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0]제2의 공장 `창고` (하)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0]제2의 공장 '창고' (하)

개항이후 수출입 물품 관리 위해 건립CJ대한통운·한진등 인천에서 첫발 떼1893년 무역 총액 절반 이상 점하기도오랜 역사만큼 구조적 가치 갖춘 건물아트·상상플랫폼 '창작 공간 리모델링'구도심·지역 경제 활성화 시너지 기대창고 건물은 단순하다. 외벽과 지붕 이외의 시설은 최소화된다. 건물 내부 기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 같은 건물의 특성은 창고 기능에 기인한다. 많은 물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적재하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창문이 없는 창고 건물도 많다. 각종 물품을 적재·이동하기 위한 선반과 각종 장비가 들어서 있어, 복잡하고 빽빽해 보일 수 있으나 구조적으로는 가장 단순한 건물이 바로 창고다.인천항 인근에 창고가 생겨난 건 1883년 개항 이후다. 이때부터 수출입 물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창고가 항만 인근에 속속 건립됐다. 개항기 인천은 국내 최대 항만이었다. 개항이 이뤄진 것은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였으나 물동량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1907년 발간된 '인천개항 25년사'(저자 가세 와사부로, 역주 인천시 역사자료관)는 개항기 인천항의 지위를 잘 설명한다."1893년 무역 총액은 778만8천원인데 인천은 그중 5할1푼1리를 점하며 부산은 2할9푼9리, 원산은 1할9푼의 비율을 보인다." 이 책은 1893년부터 1907년까지 한국의 무역액을 항만별로 기록했는데, 인천항은 매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인천항을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천항 인근에 물류기업이 설립되고, 창고들이 운영됐다. 국내 최대 물류기업인 CJ대한통운의 모태가 되는 기업도 인천에서 시작됐으며, 한진그룹 역시 인천에서 첫발을 뗐다.CJ대한통운의 모태는 일제강점기 설립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이하 조선미창)다. 이 회사는 일본이 조선의 쌀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설립됐다. 일본 정부 주도로 서울에 설립됐으며, 인천에 가장 먼저 지점을 열었다. '대한통운 80년사'는 "회사가 당초 계획한 5개 수출항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점이 설치된 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장이자 당시 항만 사정이 개중 나은 인천이었다"고 했다. 인천지점은 1930년 11월 21일 문을 열었으며, 그해 12월 부산과 진남포지점이 영업을 시작했다.조선미창 인천지점 창고는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이마트 동인천점' 자리에 있었다는 게 항만업계 설명이다. 유태식(국제창고 대표이사) 전 인천물류창고업협회장은 "조선미창 건물은 현재 동인천 이마트 건물이 지어지기 전까지 여러 번 이름을 바꾸어가며 활용됐지만, 지금은 그 흔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1920~2002)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을 보면, 한진의 창업 과정과 함께 당시 인천항의 위상을 알 수 있다."해방 전에 운영하던 보링 공장을 일제의 기업정비령에 의해 정리할 때 받은 돈과 저축해둔 것을 합쳐 트럭 한 대를 장만한 나는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인천을 새로운 사업의 근거지로 삼은 것은 중국과의 교역을 겨냥해 무역업에 뛰어들려는 생각에서였다. (중략) 서쪽으로 중국과 상대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중국 무역 기지로서는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한진이 1950년대 지어 쓰던 창고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인천항에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새로운 시설들이 들어섰고, 옛 창고 건물은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항 옛 창고는 개항과 맞물려 인천의 역사가 배어 있고, 건물 구조 특성상 문화·예술 공간으로 활용 가능성이 높다.인천아트플랫폼은 창고 건물을 문화·예술 창작 공간으로 활용한 대표적 사례다. 인천시는 구도심 재생사업 일환으로 2009년 9월 인천아트플랫폼을 개관했다. 대한통운이 이용하던 창고 건물 2개 등 옛 건물들을 리모델링해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인천아트플랫폼 C동의 경우 대한통운 창고 건물의 외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들 창고 공간에서는 매년 30차례 정도의 전시·공연이 진행되고 있으며, 관람객은 연간 10만 명 안팎이다. 인천아트플랫폼 오병석 과장은 "창고 건물은 내부 기둥이 없고, 천장이 높은 형태다. 내부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시회와 공연 같은 문화 관련 작업을 하기에 좋은 조건"이라며 "특히 C동은 연극 공연이 많이 이뤄지는데 관객들의 집중도가 높다"고 말했다.CJ대한통운 김봉호 전무는 "인천아트플랫폼으로 활용하고 있는 대한통운 창고는 건립 이후 항만 물류와 관련한 창고로 쓰였으며, 90년대 초에는 대한통운이 택배사업에 진출하면서 전국 최초 택배 물류센터로 활용했던 곳"이라며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인천항 내항 8부두에 있는 아시아 최대 규모 곡물 창고도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8부두 곡물 창고는 면적 1만 2천150㎡, 길이 270m, 너비 45m다. 내부에 기둥이 없는 단일 공간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다. 이 창고는 인천항 제2선거 건립(1974년)과 연계해 1975년 정부 주도로 건립됐다. 인천항 주요 수입 품목이었던 양곡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40년 가까이 활용됐다. 한 번에 5만t의 양곡을 적재할 수 있었으며, 2000년대 초만 해도 창고가 비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인천 남항과 북항 등이 조성되면서 내항의 물동량이 줄었고 창고 활용도 역시 낮아졌다. 2015년 8부두 일부가 시민들에게 개방되면서 결국 창고 기능을 잃게 됐다.인천시는 이 창고를 다양한 문화콘텐츠의 생산·소비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 '상상플랫폼 조성사업'이다. 상상플랫폼은 3D홀로그램과 가상현실 등 첨단 문화시설과 함께 공연·전시회장 등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는 프로젝트다. 엔터테인먼트, 공연, 전시, 창업 등 다양한 용도가 복합된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인천시의 구상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이 창고가 가진 장소적 역사성을 살리면서 문화 콘텐츠 등을 새롭게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시킬 것"이라며 "상상플랫폼 조성사업은 구도심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1997년부터 이 창고를 운영한 (주)동부 김종식 전 인천지사장은 "이 창고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지에서 온 사료 부원료 등을 주로 보관하던 창고"라며 "내항에서 가장 큰 창고였다. 내항 1·8부두 재개발과 맞물려 활용 방안이 모색되고 있는데, (과거) 인천항 물류에 큰 역할을 했듯 (앞으로도) 지역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아트플랫폼 C동. 1940년대 지어진 대한통운 물류창고를 리모델링했다. 이 창고는 인천항으로 수입된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되다가 1990년대에는 택배 물류센터 기능을 했다. 이후 인천아트플랫폼으로 조성돼 다양한 공연 등이 열린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 내항 8부두 곡물 창고. 이 창고는 1975년 건립됐으며, 5만t의 양곡을 보관할 수 있다. 내부 기둥이 없는 단일 공간으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40년 가까이 물류 창고로 역할을 해왔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인천시는 이 창고를 문화·예술·창업 공간으로 활용하는 '상상플랫폼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내항 8부두 창고를 활용해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하는 '상상플랫폼' 조감도. /인천시 제공인천항 물류 창고 등을 활용해 조성한 아트플랫폼. 창고라는 건물의 특성을 활용해 전시공연을 할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아트플랫폼에서 진행된 전시, 공연 모습. /인천아트플랫폼 제공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9]제2의 공장 `창고` (상)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9]제2의 공장 '창고' (상)

글로벌 브랜드 수천여 물품 처리통관·포장 등 과정 '실시간 공개'원자재 수출·입으로 성장한 인천2000년대 들어 소비재 비중 급증부족한 부지 '배후단지' 조성 시급마트에서 구매하는 미국산 오렌지. 이 오렌지가 생산지에서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할까. 미국 농장에서 생산된 오렌지는 미국 항만에서 옮겨진 뒤 배에 실려 국내로 들어온다. 한국의 항만에 도착하면 물류창고로 향한다. 이후 통관, 검역, 포장 등 몇 차례의 과정을 더 거쳐 소비자에게 인도된다. 애초에 오렌지 주인은 '어떤 방법의 물류가 가장 효율적일까' 고민하게 된다. 어떤 항만을 이용하고, 어디에 위치한 물류창고에 오렌지를 보관할지 선택해야 한다.필요한 양의 물품을 적은 비용을 들여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내는 것이 물류(物流)의 핵심이다. 신속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절차를 간소화해야 하고, 물품의 이동 거리를 줄여야 한다. 국가 간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물류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창고'는 물류에서 빠질 수 없는 한 축을 담당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과거에 창고는 단순히 물품을 보관하는 기능이 전부였으나, 영역이 확대되면서 '제2의 공장' '미래의 공장'이라는 표현도 나온다.인천 중구 아암물류1단지에 위치한 물류기업 화인통상. 넓이 1만5천㎡, 높이 21m 규모의 화인통상 물류창고는 층층 선반마다 빈 공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장품, 식품, 의류 등 종류도 다양했다. 창고 한편에서는 직원들이 며칠 뒤 홈쇼핑을 통해 판매될 주방용품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릇과 접시 등 각각 품목별로 수백 개가 한 묶음으로 운송돼 온 것을 해체한 뒤 소비자에게 배송될 형태로 포장하는 것이다.화인통상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3PL 기업이다. '3자 물류'라고도 불리는 3PL은 제품 생산을 제외한 물류 전반을 특정 업체에 맡겨 처리하는 것을 일컫는다. 화인통상에서 처리하는 물품은 대부분 소비재이며, 물품 종류는 7천여 가지에 이른다. 가구 브랜드 '이케아', 의류 브랜드 '자라', 창고형 마트 '코스트코' 등 다수 글로벌 브랜드가 화인통상에 물품의 보관·통관·라벨링·국내운송 부문 등을 맡기고 있다. 화인통상은 외국의 화주가 생산품을 맡기면 통관 등을 포함해 국내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는 '완성품'이 되기까지 일체의 역할을 한다. 화인통상은 화장품과 식품 등에 대한 성분 분석표 등을 작성하기 위해 화학 전공자 등을 채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각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해 국내 제도에 맞게 변환하는 역할을 한다. 화인통상은 상품의 처리 과정을 화주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있다. 화물의 현재 위치, 동선, 처리 과정 등을 화주들이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신뢰도를 높이고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다.화인통상과 같은 물류창고가 인천에 있는 것은 인천항이라는 인프라 때문이다. 전 세계 교역량의 95% 이상이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 국내에 들어오는 화물 대부분은 인천항과 부산항 등 항만을 통해 수입된다. 항만 인근에 대규모 물류창고가 들어선 이유다. 항만에서 물품 보관·처리 과정을 거친 뒤 각 지역으로 운송하는 게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인천항은 1883년 개항 이후 국내 대표 무역항 역할을 했다. 1960~1970년대에는 국내 대표 원자재 수입항 역할을 했으며, 2000년 이후에는 원자재뿐 아니라 다양한 소비재 등이 인천항을 통해 수입되고 있다. 특히 인천항은 중국과 가깝고 소비지인 수도권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이 있다.화인통상 최승재 대표이사는 "보관, 통관, 검역, 포장, 라벨링 등이 각각 다른 곳에서 이뤄진다면 화물의 이동 거리가 늘어날 것이고, 이는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모든 것을 '원스톱' 서비스로 제공하기 때문에 지금도 국내에 진출하려는 외국 기업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어 "이는 상품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물류창고의 역할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했다.인천은 개항 이후 인천항 인근에 창고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인천항을 통해 수출·수입하는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정부가 국내 쌀을 자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창고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수탈이었다. 인천항이 확장하면서 항만 인근의 창고도 늘었다. 1960~1970년대 인천항 인근에는 10여 개의 창고가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창고에서는 원당(原糖), 밀가루, 식료품, 원사(原絲), 고철 등을 보관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인 만큼 화물이 모여 있는 창고 인근에선 절도가 기승을 부렸다. 많은 화물이 한곳에 모여 있다 보니 화재가 발생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1979년 8월 13일 인천항 화학품 보관 창고에서 큰불이 나 수십억 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는 기록이 있다.경인일보의 전신인 경기신문은 1979년 8월 14일자 1면 기사에서 "13일 밤 11시 55분께 인천 남구 용현동 화공약품 보세창고인 대동창고 소유 D동에서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안전창고 5동과 인근 창고 1동 등 6동에서 보관 중이던 화공약품이 폭발하고 각종 기기류가 모두 불에 타 30억 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고 보도했다. 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인천에서 창고업을 하고 있는 국제창고 유태식(64) 대표는 "당시 불이 났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며 "인천 전체가 연기 때문에 매캐한 냄새가 났다"고 회상했다.2000년대 들어 인천항을 통해 교역하는 물품은 다양해졌다. 수입품 가운데 소비재의 비중이 커졌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상품이 많다고 한다. 유태식 대표는 "1980년대에만 해도 창고는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고, 보관하는 물품도 대부분 원자재였다"며 "지금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온 소비재가 창고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고 설명했다.화물의 규모가 커지고 물품이 다양해지면서 창고의 기능도 확대됐다. 하지만 인천항은 수도권에 위치해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물류센터 등을 지을 부지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이에 인천항만공사는 2015년 개항한 인천 신항과 연계해 대규모 항만 배후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배후단지가 조성되면 '물류단지 부족 문제 해소' '첨단 물류 서비스 제공' 등으로 인천항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인천항만공사는 기대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 김재덕 물류사업팀장은 "신항 배후단지가 조성되면 더욱 첨단화된 물류시스템이 인천에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인천연구원 김운수 연구위원은 "옛날 창고는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쌓아두는 정도의 역할에 그쳤으나, 물류의 중요성이 강화되면서 항만 인근의 물류창고로 여러 기능이 집적화되고 있다"며 "창고는 제품의 기본적인 생산을 제외한 모든 작업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이다. 항만 배후단지는 이러한 창고의 기능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지난달 30일 찾은 인천 중구에 위치한 화인통상 물류창고. 21m 높이의 각 선반에는 인천항을 통해 수입한 각종 화물이 층층이 쌓여 있다. 화인통상이 처리하는 물품의 종류는 가구, 화장품, 생활용품, 식품 등 7천여 종에 이른다. 포장, 라벨링, 운송 등의 작업 일체가 이곳에서 진행된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화인통상 직원들이 생활용품 포장 업무를 하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최승재 대표이사가 물류창고에서 화인통상의 물류처리 시스템 등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 중구 아암물류1단지에 위치한 화인통상 물류창고 전경. 아암물류1단지에는 인천항을 기반으로 한 물류기업들이 밀집해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8]국제물류 주선업 `포워더`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8]국제물류 주선업 '포워더'

선적·보험·보관등 복잡한 과정 대행육·해·공 복합시스템… 효율성 높아인천항, 컨터미널 설치 이후 활성화수도권·중국 시장 수시 연결 '매력'2000년대들어 물동량 4배가량 증가불볕더위가 한창이던 7월 20일 인천 남항 인근에 있는 'YL물류' 야적장은 비교적 이른 오전 시간임에도 작업자들과 지게차, 트럭들로 분주했다. 중국에서 들어온 컨테이너에서 지게차로 화물을 빼내는 작업이 한창이었고 그 옆으론 빼낸 짐을 어디론가 싣고 가는 트럭들이 줄지었다. 다른 한 켠에선 트럭에서 창고로 짐이 옮겨졌다. YL물류 문성식 상무이사는 "하루에 10대 내외의 컨테이너를 처리하는데, LCL 컨테이너 하나당 20~30명의 화주가 있다"며 "물건을 내리면 화주별로 물건을 다시 옮겨야 해 하루에도 100여 대의 트럭이 이곳을 오간다"고 했다. 그는 "무엇이 얼마나 들어오고, 또 목적지에 맞게 제대로 나가는지 정확히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예전보다 장비도 좋아지고 해서 작업이 수월해진 부분이 있지만, 아무래도 야외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은 요즘처럼 폭염이 계속되면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일반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 업체는 '포워더'라고 불리는 '국제물류주선업'을 하는 업체다. 수출이나 수입이 이뤄지기 위해선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일례로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의 국내 업체가 중국 내륙의 한 도시에 있는 업체와 수출 계약을 맺고 제품을 보내기로 했다. 인천에서 생산한 제품을 중국 업체에 전달하기 위해선 인천 공장에서 제품을 포장해 인천항이나 인천공항으로 옮겨야 한다. 제품을 실어 나를 배나 비행기 편을 확보해야 하고, 일정이 맞지 않으면 일정 기간 보관해야 한다. 중국 현지 항만이나 공항에 도착해도 중국 내륙에 있는 업체까지 물건을 운반해줄 철도나 차량 등 교통수단이 필요하다. 이들 과정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서류도 수십 가지다. 일반 업체가 이들 과정을 모두 소화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포워더'는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화주로부터 의뢰를 받아 이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이행한다. 송하인으로부터 화물을 인수해 수하인에게 인도할 때까지 집하와 입출고, 선적, 운송, 보험 가입, 보관, 배달 등 일체의 업무를 주선한다. 해상, 육상, 항공 등 각 운송 수단을 복합적으로 활용해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는 다양한 'door to door'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주된 역할이다. 프레이트 포워더(Freight forwarder), 복합운송주선업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역할에 큰 차이는 없다. 인천복합운송협회 양창훈 회장은 "포워더는 최적의 물류시스템을 설계하는 디자이너라고 보면 될 것 같다"며 "수출입 업체가 운송이나 선적 절차 등 복잡한 업무에서 벗어나 수출입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했다.포워더의 역사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 도시국가 간 원활한 교역 활동을 위해 각국의 운송과 상사제도, 무역 관행, 관리, 세금 문제 등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중간 매개 행위자의 필요에 따라 무역업자와 운송업자의 형태를 갖춘 상인이 등장하면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기능 세분화를 통해 전문성을 지닌 운송업자의 성격으로 변모했고, 국제사업회의소의 신용장통일규칙과 미국의 신해운법 등이 발효되면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 세계적인 물류업체 DHL과 UPS 등도 포워더의 일종으로 구분된다.우리나라에선 조선 중기 이후 존재감을 나타낸 '객주(客主)'가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객주는 전국의 상품 유통을 중간에서 장악하는 상인으로, 위탁매매를 본업으로 했다. 여기에 창고업과 운송업, 은행업과 숙박업 등을 겸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단지 화물만을 보내 판매를 위탁하는 일도 했다고 한다. 1883년 인천항 개항으로 인천이 조선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객주의 활동은 더욱 두드러졌다.외국과 같은 형태의 포워더 관련 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건 1970년대로, 정부의 수출입 활성화 정책에 따른 해외 교역량 증가가 배경이 됐다. 스위스나 독일 등에서 유수의 포워더가 국내에 진출하면서 그들의 서비스 형태를 답습하는 방식으로 처음 자리 잡았다고 한다. 초기엔 화물 선적을 대행하거나 운임 징수 문제를 상대국 파트너를 대신해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수수료를 받는 형태였다. 당시만 해도 해운 중심의 업무였다. 이후 법적 체계가 갖춰지고 교통부 해운국에서 관장하던 업무를 신설된 해운항만청으로 이관하면서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항공운송과의 병합, 면허제의 등록제 전환 등 법적 정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 지금의 형태로 성장했다. 현재는 관련 업무가 지자체로 넘어와 있다.포워더가 인천항 주변에 본격적으로 모인 건 2000년대 들어서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인천항 외항에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이 들어서고 인천~톈진 등 정기 컨테이너 항로가 개설되는 등 여건이 좋아지면서 업계에서 인천항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컨테이너를 둘러싼 주변 인프라 확충이 포워더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30년 가까이 포워더 업무를 한 정원태 비선해운항공 사장은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기 전까지는 한중 카페리에 실리는 컨테이너 정도고, 컨테이너를 배로 싣거나 배에서 내리는 갠트리 크레인(gantry crane) 정도만 있을 뿐 인프라도 열악해 포워더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이어 "트럭에서 컨테이너를 야적장으로 내릴 때면 컨테이너에 줄을 달아 일반 크레인에 걸고, 그 줄을 사람 여럿이 잡아가면서 어렵게 작업했다"면서 "인천항과 배후단지 등에 컨테이너를 취급할 수 있는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포워더도 함께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이 개장한 2003년 컨테이너 물동량은 82만1천TEU였다. 지난해 인천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304만8천TEU로, 10여 년 만에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천시에 등록돼 활동하는 포워더는 올 7월 현재 420여 곳에 달한다. 2013년 이전까지 238개였던 인천지역 포워더는 매년 40~50개씩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 그래픽 참조인천항은 미주와 유럽 등으로 향하는 장거리 항로는 부산항에 비해 적어도 수도권이라는 배후 시장과 거대 시장인 중국을 수시로 연결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중국 등 해외 소비자들이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 직접 물건을 구입하는 '역직구' 등이 활성화되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 시 인천항이 거점 항만으로 부상할 수 있는 만큼 포워더 업계에서 인천항의 비중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한국물류학회 박정섭 명예회장(청운대 교수)은 "인천은 세계적인 항만과 공항을 갖추고 있는 등 물류 연계성이 뛰어난 지역인 만큼, 복합운송을 하는 포워더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며 "국내 생산 물자의 원활한 수출을 위한 체계적이고 유기적인 시스템이 더욱 잘 구축된다면 인천은 더욱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 남항 인근 'YL물류' 야적장에서 지게차가 컨테이너에서 화물을 꺼내는 모습. 한 직원이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한 트럭 기사가 포워더 업체 사무실에서 컨테이너 반·출입 절차를 밟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 남항 인근에 있는 'YL물류' 사무실에서 한 직원이 선하증권 서류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7]인천항과 화주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7]인천항과 화주

신속하고 안정적인 물품 이송 위해 항 인근에 자리 잡아부두와 3.5㎞ 거리 원자재 업체, 바로 가공해 전국에 공급현대제철 같은 대형기업들은 전용부두 통해 물류비 절감산단·배후단지 등 주변 일자리 창출·산업 '원동력' 역할'화물(貨物)'이란 '운반'을 전제로 하는 물건을 뜻한다.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꾸려둔 물건이라는 점에서 구매한 순간부터는 구매자가 곧 '화주(貨主·화물의 주인)'가 된다. 가령 뉴질랜드에서 벌목한 소나무는 화주의 주문과 동시에 베어져 원목 형태로 선사에 전달된다. 인천항에 도착한 화물은 하역 작업을 거쳐 화주 업체로 옮겨진다. 원목은 방역과 가공 작업을 통해 제재목으로 만들어진다. 제재목은 건설현장의 거푸집, 목재제품 등에 활용된다. 이때 화주는 화물을 '누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저렴하게' 주고받을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한다.인천항을 이용하는 화주들은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물건을 보내기 위해 항 인근에 터를 잡거나 직접 전용부두를 조성했다. 새로운 형태의 신항 부두를 만들기도 했다.20일 오전 10시께 인천 서구 가좌동에 위치한 (주)아주목재 작업장.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소나무 원목 1천여t이 북항에서 하역돼 작업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원목들은 방역을 거쳐 품질에 따라 선별된 후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졌다. 굉음과 함께 이리저리 깎인 원목은 1~2분여 만에 얇고 긴 제재목이 됐다. 이렇게 연간 18만여t의 원목은 이곳에서 제재목으로 탄생해 전국에 공급된다. 북항 목재부두와 작업장 사이 거리는 불과 3.5㎞. 1999년 남동공단에서 시작한 인천 향토 기업 아주목재는 북항이 설립되던 시기에 맞춰 2008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목재 업체는 대부분 원목을 수입해 가공·제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화물의 무게가 제법 나가 항에서 멀어질수록 물류비가 많이 든다. 북항 목재단지 인근 등 서구지역에 목재 업체가 집적해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북항 목재부두에는 지난 한 해 90여만t의 목재가 처리돼 전국 항구 중 가장 많이 목재를 취급했다. 아주목재 백남철 전무는 "호황기에는 목재를 납품해달라는 사람이 너무 많아 사우나 가서 숨어 있을 정도였다. 인천항을 중심으로 목재 업체가 집적해 있으면서 인천의 목재산업도 더 빠르게 발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폐목재로 인한 연안 오염, 톱밥에 의한 날림먼지 등으로 업계 자체는 '애물단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백 전무는 "주민들이 '골칫거리'처럼 생각하는데 억울하기도 하다"며 "잡화·공산품 위주의 컨테이너 화물 화주는 주로 인천항을 통과해 다른 지역으로 나가지만, 원목과 같은 원자재(벌크·bulk) 화물 화주들은 인천항 인근에서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경제를 이끌고 있단 것도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중소형 화주들이 인천항을 중심으로 모였다면, 직접 전용부두를 조성해 인천항의 이점을 극대화한 대형 화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현대제철, 동국제강, SK인천석유화학과 같은 인천의 대기업은 각각 현대제철부두, 동국제강 고철부두, SK정유돌핀이라는 전용부두를 통해 원료를 들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가스공사, 한국남동발전(영흥화력발전소) 등 공기업도 각각 인천항 전용 돌핀을 통해 물류비를 절감한다.이 중 물동량이 가장 많은 전용부두는 SK인천석유화학 정유돌핀이다. SK인천석유화학은 지난 한 해 2천257만여RT(운임료)의 유류를 수입했다. 영흥돌핀은 유연탄 1천580만RT, 현대제철부두는 철재·고철 1천393만RT, 동국제강부두에서는 철재·고철 95만RT이 처리됐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전용부두가 있기 전에는 화물차가 (북항에서 이동 중) 도로에 철근을 떨어뜨리거나 민원이 들어오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전용부두가 생기면서 물류비 절감 효과는 물론 재고 관리도 체계적으로 가능해졌다"며 "인천항은 수도권과 중국이 가까워 철강 업계에서는 이점이 크다"고 말했다. → 그래픽 참조인천연구원(옛 인천발전연구원)이 2009년 발간한 '인천항 화물 이전 요인에 관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중소형 화주는 인천항은 물론 남동, 부평, 주안, 반월, 시화, 파주, 탄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와 인천지방산업단지 등 7개 국가산업단지와 수도권 60개 지방산업단지 배후에 분포돼 있다. 품목은 공산품, 자동차부품, 중고차, 잡화 등 다양하다. 인천뿐만 아니라 수도권 전역에서 국내외 교역에 큰 동력이 되고 있는 셈이다.과거에는 항만시설 준공을 주도한 정부가 수출과 수입을 도맡은 '화주'나 다름없었다. 백제 근초고왕은 삼국시대 중국과의 해상 교역을 위해 첫 교통시설인 나루터 '능허대'를 조성했다. 인천항만공사가 발간한 '인천항사'를 보면 제물포항과 갑문을 준공한 정부는 민간으로부터 직접 쌀, 콩, 홍삼, 금, 해산물을 사서 외국으로 수출하고 마포, 견직물 등을 수입해 민간 상인들에게 팔았다.화주들이 인천항을 택하는 요인은 지리적 이점에 그치지 않는다. 효율적인 물류 서비스와 안정적인 관리, 물류 업체와의 신뢰도 등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2014년 해운물류학회에 실린 '항만배후지 물류창고 선택 요인에 관한 연구-인천항을 중심으로'라는 학술 논문에 따르면 인천항 배후단지 물류창고 운영기업들은 화주 기업 유치 방안을 위한 중요도를 묻는 조사에서 '서비스 비용(0.762)', '보관·배송·분류(0.747)', '안전한 제품 관리(0.717)', '지리적 위치(0.697)' 순으로 답했다. 항만 배후단지 조성과 같이 금융·교육 등 각종 기능이 한데 모인 도시와의 접근성까지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배준영 인천경제연구원 이사장은 "화주들에게는 여전히 비용 절감이 큰 화두지만 양질의 생산시설이 모여 있다거나 항만 배후부지, 세관 서비스, 거주 환경 등 도시가 잘 갖춰져 있는지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라며 "인천항은 이미 세계적 항만이 됐지만, 각종 비용 상승으로 화주의 부담이 커지고 있는 만큼 물류비용 절감을 위한 인프라를 갖추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시황 변화가 큰 해운업계에서는 화주·선사·물류업계 간 '협력'과 '신뢰'도 큰 영향을 차지한다. 일본의 경우 선주·화주·물류업계 간 협력을 통해 자체적인 선순환 구조(해운-조선-화주)를 갖추고 있다. 이상용 청운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물류업계가 뼈를 깎는 발전으로 화주 기업과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할 때"라며 "화주들이 안정적으로 화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고품질 서비스를 제공하고 화주와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인천항은 국내외 화주들에게 더 매력적인 부두가 되기 위해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항 개장으로 중소형 화주들의 이용량이 크게 늘면서 인천항이 컨테이너 화물 중심으로 변모했다. 물론, 원자재 화물의 경제적 파급력이 인천 지역을 이끄는 원동력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빠르게 변화하는 물류 환경 속에서 인천항은 화물을 처리하는 단순 역할에서 벗어나 화주의 가치 향상에 초점을 맞춰 나가야 한다. 인천항만공사 관계자는 "인천항 활성화에 대한 화주들의 기여도는 어느 한 곳을 딱 짚어 꼽기 어려울 정도로 식품, 공산품, 중고차, 사료, 목재, 철재, 원료 업계 등 수많은 화주들에 의해 발전돼 형성해왔고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며 "화주들이 인천항을 꾸준히 이용할 수 있도록 항만 효율화, 홍보, 인프라 개선 등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20일 인천시 서구 (주)아주목재 야적장에서 크레인이 뉴질랜드에서 수입된 소나무 운반차량에 실려 있는 원목을 내리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 한국가스공사 돌핀에 LNG선이 정박하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 내항부두에 적재돼 있는 한국지엠 수출용 차량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 내항부두에 수입 철재가 적재돼 있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6]남·북극 연구 전초기지 `아라온호`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6]남·북극 연구 전초기지 '아라온호'

남극 故전재규 대원 사망사고로 국민적 관심 받아2004년 순수 국내기술로 설계 시작… 2009년 진수독립공간에 해수·생물 분석실등 최첨단 시설 설치빙판 두께 얇아진 북극 자원 발견·개발 경쟁 합류1m 얼음 깨는 아이스 나이프·6800마력 엔진 탑재극지방 번갈아가며 상설기지 물자 보급·탐사 맡아항해 중 유빙에 조난당한 고기잡이배 구조 활동도16일 오전 인천 내항 제1부두 12선석. 19일 모항(母港)인 인천항을 떠나 아홉 번째 북극 항해에 나서는 아라온호가 정박하고 있었다. 단단한 얼음에 끄떡없는 특수 강철 소재의 새빨간 뱃머리에는 '바다'와 '모두'의 순우리말 합성어인 '아라온'이 흰색 글씨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승무원들은 북극까지 가는 20여 일 동안 배 안에서 80여 명의 탑승자가 사용할 물품과 연구 장비를 싣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아라온호는 국내에 단 하나뿐인 쇄빙선(碎氷船·Ice Breaker)이다. 7천487t 규모의 아라온호는 2004년 순수 국내 기술로 설계를 시작해 2009년 6월 진수됐다.극지연구원들은 1992년부터 쇄빙선 건조의 필요성을 정부에 수차례 건의했다. 연구 활동뿐만 아니라 기지와 외부를 오가는 이동 수단이 고무보트밖에 없어 월동연구대원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 송도국제도시 소재 극지연구소 윤호일 소장은 "남극 기지에 물자를 보급하고, 남극 여러 지역을 오가며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쇄빙선이 필요했었다"며 "그러나 '배 한 척 만드는 것에 큰돈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 번번이 좌절됐다"고 설명했다.정부가 전격적으로 쇄빙선 건조에 나선 건 2003년 남극에서 발생한 고(故) 전재규 대원의 사망 사고 때문이다.전재규 대원은 한국해양연구원 소속으로 이해 남극세종과학기지 제17차 월동대원으로 활동했는데, 12월 조난당한 대원 3명을 찾으러 나섰다가 보트가 전복되면서 순직했다.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당시 월동대 대장으로 전재규 대원과 함께했던 윤호일 소장은 "당시 구조팀은 모두 특수 부대원 출신으로 구성됐지만, 보트에 탑재된 GPS 장비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재규 대원이 반드시 포함됐어야 했다"며 "구조팀이 출발하기 전 '재규야. 너는 보트 밧줄을 꽉 잡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는데, 그 모습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고 안타까워했다. 전재규 대원은 해양지리 전문가였다.이 사고를 계기로 온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국가를 빛내기 위해 극지에서 고무보트에 의존하다 사고가 났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뭐 하는 것이냐"고 말하며 쇄빙선 건조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제야 정부는 쇄빙선 설계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해양수산부 해양개발과장으로 근무한 임현철 해수부 항만국장은 "그해(2003년) 2월부터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경제성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며 "전재규 대원 사망 사고를 계기로 국민적 관심이 커지면서 쇄빙선 건조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고 했다.2009년 12월 인천항을 떠나 첫 항해에 나선 아라온호는 남극과 북극을 번갈아 가며 활동하고 있다. 남극 세종기지와 장보고기지, 북극 다산과학기지 등 상설기지에 연료, 굴삭 장비, 식량 등 물자를 보급한 뒤 탐사활동을 벌이는 게 주 임무다.이를 수행하기 위해 아라온호는 두께 1m의 얼음을 깨며 3노트(시속 5.5㎞)로 운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선저(배의 아랫부분)에 달린 '아이스 나이프(ice knife)'가 얼음을 양옆으로 제쳐 연속으로 얼음을 깨며 전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후미에 달린 프로펠러 2개는 깨진 얼음이 다시 얼어 배에 엉겨 붙는 것을 막는다.6천800마력에 달하는 대형 엔진 2개가 장착돼 있어 보통 배의 3~4배가 넘는 힘을 낸다. 최한샘(29) 아라온호 2등항해사는 "보통 선박보다 힘이 좋아 웬만한 얼음은 그대로 부수며 전진할 수 있다"면서 "얼음 때문에 길이 막히면 후진하거나, 좌우로 수평 이동할 수 있는 기능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아라온호는 쇄빙 능력을 활용해 극지방 항해 중 조난당한 선박도 구조한다. 2015년 12월에는 남극 로스해에서 '이빨 고기(메로)'를 잡으러 가다 가로 15m, 세로 7m, 두께 2m의 유빙에 얹혀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부닥친 썬스타호(628t급)를 구조했다. 최한샘 항해사는 "유빙 위에 올라탄 뒤, 힘으로 얼음을 부수며 썬스타호에 접근해 구조했다"며 "우리나라 선원 7명을 포함해 37명이 배에 타고 있었는데, 모두 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아라온호 내부에는 해수를 정밀 분석·보관하는 발틱룸(Baltic Room)을 비롯해 수족관, 생물연구실, 건식연구실, 지구물리실, 해수분석실, 화학분석실 등이 독립된 방으로 설치돼 있다. 그는 "아라온호 수준의 최첨단 연구시설을 갖춘 쇄빙선은 독일 '폴라르슈테른(Polarstern·북극성)'을 포함해 전 세계에 4척가량이 전부"라고 강조했다.상설기지 물자 보급 이외에도 극지 연구에 배가 필요한 이유는 상설기지를 둘 수 없는 곳까지 접근해 연구 활동을 벌이기 위해서다. 북극은 학술적 연구만 허용된 남극과 달리 최근 온난화로 북극해 표면 얼음 두께가 얇아지면서 탐사 가능 범위가 늘었다. 이 때문에 선진국들은 자원 개발 등 북극의 경제적 가치를 선점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쇄빙선을 가진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보물찾기'에 나서고 있다. 아라온호도 2016년 '불타는 얼음'으로 불리는 냉동 천연가스(가스하이드레이트)를 북극 동시베리아해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현재 북극 영유권을 가진 나라는 미국, 캐나다, 러시아, 노르웨이 등 8개다. 이들로부터 정식 옵서버 자격을 얻은 12개국만이 북극 항로 및 자원 개발사업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 번의 도전 끝에 2013년 중국, 일본 등과 나란히 옵서버에 합류했다.아라온호는 19일 인천항을 떠나 북극으로 간다. 북극 해양·해저에 대해 연구한 뒤 오는 10월 인천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그 이후에는 남극과학기지 월동대에 물품을 보급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일정이 있다.윤호일 소장은 "아라온호는 1년에 300일 넘는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고 있는데, 거리가 먼 북극과 남극을 오가다 보니 이동을 위해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해수부와 극지연구소는 아라온호보다 큰 1만2천t급 제2쇄빙선 건조를 추진하고 있다. 윤 소장은 "두 배가 남극·북극 탐사를 각각 전담하면 보다 효율적 연구가 이뤄질 것"이라며 "극지 연구 선진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제2쇄빙선 건조를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16일 오전 인천 중구 인천 내항에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정박해 있다. 7천487t 규모의 아라온호는 선원 25명과 연구원 60명 등 총 85명이 승선할 수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북극해를 항해하는 아라온호의 모습. /극지연구소 제공북극항해기간동안 승무원들이 사용할 물품과 연구 장비를 싣는 아라온호 크레인.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라온호 선교의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아라온호 메인연구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고(故) 전재규 대원이 남극 17차 월동연구대원으로 참여했을때 대원들과 함께 기념촬영한 모습.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전재규 대원. /극지연구소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5]해상의 화물차 `바지선`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5]해상의 화물차 '바지선'

건축 자재·설비 운반하는 무동력선이동땐 예인선과 한몸처럼 붙어다녀갑문 준공 전까지 화물하역 '전성기'이후엔 교량·부두 확장 일거리 맡아항만 공사에서 필수적인 장비 불구엔진없어 1997년까지 배 취급 안해인천대교 등 현장서도 공로상 소외지난 5일 오전 9시 인천 영종대교 아래 마련된 임시 부두에 시커먼 대형 덤프트럭 250대 분량의 펄(개흙)을 잔뜩 실은 '바닥이 널찍한 배' 한 척이 천천히 다가왔다.김포 대명항 부두 축조 공사를 하며 발생한 준설토를 버리기 위해 바지선(Barge)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영종대교 아래에는 인천항 인근에서 발생한 준설토를 처리하는 '준설토 투기장'이 있다.펄을 싣고 접근한 바지선의 이름은 '연안호'. 이 배는 엔진이 없어 혼자 힘으로 항행할 수 없다. 선박법에서는 부선(艀船)이라고 정의한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보니 우측 옆구리에 묶인 예인선(曳引船) '건민T7'호가 마치 한 몸처럼 연안호를 임시 부두에 붙이고 있었다.연안호 선원 백학기(56)씨는 "바지선과 예인선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며 "호흡이 맞지 않으면 현장에 배를 붙이기 어렵다. 이래저래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백씨는 현장에 투입된 지난달 초부터 배에서 먹고 자는 고된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바지선은 엔진이 없어 예인선에 의존해야 한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는 예인선이 끌어 움직이고, 부두나 작업 현장에 붙여야 할 때는 예인선과 홑줄로 묶어서 단단히 고정해 움직인다. 배를 붙이기 위해 예인선에 단단히 고정해 움직이는 것을 업계에서는 '차고 다닌다'고 표현한다. 예인선의 예(曳)자와 인(引)자는 끈다는 뜻이지만, 끌지 않고 차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바지선이 예인선과 묶여 있을 때는 모두가 긴장해야 한다. 예인선 '건민T7' 이갑경(68) 선장은 "예인선이 바지선을 차면 높은 브리지에서도 바지선 앞 상황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는다"며 "예인선 승조원인 다른 항해사가 바지선으로 건너가 현장을 보고 무전기로 전달해 주는 상황에 따라 배를 조종해야 한다"고 했다. "오른쪽으로 밀어라, 왼쪽으로 당겨라"는 식으로 대화를 나눈다.연안호 덩치가 건민T7보다 몇 배는 컸다. 이날 현장에서 본 모습도 바지선이 예인선을 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해 보였다. 배를 붙일 임시 부두에서는 포클레인이 흙으로 길을 다져 놓고 있었다. 덤프트럭이 널빤지처럼 생긴 해치를 통해 바지선을 잘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공사 현장에 주로 쓰이는 바지선은 무동력선이라는 이유로 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선박 등록에 관한 법률인 선박법의 시행규칙이 개정된 1997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국적선으로 등록하지 못하고 건설장비로 취급됐다. 황규민(52) 인천예부선협회 부회장은 "바지선 선주들은 선박으로 인정받지 못해 재산권 행사를 할 수조차 없었다"며 "1997년 선박법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선박으로 인정됐다. 인천의 바지선 선주들이 법 개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바지선은 준설토나 바다에서 채취한 모래를 운반하고, 교량·항만 건설 현장의 장비와 자재를 나르기도 한다. 화물차나 철도로 수송하기 힘든 대형 화물의 단거리 수송에 이용되기도 한다.인천예부선협회에서는 바지선(부선)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한다. 4개의 앵커(닻)가 달려 바다 위에서도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는 '세팅부선', 갑판에 1.5m 정도의 벽이 설치돼 화물이 떨어지지 않는 '코밍부선', 갑판에 벽이 없고 평평한 '평부선', 갑판이 없이 바닥으로 움푹 파여 화물을 더 많이 실을 수 있는 '홀드바지' 등이다.바지선의 최대 호황기는 1974년 인천항 갑문이 준공되기 이전까지였다고 바지선 선주들은 기억한다. 당시에는 외항 묘박지에서 바지선을 통해 하역 작업이 이뤄졌다.바지선 선주 유병두(75)씨는 "갑문이 생기기 전에는 큰 화물선들이 부두에 배를 붙이지 못해 바다 한가운데서 바지선에 화물을 내리는 식으로 하역했다"며 "갑문이 생기고 부두 시설이 좋아지면서 바지선 일감이 급격하게 줄었다"고 했다.다행히 갑문이 생긴 후에는 교량이나 부두시설 확충 등 대규모 공사 일거리가 밀려왔다. 특히 인천은 일거리가 많았다. 남항·북항이 개장하고 영종대교와 인천대교 공사, 신항 건설 등 일거리가 있었다.최근 3~4년 사이에는 대규모 공사도 자취를 감춰 버렸다. 바지선 선주들은 정부가 어선처럼 감척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그나마 준설토를 옮기는 바지선 선주들은 일거리가 그럭저럭 있는 편이다. 인천항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커 배가 다니는 항로에 토사가 쌓이며 항로 깊이가 계속 낮아진다. 인천항은 안전한 항로 수심을 확보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준설 작업을 벌여야 한다.바지선은 육상으로 치면 화물차 같은 역할을 한다. 때문에 해상 공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장비다.2015년 개장한 인천 신항 공사에서도 바지선은 1공구 공사 구간 5천800t 규모의 케이슨 44개를 실어 날랐다. 이때 투입된 바지선은 '착저식 진수대선(DCL)'이라고 부르는 배였다. 2공구 44개의 케이슨은 해상크레인이 운반했다. 케이슨은 육상에서 제작한 안벽 구조물이다. 바다에서 직접 구조물을 쌓아올리기 어려운 경우 육상에서 케이슨을 제작해 바다에 옮겨 넣는 방식으로 공사가 진행된다.인천항만공사 김성진 항만개발실장은 "바지선은 항만 공사에 필수 장비다. 바지선이 없는 항만 공사는 상상도 할 수 없다"며 "수천 톤의 케이슨을 운반할 수 없다면 공사가 불가능하다. 작은 선박으로 옮길 수도 없고, 엔진이 없어 그만큼 화물 적재도 자유로운 바지선은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하지만 바지선은 건설 현장에서 그 가치를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 2009년 10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인천대교 개통식에서 공사 관계자 등에게 표창을 줬는데, 바지선 선주는 단 한 명도 상을 받지 못했다. 인천대교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는 한 세팅부선 선주는 "(상은) 언제나 건설회사 차지였다"며 "배인데 배 취급도 못 받고, 가치나 역할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바지선 선주들은 언제나 아쉬운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동력이 없어 혼자 항행할 수 없어 예인선과 함께 다니는 바지선(Barge)은 해상의 화물차로 불리는 선박으로 항만시설이나 교량 공사 등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장비다. 지난 5일 김포 대명항에서 준설토를 싣고 온 바지선 연안호가 영종도 준설토 투기장 인근에 마련된 임시 부두에 배를 붙이고 펄을 화물차에 실어 보내고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연안호를 관리하는 선원 백학기(56)씨가 선박 내 발전기 등의 장비 상태를 점검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4]선박 안전 길잡이 도선사·(하)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4]선박 안전 길잡이 도선사·(하)

조수간만차 크고 수로 복잡한 인천, 1915년 근대식 도선 도입운항중 배 옮겨타야하는 작업 해상추락 등 사고·순직 잇따라김혁식 도선사회 이사 "많은 선배들의 노력으로 발전 이뤄내"올해 5월 부산 영도구 태종대공원에 있는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서 '올해의 해기사'로 선정된 배순태(1925~2017) 전 (주)흥해 회장의 명예의 전당 헌정식이 열렸다. 그는 우리나라 1호 국가 공인 도선사다. 배순태 회장보다 앞서 도선사로 임명된 사람들은 있었지만, 국가고시로 도선사 면허를 딴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선사 국가시험이 처음 시행된 것은 1958년이다. 법에는 도선사 선발을 위한 시험 제도가 있었지만, 시험을 보지 않고 당국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도선사로 임명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해당 도선구에 이미 도선사가 있는 경우에는 정부에서 도선사 증원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배순태 회장은 자서전 '난 지금도 북극항해를 꿈꾼다'에서 "나는 법에 나와 있는 대로 정상적으로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당국에 탄원을 했고, 이런 나의 사정을 전해 들은 한국해양대학 학장을 지낸 신성모(전 국방부 장관, 1891~1960)씨가 정부에 도선사 시험을 시행해 줄 것을 주문해 나에게도 시험을 볼 길이 열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나라 첫 국가 공인 도선사인 그는 유난히 '최초'라는 기록이 많다. 선장으로 근무할 당시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했으며, 1974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에 처음 배를 통과시킨 선장으로도 기록돼 있다. 평택항 액화천연가스(LNG) 부두에 9만t급 LNG 선박을 처음 접안시킨 것도 배순태 회장이다. 도선사 출신인 이귀복 인천항발전협의회 회장은 '선구자 같은 사람'이라고 배 회장을 설명했다. 그는 "모두가 주저하는 상황이 되면 자신이 책임을 지고 앞장섰던 사람"이라며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로 도선을 성공한 기록도 많이 갖고 있다"고 평했다.배순태 회장의 성격은 인천항 갑문에 최초로 선박을 입항할 때 일화로도 잘 드러난다.당시 인천항 갑문에 선박을 통과시킬 도선사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갑문에 배를 입항시킨 도선사라는 타이틀은 매우 영광스럽지만, 사고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도선사가 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밝히면서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 도선사를 수입해 도선을 시키자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그때 도선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바로 배순태 회장이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다른 나라 사람을 데려오려 하느냐. 국가적으로 창피한 일"이라고 말하며 본인이 직접 도선에 나섰다고 한다. 배순태 회장과 10년 동안 한 회사에서 근무한 (주)흥해 박관복(63) 전무는 "다른 사람들은 여러 핑계를 대며 부담스러운 일을 맡지 않으려고 했는데, 본인이 직접 책임을 지겠다고 한 것"이라며 "인천항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컸던 분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우리나라에서 근대식 도선이 시작된 것은 1915년이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조수 간만의 차와 복잡한 수로 등으로 인해 도선의 필요성이 컸다. 이에 일본은 1915년 도선사의 역할 등을 정의한 '조선수선령'을 공포한다. 이는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던 '수선법(水先法)'을 따른 것으로, 조선총독부 해사국이 도선사 시험을 주관하고 면허도 발행했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도선업을 독점했다. 해운 행정이 일본인들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1937년이 돼서야 일제로부터 정식 도선 면허를 받은 한국인 최초 도선사가 탄생했다. 인천항에서 활동한 유항렬(1900~1971) 도선사다.우리나라 최초의 도선사이자, 일제시대 유일한 한국인 도선사였던 그는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남아있던 단 한 명뿐인 도선사였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이후 주요 구호물자를 실은 선박의 도선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30년이 넘는 도선사 생활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1947년 미 화물선 리퍼블릭호(2만5천t) 등 구호물자 등을 실은 군함과 화물선 50여 척을 인천항에 입항시킨 일을 꼽았다. 당시 구호물자를 실은 선단은 심한 풍랑 때문에 상륙을 못했다고 한다. 1970년 12월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리퍼블릭호에 올라 모든 선단을 이끌고 내항으로 들어올 때는 동포를 생각하면서 어깨가 으쓱했다"고 당시 심경을 밝힌 바 있다.1·4 후퇴 당시에는 도선사라는 책임 때문에 인천항에 있는 모든 선박을 출항시킨 다음 최후로 부산 피란길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한국명예도선사회 김수금(92) 회장은 "오래전에 은퇴해서 자주 마주쳤던 분은 아니지만 고령임에도 당당한 모습으로 배를 이끌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며 "도선 기술은 해외 어느 도선사와 견주어봐도 매우 뛰어났던 사람"이라고 했다.인천 중구 내동에는 이른바 '유항렬 저택'이 있다. 유항렬 도선사가 생전 살던 곳으로 2층에 있는 베란다는 남쪽이 아니라 서쪽인 팔미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는 유항렬 도선사가 집에서 망원경을 통해 인천항에 입항할 선박이 오는지를 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유항렬 도선사의 일곱 번째 아들 유재공(72)씨는 인천시립박물관 조사보고서(인천항 사람들)에서 "아버지는 인천항에서 여러 나라 배들의 입출항을 도와주는 일을 했기에 빨간 벽돌 이층집 내동 집에는 외국 손님도 가끔 왔다. 그 집에선 인천항이 훤히 내다보인다"고 회상했다.도선사들은 자신들이 매우 위험한 작업 환경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운항 중인 선박에 올라타야 하기 때문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게 도선사들의 설명이다. 워낙 위험한 작업이다 보니 9m 이상 올라가야 할 경우 줄사다리 대신 조금 안전한 철제사다리를 사용하도록 국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조심을 하더라도 자칫 선박과 선박 사이에 끼여 다치거나 바다에 떨어져 실종되기도 한다.인천항 갑문에는 높이 3m, 너비 80~100㎝가량의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1984년 12월 21일 한국도선사협회가 세운 도선사 기념비다. 기념비에는 '이 기념비는 유항렬 도선사가 우리나라 최초로 인천항에서 도선 업무를 개시한 것을 기념하고 또 1957년 11월 22일 도선 업무 수행 중 순직한 김선덕 도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이를 건립하다'(비문)라고 기록돼 있다.김선덕 도선사는 1957년 11월 팔미도 근해에서 도선선 난파로 조난당했다고 한다. 1985년에는 김동균 도선사가 심장마비로 숨졌고, 같은 해 차재간 도선사가 도선 수행 중 바다로 떨어져 순직하는 사고도 났다. 가장 최근에는 2004년 4월 박만현 도선사가 해상으로 추락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다.인천항도선사회 김혁식 이사는 "많은 선배 도선사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인천항과 인천항 도선사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항만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인천항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인천시 중구 내동에 위치한 유항렬 주택. 이 집의 2층 베란다는 남향이 아닌 서쪽 팔미도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지난 2012년 해기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유항렬(왼쪽 흉상) 도선사. /한국해기사 협회 제공인천항 갑문에 세워져있는 도선사 기념비.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3]선박 안전 길잡이 도선사 (상)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3]선박 안전 길잡이 도선사 (상)

500t이상 외항선 입출항할 때 탑승 의무화… 고대시대부터 관련 기록 존재무전기·레이더 활용 선원·예인선에 '방향·속도 지시' 갑문 통과·접안 도와인천항 긴 항로·빠른 조류·잦은 안개 까다롭기로 유명23년 경력 베테랑 옥덕용씨 "작업 끝내면 안도·홀가분"수십만t 규모의 선박이 그들의 손끝에서 움직인다. 승객 수천 명과 화물 수십만t의 안전이 그들 손에 달렸다. 배가 입출항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그들은 '도선사(導船士·pilot)'다.지난 15일 오후 인천 중구 역무선 부두에서 옥덕용(67) 도선사를 만났다. 1993년 도선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경력 23년의 베테랑 도선사다. 도선사는 항구에서 선박 입출항을 도와주는 '선박의 안전 길잡이'다. 우리나라 항구에 입항하는 500t 이상 외항선은 반드시 도선사가 탑승해야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주요 항구도 도선법에 따라 외항선에는 반드시 도선사가 탑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도선사의 역사는 기원전 1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고대 페니키아(현재 레바논 부근)의 '다니아'라는 항구에서 도선 서비스가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초 도선 기록은 일본 교토의 승려가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에 기록돼 있다. 이 책에는 신라의 '유당사선'이 한반도 남해안을 통과할 때, 도선사가 승선했다고 기록돼 있다.조선 시대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조운(漕運, 현물로 거둔 조세를 선박으로 운반하는 일)의 경우 선박마다 도선에 능한 사람 2~3명을 승선시켜 지휘하게 하라는 규정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도선 서비스가 시작됐는데, 1937년 인천항에서다.여러 사람과 화물의 안전을 책임지는 직업이다 보니 도선사가 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한다.도선사가 되려면 6천t 이상 선박에서 5년 이상의 선장 경력이 있어야 하며, 해양수산부가 주관하는 도선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6개월간 실무수습을 받아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20여 년 동안 외항선에서 근무한 옥덕용 도선사도 이 같은 절차를 거쳐 도선사가 됐다.이날 옥 도선사가 인천항에 입항시킬 선박은 중국 롄윈강(連雲港)에서 출발해 인천항 제2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하는 카페리선 '하모니 원강(和諧雲港)'호다. 이 배는 길이 196m, 너비 28.6m인 대형 카페리선이다. 인천 내항에 위치한 제2국제여객터미널은 갑문을 통해서만 입항할 수 있기 때문에 도선 난도가 높다.옥 도선사를 실은 도선선(Pilot boat)이 역무선 부두에서 30분 정도 달려 팔미도 인근 해상에 도착하자 하모니 원강호가 보였다. 인천 내항이나 북항, 남항에 입항하는 선박은 팔미도에서 도선사가 탑승해야 한다. 도선선이 도착하자 하모니 원강호 승무원들이 도선사 출입구를 열어줬다. 도선사는 운항 중인 배에 탑승해야 하므로 승객들이 배에 오르는 시설을 이용하지 못한다. 하모니 원강호처럼 별도 출입문을 이용하거나 줄사다리를 타고 10여m를 올라가야 한다. 옥 도선사는 "선박에 오르는 순간은 늘 긴장된다"며 "별도의 안전장치가 없어 갑자기 파도가 치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나마 카페리선은 승선 입구가 낮아 다행이지만, 초대형 유조선(VLCC, Very Large Crude oil Carrier)이나 컨테이너선은 줄사다리 하나에 의지해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배에 탑승하자마자 그는 승무원들과 함께 카페리선 맨 위 선교(브리지)에 위치한 조종실(휠하우스)로 향했다.이곳에서 만난 류치앙강(55) 선장은 "옥 도선사는 경력이 많아서 아주 능숙하다. 이미 여러 번 우리 배를 도선해 믿음이 간다"고 말하며 웃었다."인천항 VTS(해상교통관제센터) 여기는 하모니 원강호입니다. 15시 5분 도선사 승선했습니다."옥 도선사는 조종실에 들어서자마자 인천항 VTS에 승선을 보고한 뒤, 본격적인 도선을 시작했다. 선박 정보를 확인한 옥 도선사는 배의 방향과 속도를 선원들에게 지시한다. 옥 도선사는 "예전에는 해도(海圖)를 보고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월미산 등 특정 장소가 보이면 방향을 수정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레이더 등 선박 주행 설비가 잘 갖춰져 있어 쉽게 방향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천항은 도선이 매우 까다로운 항만으로 유명하다. 항로가 길고, 조류가 빠른 데다 안개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라며 "오늘은 날씨가 맑아 가시거리가 길고, 파도가 거의 없어 다행"이라고 설명했다.20분 정도 운항하자 갑문이 눈에 들어왔다. 베테랑인 옥 도선사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조수 간만의 차와 상관없이 하역 작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만든 36m 너비의 갑문은 최대 난코스에 해당한다.갑문이 가까워지자 카페리선을 도와줄 예선 '뉴캐슬'호가 선미(배 뒷부분)에 붙었다.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은 카페리선은 예인선의 도움을 받아야 갑문을 통과할 수 있다. 옥 도선사가 조종실 오른쪽 끝 창문으로 이동했다."뉴캐슬 밀 준비. 밀어. 뉴캐슬 슬로우. 좋아요. 일자로 계속 가고 있어요."배가 일자로 갑문에 진입하지 않으면 갑문 콘크리트 벽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게 옥 도선사 설명이다. 이 때문에 도선사 지시에 맞춰 선장과 승무원, 예선이 모두 힘을 합쳐야 갑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갑문 폭이 워낙 좁아 멀리서는 좌우 폭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며 "1m만 차이가 나도 갑문에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최대 고비인 갑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배를 접안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관문이 남아 있다. 인천 내항은 다른 항만보다 부두가 좁고, 계류 중인 선박도 많아 갑문 통과 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한다. 옥 도선사는 선박 좌우를 부지런히 오가며 양옆에 있는 자동차 운반선과 화물선과의 거리를 확인했다.승선한 지 2시간여 만에 하모니 원강호는 내항 4부두에 안착했다. 옥 도선사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배를 도선했지만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면 안도감과 홀가분함이 온몸을 감싼다"고 말했다.40여 년 동안 배를 탄 옥 도선사는 올해 말 정년 퇴임을 맡는다. 그는 인천항 도선사 43명 가운데 최고참이다. 그는 "항해사부터 선장까지 단계적으로 배를 타면서 현재 위치(도선사)에 이르렀다는 것, 항만시설 안전과 선박 운항 효율에 이바지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퇴임하는 날까지 안전한 인천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가 인천 내항에 들어온 카페리선 하모니 원강호를 부두에 안착하기 위해 무선으로 예선에 지시를 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길이 196m, 너비 28.6m인 대형 카페리선 하모니 원강호가 36m 너비의 갑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가 팔미도 인근 해상에서 하모니 원강호로 옮겨타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 (사진 오른쪽)와 류치앙강 선장이 인천항 갑문까지의 항로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옥덕용 도선사가 "항해사부터 선장까지 단계적으로 배를 타면서 현재 위치(도선사)에 이르렀다는 것, 항만시설 안전과 선박 운항 효율에 이바지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2]안전 서포터 `예선(曳船)`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2]안전 서포터 '예선(曳船)'

수십만톤까지 이르는 화물선·크루즈·카페리 등 입항 도와갑문 통과·접이안, 1~5척 투입 밧줄 연결·정밀하게 이끌어1974년 갑문 준공이후 활약… 항만 성장 함께 중요성 늘어영종대교·연륙교 같은 해양건설현장 이동·지지 작업 맡아인천서 가장 많이 건조되는 예선, 선장의 절반도 인천 출신지난 10일 인천항 북항 SK인천석유화학으로 입항한 유조선 'Olympic Lotalty2'호는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화물선 중 규모가 가장 크다. 30만t의 원유를 실을 수 있는 이 배는 원유를 가득 채우면 선박 자체의 무게까지 30만t을 훌쩍 넘는다. 이 배는 길이는 336m, 너비 59m로 축구장 3개를 합한 것보다 크다. 자동차가 주차할 때에는 옆 차량 또는 벽·기둥과 일정 거리를 떨어뜨려 놓는 것과 달리, 선박은 화물 하역과 승객 승하선 등을 위해 부두에 바짝 붙여 놓는다. 항만 종사자들은 이 같은 선박의 접안 방식을 '배를 붙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크고 무거운 대형 선박을 어떻게 부두에 안전하게 붙일 수 있을까. 아무리 항해 실력이 뛰어난 선장이라고 하더라도 혼자서 이처럼 큰 배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부두에 딱 붙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 바로 예선(曳船)이다.예선은 선박의 접·이안을 도와주는 배다. 화물선과 크루즈, 카페리와 같이 규모가 큰 선박은 예선의 도움을 받아 접안한다. 선박과 예선을 줄로 연결한 뒤, 예선이 선박을 끌거나 밀어 부두에 붙인다. 선박 규모에 따라 1~5척의 예선이 투입되는데, C.VISION호와 같은 대형 선박에는 5척의 예선이 달라붙는다.지난 7일 오후 인천 중구 역무선 부두에서 예선 '한창1'호가 내항 5부두로 입항하는 6만t급 자동차운반선 'GLOVIS CONDOR'호의 입항을 돕기 위해 출항했다. 내항으로 입항하는 선박은 '인천대교에서 갑문까지 들어가는 과정'과 '갑문에 들어가서 부두에 접안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갑문은 수위를 조절하는 장치로, 선박의 안전한 통항을 위해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한 항만에 설치된다.GLOVIS CONDOR호가 인천대교를 통과하자 한창1호를 비롯한 예선 3척이 접근했다. 본선에서 얇은 밧줄을 던지자 예선 승무원들이 배에 있던 굵은 밧줄과 묶었다. 본선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더욱 단단하게 고정했다.본선과 예선들이 갑문 인근에 도착하자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갑문 너비는 34m, GLOVIS CONDOR호 폭은 32m다. 이 배는 갑문을 통과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선박이다. 갑문은 긴 네모꼴 수로 모양이다. 선박은 이곳을 일직선으로 통과해야 한다. 자동차 자동세차장 기계가 작동하기 전 자동차가 정확한 위치에 앞바퀴를 놓아야 하는 것처럼, 선박도 갑문을 통과하기 전 위치를 잡아야 한다.자동차의 경우 세차장 직원이 보통 자동차의 방향을 알려주지만, 선박은 본선과 연결된 예선 3척이 밀고 당기면서 본선의 위치를 잡는다. 이 작업은 본선에 탑승해 있는 도선사의 지휘에 의해 이뤄진다."한창 스톱!" 도선사의 명령이 무전기를 통해 전해진다. 한창1호 김은수(28) 선장은 명령을 들었다는 의미로 "한창 스톱"이라고 말하고 선박을 멈춘다. 이어 "한창 밀 준비" "한창 밀고" "한창 스톱" 등의 지휘가 연이어 들려오고 김은수 선장도 명령에 따라 선박을 조작했다. 한창호 등 예선 3척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자 CONDOR호는 갑문을 통과할 수 있는 '정위치'에 서게 됐다. 예선에서 CONDOR호 선측에 물을 뿌렸다. 갑문과 선박이 스칠 경우 마찰력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CONDOR호는 무사히 갑문을 통과했고, 임무를 완수한 한창호는 역무선 부두로 향했다.김은수 선장은 "갑문 작업과 유조선 돌핀 작업은 정교함을 필요로 해 아무래도 긴장이 된다"며 "특히 돌핀 부두에 접안하는 유조선은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한다"고 말했다.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인천지부 윤덕제 사무국장은 "예선은 전후좌우로 방향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특수 프로펠러를 장착하고 있다"며 "최근 건조되는 예선은 300t 안팎의 규모이지만 5천 마력 이상의 힘이 있다. 이는 1만t급의 선박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예선의 예는 '끌 예(曳)'자다. 말 그대로 끄는 선박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예인선과 예선을 혼용해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예인선은 선박이나 구조물을 끌고 가는 선박을 일컫고 규모가 크다. 예선은 선박을 끌고 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선박의 접·이안을 도와주는 것을 주 용도로 사용한다.예선의 활용은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임금이 탄 선박을 호위하는 용도로 예선을 활용했다.조선왕조실록 정조3년(1779년) 8월 3일 기사에는 "임금이 용주(龍舟)에 타고 선상(先廂)의 장사(將士)와 용호영(龍虎營)의 장사는 용주의 왼편 예선(曳船) 밖에서, 후상(後廂)의 장사와 경기영(京畿營)의 기고(旗鼓)는 용주의 오른편 예선 밖에서 함께 용주를 끼고 거가를 호종하여 건넜다"고 기록하고 있다.인천에서 예선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1974년 갑문이 준공되고 나서다.1883년 개항 이후 인천항은 외국 선박들이 물밀듯이 몰려왔지만, 부두 시설이 열악했다. 이 때문에 선박이 부두에 정박하지 못하고 인천 앞바다에서 바지선을 통해 화물을 하역했다. 한국인 최초 세계 일주 선장이기도 한 배순태(1925~2017)씨는 저서 '난 지금도 북극항해를 꿈꾼다'에서 "갑문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외항에 닻을 놓고 바지를 이용하여 하역을 해 왔는데, 이런 하역 방식은 하역비가 몇 배나 더 들어갈 뿐만 아니라 작업의 효율성도 떨어져 시간이 많이 걸리고 위험하기까지 했다"고 했다.1974년 갑문이 운영을 시작했고, 갑문을 통과하기 위해선 예선이 필수적이었다. 이후 남항, 신항 등 외항에 접안하는 선박들도 안전한 접안을 위해 예선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에만 해도 예선은 국가가 운영했다. 1975년 항만법이 개정되면서 민간에서도 예선을 운영할 수 있게 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예선이 인천에서 나왔다. 1975년 설립된 예선업체 (주)흥해는 우리나라 최초 예선 '은성호'를 건조해 인천에서 운영했다. 지금까지도 예선은 인천에서 가장 많이 건조되고 있다.예선은 바다 위에서 이뤄지는 건설사업에 활용되는 등 많은 역할을 했다. 인천에서는 인천대교, 영종대교 등 육지와 섬을 잇는 연륙교 건설사업과 항로 준설 등 해양 공사에 활용됐다. 해상에서는 건설자재와 장비를 동력이 없는 바지선에 두고 공사를 진행하는데, 바지선을 움직이거나 한곳에 고정할 때 예선을 사용한다. 예선 앞부분에 달린 고리와 바지선을 연결해 선박을 이동시키거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흥해 박관복 전무는 "인천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간 예선을 건조한 곳이다. 지금도 예선을 건조하는 곳은 인천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고 말했다. 인천의 예선업은 활황을 이뤘고 해기사 양성 교육기관인 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예선업에 많이 진출했다. 현재 예선업 선장 중 절반 정도가 인천해사고 출신이라는 것이 예선업계 설명이다. 인천에서 교육을 받은 선장이 인천에서 건조된 선박으로 인천항 일대를 운항하는 경우는 예선업이 유일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윤덕제 사무국장은 "항만이 점차 대형화되면서 예선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며 "특히 인천은 원유와 LNG 등 화학물질 운송 선박이 많이 드나들고, 자칫 잘못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예선은 사고 예방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지난 7일 6만t급 자동차운반선 'GLOVIS CONDOR'호가 갑문을 통과하기 위해 예선의 도움을 받는 모습. 이날 '한창1'호를 비롯한 예선 3척은 도선사 지휘에 따라 CONDOR호와 로프로 연결한 뒤 선박을 밀고 끌면서 갑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왔다.5천 마력의 힘을 가지고 있는 한창1호 기계실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한창1호를 운항하는 김은수 선장의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예선은 1970년만 해도 국가 설비였다. 항만법 개정으로 민간이 예선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한국 최초 민간예선인 '은성호' 모습. /(주)흥해 제공예선은 선박의 접이안을 돕는 것이 주 역할이지만, 다른 선박에 불이 났을 때 진압할 수 있는 '타선소화설비'를 갖추고 있다. 예선의 소방훈련 모습. /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인천지부 제공예선은 해상 건설 작업에서도 유용하게 쓰인다. 예선은 바지선에 실려 있는 해상크레인 등 건설장비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예선업협동조합 인천지부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1]인천항 순찰선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21]인천항 순찰선

선박에 치명적 위협될 수 있는 폐그물·부이 제거 등 '항만 질서 유지' 역할1950년대 월미호부터 현재 해양5호까지 장비 좋아졌지만 임무 큰 변화없어인천항 성장과 함께 활동 범위 늘어나… 고된 일상에도 '안전 일조' 자부심인천항은 1883년 개항 이후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서해안 최대의 국제 무역항이자 상업항으로 끊임없이 성장했다.컨테이너 부두 등의 기능을 뒤로하고 일부 공간을 시민 친수구역으로의 변신을 준비 중인 '내항', 원목·철재·사료용 부원료 등 산업 원자재 화물을 싣고 내리는 '북항', 컨테이너 부두와 돌핀부두 등이 있는 '남항' 등을 비롯해 국제여객터미널과 연안여객터미널 등을 갖춘 환황해권의 허브 항만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급속히 증가하는 컨테이너의 원활한 처리와 북중국 항만에 대응하기 위해 최첨단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송도 신항은 인천항을 동북아를 넘어선 세계적인 수준의 항만으로 도약시키는 발판이 될 전망이다. 하루에도 수백 척이 드나드는 인천항의 '선박 안전'을 확보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항로에 떠다니는 폐그물과 부이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들도 선박 안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매일 같이 인천항 주변 해역 곳곳을 직접 살피며 선박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물건들을 처리하는 '항만 순찰선'이 없어선 안 되는 이유다."북항 입구 부근 항로에 부이가 떠다닌다는 신고입니다. 신속히 확인 조치 바랍니다."북항 인근을 지나던 예인선에서 "없던 부이가 보인다"며 신고가 들어왔다. 인천항 남항 부근을 순찰하던 인천지방해양수산청 소속 '해양 5호'가 VTS 무전을 듣고 선수를 북항 쪽으로 급히 돌렸다. 10분여 만에 신고 해상에 도착한 해양 5호 앞으로 검은색 플라스틱 부이가 떠 있었다. 부이는 '항로' 안에 있어선 안 될 물품이다. 부이에 묶여있는 그물이나 밧줄 등이 선박 스크루에 감기면 선박 표류로 이어질 수 있어 관련 법상 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부이가 가까워지자 배를 몰던 15년 경력의 김남주(46) 항해사는 전팔근(47) 선장에게 키를 넘기고 갑판으로 나가 '삿갓대'를 집어 들었다. 삿갓대 혹은 삿대로 불리는 이 기구는 성인 키의 3배 정도는 돼 보이는 긴 대나무 장대 끝에 날카로운 꼬챙이와 갈고리를 단 기구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물건들을 걸어서 배 위로 올리기 좋게 만들어졌다. 해양 5호는 천천히 부이에 접근했다. 키를 쥔 전팔근 선장과 삿갓대를 든 김남주 항해사가 수신호로 부이를 건지기 좋은 위치에 배가 놓일 수 있도록 했다. 김남주 항해사가 삿갓대를 들어 능숙한 솜씨로 부이를 걸어 올리고, 부이에 걸린 그물을 잘라 갑판 위로 끌어올렸다. 인근 해상에서만 3개 정도의 부이를 더 찾아 배 위로 수거했다. 순찰선 갑판이 금세 부이로 수북해졌다. 플라스틱이나 스티로폼으로 된 부이처럼 비교적 작은 물체들은 직접 끌어 올리지만, 원목 같은 큰 물체는 대형 부유물을 실을 수 있는 해양환경공단의 '청항선'을 불러 치울 수 있도록 조치한다. 전팔근 선장은 "원목 부두에서 원목이 바다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 장마철에는 냉장고 같은 큰 가전제품이 항로에 떠내려와 선박 안전의 위협 요소가 된다"며 "간혹 돼지나 소 같은 짐승 사체 등도 떠내려온다"고 했다.이어 "항로 상 불법 부이 단속 과정에서 부이를 설치한 어민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아 애로사항이 있다"고 했다. 신고 30여 분 만에 신고 내용을 처리한 해양 5호는 VTS 보고 후 다음 순찰지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전 선장과 김 항해사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상한 물체가 없는지 살피기 위해 연신 망원경을 집어 들었다.인천해수청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인천항 항만 순찰선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인천항의 항만 순찰선은 '월미호'였다. 10t 미만의 작은 목선이었는데, 역할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레이더와 전자식 항해지도, 야간투시용 카메라 등 최첨단 장비가 갖춰진 요즘의 항만 순찰선과는 차이가 있지만 항로에 멈춰있는 선박을 이동하게 하고, 항로에서의 어업 활동을 제한하며, 제 속도에 맞춰 운항토록 하는 등 항만 내 운항 질서 유지 업무를 하는 순찰선의 역할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갑문이 세워지기 전 현재 파라다이스 호텔 인근의 하인천 부두를 중심으로 팔미도부터 영종도까지가 월미호의 담당 순찰 해역이었다. 선박 상부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노란 배'라는 별칭이 있었다고도 한다. 60년대엔 월미호가 목선에서 철선으로 바뀌어 성능이 개량되고 1970년대에는 그 역할을 '해룡호'가 담당했다. 1980년대 들어서 '해양 1호'가 도입됐다.최광철(66)씨는 1977년부터 2010년까지 34년간 인천항에서 항만 순찰선을 몰았다. 그는 "70~80년대만 해도 인천항 항로 주변으로 어민들이 그물을 쳐 놓으면 놀래미(노래미), 병어, 우럭, 주꾸미 등 다양한 어종을 많이 잡을 수 있었다"며 "때문에 불법으로 그물을 쳐 두는 어민이 많았다"고 했다. 이어 "불법인 만큼 대부분은 단속했지만, 사정이 딱한 경우는 '다음부터 하지 말라'고 경고 정도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래도 단속을 하는 게 주된 업무인 만큼, 우리 배(순찰선)를 피하려는 어선이 많았다"며 "당시 인천항을 드나드는 배 숫자가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인천항 항로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자부심과 보람으로 최선을 다해 활동했다"고 했다.인천은 개항 이래 급속히 성장했다. 갑문이 들어서면서 인천항을 통한 해외 교역 규모는 더욱 커졌고,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를 매립한 땅엔 세계적 수준의 국제공항이 들어섰다. 배가 아니면 닿을 수 없었던 영종도엔 영종대교와 인천대교 등 두 개의 다리가 놓였고 송도·청라국제도시는 마천루를 형성하며 바다에서 바라보는 인천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인천항의 미래를 이끌 송도 신항이 들어섰고, 조만간 대형 크루즈 선박을 위한 전용 터미널도 갖춰진다. 이런 변화는 항만 순찰선이 감당해야 할 영역을 확장시켰다. 1980년대만 해도 1척이었던 인천항 항만 순찰선이 최근엔 4척으로 늘어났다.전팔근 선장을 비롯한 해양 5호 승무원들은 하루 한 차례 이상 인천대교 북쪽부터 영종대교 남쪽 해역까지 순찰하고, 정박 중일 때도 상황이 발생하면 출동해 조치한다. 힘든 일상일 수밖에 없지만, 인천항의 선박 안전 확보에 일조한다는 생각에 순찰 활동을 멈출 수 없다. 김남주 항해사는 "바다 위에서 하는 일인 만큼 파도나 안개 등 변수가 많아 위험하지만, 인천항을 오가는 화물선 등 각종 배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며 활동하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더욱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순찰선 해양 5호 안에서 김남주 항해사가 인천항 항로에 불법 부유물이 없는지 쌍안경으로 확인하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항 항로를 순찰 중인 해양 5호에서 본 인천항 모습. /경인일보DB김남주 항해사 등 해양 5호 승조원들이 '삿갓대'를 이용해 불법으로 설치된 부이를 건져 올리고 있다. /경인일보DB인천지방해양수산청 소속 항만 순찰선 '해양 5호'. /경인일보DB2011년 도입된 항만 순찰선 '해양 3호' 모습. /경인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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