게 맞는지 고민스러워 게시물을 지웠다. 그러다 어차피 내가 안 쓰는 물건인데 이 돈을 받는 것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좀더 올려도 되지 않을까 욕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처음 올렸던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가장 먼저 구매 의사를 밝힌 분과 만나기로 했다. 바람 빠진 자전거를 힘겹게 끌고 나가면서 '거래가 안 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차를 몰고 달려오신 그분, 몇 번 만져보더니 7만원을 현금으로 주고 떠나갔다. 중고 거래인 만큼 "무르거나 환불 요청하지 않겠다"는 쿨한 약속과 함께. 연이어 판매가 성사되자 다른 사람들의 물건이 궁금해진다. 선물세트들이 유독 많이 올라와 있어 살펴보니 중고거래 앱에서 사기 가장 좋은 아이템이 명절 직후 올라오는 각종 식품 선물세트란다. 내가 원하는 품목으로 구성된 상품을 고르고 유통기한까지 꼼꼼히 확인한 후 거래 약속을 잡았다. 동네 지하철역 입구에서 접선, 물건과 현금을 교환하고 집에 돌아와 시세가 대비 50% 저렴한 가격에 '득템'한 캔들을 쌓아놓고 나니 뿌듯하면서도 비워낸 것보다 더 채워넣은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물론 모든 물건이 이렇게 인기리에 팔리는 건 아니다. 올려둔 지 한참이 지났지만 거래는커녕 문의 한 건 없는 물건들도 많다. 그래도 무조건 버리는 게 아니다 보니 정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로 표현되는 중고거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사는 동네 공개를 통해 부분이나마 극복했다고 해야 할까. 일단 가까운 동네 사람들끼리 내놓은 물건이고 가격도 싼 물건이 대부분이라 부담이 덜하다. 뭐 이런 것까지 내놓았나 싶은 물건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모양인지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하다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폐가전 무료수거 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소형 가전 5개 이상이면 무료로 와서 가져간다. 중고 거래마켓에 내놓기도 민망하고 어떻게 버려야 할지도 난감한 오래된 토스터, 프린터기 등을 헤아려보니 마침 5개가 넘는다. 모바일로 신청하고 문 앞에 내놓으면 정해진 날짜에 수거해가는 것으로 끝이다. 현관 앞에 한 짐 가득 부려놓았던 짐들이 싹 사라져있는 걸 보니 신기하면서도 속이 다 시원하다. 물론 아름다운가게나 옷캔 같은 곳에 기부하면 연말정산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으니 편한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처음엔 단순하게 내다 버린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도 함께 정리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물건을 정리하다보니 그때 이 물건을 왜 사고 싶었는지, 왜 사게 됐는지, 산 후에 얼마나 썼는지, 왜 안 쓰게 됐는지… 여러 가지 기억과 함께 당시의 내가 뭐에 꽂혀 있었는지까지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체 왜 샀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는 이걸 사기만 하면 세상 누구보다 알차게 잘 사용할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한동안 열심히 잘 쓰기도 했다. 내가 산 물건들을 살펴보는 시간은 내 경제적 능력과 욕망 사이 줄타기의 흔적을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지금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지,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까지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아직 미니멀리즘에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게 치우고 버렸는데도 여전히 물건은 많고, 마스크나 손 세정제처럼 상황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물건은 생기기 마련이다. 다만 곤도 마리에의 말대로 결국 물건은 '남기느냐 버리느냐'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으니 이왕이면 최대한 버리는 쪽으로, 아니 버릴 물건이 애초에 없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겠다./정지은 문화평론가정지은 문화평론가

[풍경이 있는 에세이]섬강에 비낀 금원의 소복

[풍경이 있는 에세이]섬강에 비낀 금원의 소복

기녀 되기전 여행 '호동서락기' 남겨김덕희 소실로 들어가 용산서 생활박죽서 등과 여성시동인 이끌기도남편 죽자 삼호정 떠나 고향 원주로섬강 서서 '지난 날' 풀어보냈으리라그해 삼월이었으니 섬강은 진달래꽃 흐드러진 강안의 풍경을 모두 담고도 흐름이 더디었을 것이다. 강물은 조용하여 먼 산수유 노란 꽃그늘을 부르기도 하고 아스라이 등성이로 사라지는 산길을 부르기도 했으리라.금원은 소복을 벗지 않고 삼강에 섰을 것이다. 섬강은 금원의 유년의 강이어서 어린 날들의 아름다운 기억을 담아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 김덕희를 떠나보낸 정월의 용산 삼호정은 스산하고 춥고 시렸을 것이다. 그녀는 삼호정에서 백일을 울고 그곳을 떠나 고향인 원주 봉래산 기슭으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녀는 지난 날들의 섧고 아리고 쓰라렸던 기억과 아름답고 미쁘고 벅찼던 추억을 모두 풀어 보내려고 섬강에 섰을 것이다. 섬강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무거워지는 산색을 안고 조용히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그녀의 소복만 오래도록 섬강에 비겼을 것이다.금원(1817-1853 이후)은 원주의 몰락한 양반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녀는 어떤 글에도 가문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운명적으로 기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금원은 기적에 오르기 전인 1830년,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남복을 하고 금강산과 서울과 강원도와 충청도를 여행하고 그 후 평안도에서 살아보고 나서 1850년, '호동서락기'라는 여행기를 남긴다. 그녀가 살아서 남긴 마지막 글이다. 생몰연대를 1853년 이후라고 말하는 것은 남편 김덕희의 죽음이 그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호동서락기'에 여러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여행기의 첫 시는 제천 의림지를 보고 지은 연시다. '호숫가 버들은 푸른 실처럼 늘어져/봄날 암담한 마음을 아는 것일까/나무 위 꾀꼬리 하염없이 우니/임 보내는 슬픔 이기지 못하겠네'라고 읊어 별리의 아픔을 보인다. 금강산 유점사는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흥취를 부르게 했다. '낭떠러지 하늘가 암자 하나/산 북쪽 맑은 종소리 남쪽까지 울리네/흰 구름 일어 흩어지니 골짜기가 눈 앞에 펼쳐지고/밝은 달은 연못 속에 고요히 잠겼구나/부질없는 꿈에서 불현듯 깨어/고요히 부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네/오십삼 부처 계신 맑은 이곳에 서/오래도록 영험한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싶구나' 열네 살의 깨달음이 심상치 않은 시편이다. 금강산을 나와 올라간 곳이 함경도 원산이다. 명사십리의 해당화를 놓칠 수 없어 시를 남긴다.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해당화만이 붉게 피었구나/이 꽃마저 지고나면/헛되고 헛된 봄날이여'는 열네 살의 정서는 아니다. 되돌아 내려오며 여행한 곳이 강원도의 관동팔경이다. '평해로 향하다가 월송정에 올랐다.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잠잠하고 날씨가 청명하여 섬들을 바라보니 있는 듯 없는 듯 바다색이 하늘에 닿아서 구름 끝을 볼 수 없었다. 차가운 이슬에 뜬세상의 삶이 참으로 가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라고 그녀는 '호동서락기'에 적는다. 이어서 서울행이었다. 북촌의 삼청동을 거닐며 시 한 수를 떠올린다. '온갖 꽃 핀 아침 조그만 누각이 환한데/또각또각 발소리 날개 단 듯 가볍다/복잡한 생각을 다 씻어 없애니/산에 가득한 안개는 저 멀리 펴져 있네'. 그녀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시였으며 깨달음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금원은 관기로 양반들의 모임에 불려나가면서 김덕희를 만나 그의 소실이 된다. 남편이 의주 부윤을 그만두고 낙향했을 때 금원은 남편의 별장인 용산의 삼호정으로 내려와 '삼호정시사'라는 여성시동인을 이끌었다. 여기에 참여한 여류 시인이 박죽서, 김운초, 김경산, 김경춘이다. 여인들은 선녀였다. '봄뜻으로 서로 만나 고운 놀을 아끼며/버들눈썹 처음 펼치니 예스런 뺨이 곱기도 하여라/시를 찾으며 꽃 보는 복을 마음껏 누리니/누가 선녀들에게 베틀 일을 쉬라했나'는 동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삼호정시사는 죽서의 죽음으로 해체된다. 김덕희가 동지사로 중국을 다녀온 후 자리에 눕게 되고 금원의 정성 어린 간호에도 세상을 뜨면서 금원은 삼호정을 떠난다./김윤배 시인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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