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9(끝)]남과 북을 잇는 뱃길의 시작 인천항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9(끝)]남과 북을 잇는 뱃길의 시작 인천항

'서울-평양 인접' 입지·수도관문 역할 비슷… 분단 전에도 교류 활발구호물자 운송 등 남북 오가던 유일한 정기항로, 2011년이후 올스톱北 해외연결된 항로 없어… 경협 재개땐 황해 물동량 환적 선점기회남북이 그동안 얼어붙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기지개를 켜는 화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인천항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인천에서는 남북 교류의 중심으로서 인천항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평화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인천항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찾는 세미나 또는 포럼이 앞다퉈 열리고 있다. 남북 경제협력의 핵심 거점 항만 구실을 할 인천항의 가치와 중요성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인천항의 닮은꼴 남포항인천항이 남한의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면, 남포항은 북한의 수도 평양의 관문이다. 인천항과 남포항은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닮았다.남북이 본격적으로 경협에 나선다면 수도를 배후에 둔 인천항과 남포항의 역할도 자연스레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천항이 남북 해상 교류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인천항은 서울 경계와의 거리가 불과 20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고속도로와 철도 등 교통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남포시 또한 평양의 위성도시로, 도로·철도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남포항은 평양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45㎞ 떨어진 대동강 하류의 서해안에 위치한다. 평양화력발전소·남포화력발전소와 인접해 있어 전력 공급도 원활한 항만이다. 그래서 북한 제1의 항구로 불리는 남포항은 남북 경협의 가장 중요한 항만으로 꼽힌다. 두 항만은 서해의 조수 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 표참조서로 닮은 두 항만은 분단 이전에 교류가 활발했다.일본인 저널리스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편찬한 '인천개항 25년사'를 보면, 인천항과 남포항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개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곡류와 일본 혹은 청국에서 수입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지금 방식으로 말하면 인천항은 남포항에서 중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일본에서 수입하는 화물이 모이는 환적항 또는 허브항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인천항, 북으로 가는 바다 관문남북이 교류해야 할 때마다 인천항은 북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대표적인 사례가 1984년 남한에 큰 수해가 발생해 북한이 인도적 차원에서 남한을 지원했을 때 북이 보낸 구호물자 일부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1984년 8월 31일부터 나흘 동안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내려 서울·경기 등에서 9만3천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최악의 홍수가 발생하자 북한은 방송을 통해 수재민 지원을 제의했다. 쌀, 옷감, 시멘트, 의약품 등을 구호물자로 보내겠다고 북은 제안했다. 남측은 북의 제안을 수락했고, 그해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판문점·인천항·북평항을 통해 북에서 보낸 구호물자가 도착했다. 그때 인천항으로는 시멘트를 실은 북한 배가 들어왔다. 북한이 남한에 인도적 차원에서 구호물자를 지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우리 정부나 민간단체가 인도적 차원에서 구호물자를 북으로 보내야 할 때 인천항에서 배가 떴다.2010년 이른바 5·24 조치 이전까지 인천항~남포항 바닷길은 사실상 남북을 오가는 유일한 정기항로였다.한반도 분단 이후 인천항과 남포항을 오가는 항로가 개설된 것은 1998년 8월 24일이다. (주)한성선박은 홍콩에서 3천t급 세미 컨테이너선 '소나'호를 빌려 월 3회 정기운항했다. 인천항~남포항 항로 정기화물선 운항은 남북 당국의 해운사 선정에 대한 입장 차로 2001년 1월 4일 중단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당시 북측은 후발 주자인 남측의 람세스물류(주)를 제외한 다른 해운회사 소속 선박의 남포항 입항을 거부했고, 남측은 람세스물류가 운항 질서를 어지럽히고 물류비를 상대적으로 높게 책정한다는 이유로 운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운항하지는 않았지만, 이 무렵 인천항~남포항 항로 내항 화물 운송사업을 신청한 업체가 7~8곳이 될 정도로 경쟁이 심했다.인천항~남포항 정기화물선 운항이 재개된 것은 2001년 4월 22일이다. 국양해운이 용선한 러시아 선적 '미누신스크'호(2천360t급)가 남포항을 향해 인천항에서 출발하면서다. 이후 통일부가 정책을 바꿔 남북 해상 항로를 운항하는 선사는 사업 승인에 앞서 운항 합의서 등 북한과 합의한 증빙 서류를 제출할 것을 의무화함에 따라 과당경쟁은 사라졌다. 통일부에서 제시한 조건을 맞춘 국양해운은 2002년 2월 '트레이드포춘'호(4천500t급)를 신규 투입해 주 1회 정기운항을 시작한다.# 트레이드포춘호와 인천항국양해운이 2002년 인천항~남포항 항로에 투입한 트레이드포춘호는 매주 한 차례 남과 북을 오가며 남북 경제협력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남북을 오가며 컨테이너 6만3천552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와 벌크화물 15만2천96t을 운송했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는 섬유류, 화학, 전자·전기제품 등이 실렸고, 북에서는 농수산물, 광물자원, 바닷모래 등을 주로 싣고 돌아왔다. 쌀과 밀가루, 분유, 의류 등 민간단체들의 대북 지원 물품도 대부분 트레이드포춘호를 통해 북에 전달됐다.국양해운은 인천항~남포항 항로 서비스 개시 이후 적자를 기록해오다 2006년 첫 흑자를 냈다.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2010년 천안함 사건에 대응해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트레이드포춘호는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고 결국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다. 2012년 폐선됐다.인천항만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화해 분위기 속에 남북 경협이 재개된다면 인천항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때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국양해운에서 트레이드포춘호 운항 업무를 담당했던 최준호 장금상선 부장은 "남포항 등 북한의 항만은 해외로 연결된 항로가 없어 인천항이 북한 황해권 항만의 해외 물동량을 처리하는 환적항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며 "인천항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4월 23일 경인일보사가 주관하고 인천시와 인천적십자사가 공동 후원으로 마련한 북한 어린이 돕기 물품이 선적된 트레이드포춘호. /경인일보DB2005년 4월24일 인천항 내항처럼 갑문을 이용해 선박이 오가는 남포시 서해갑문의 전경. 제방길이가 8㎞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경인일보DB인천항 갑문을 중심으로 본 인천항 내항 전경. /인천항만공사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8]인천항 운영기관(하)-인천항만공사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8]인천항 운영기관(하)-인천항만공사

내년 4월 수도권 1호 크루즈전용터미널 개장 중~일~러 항로운영신국제여객터미널·골든하버 프로젝트 순항 '해양명소' 자리매김'300만TEU 돌파' 인천항 하역 능력 넘어서… 신항 컨 부두 개발남항 배후에 車물류클러스터 조성 중고차 판매·재생센터 등 구축2025년 인천 송도국제도시 9공구에 있는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크루즈 '심포니 오브 더 시즈'호(22만5천t급)에서 내린 9천여 명의 승객으로 북적거린다. 크루즈에서 하선한 승객들 가운데 일부는 인근에 조성된 상업·업무·레저 복합단지 '골든하버' 리조트로 향했다. 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있는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도 한중카페리에서 내린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신규 개장한 인천 신항 컨테이너 부두 1-2단계 구역에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인천항은 2025년 400만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했다. 남항에 있는 자동차 물류클러스터에서는 쉴 새 없이 차량이 수출되고 있다. 이는 인천항만공사가 목표하는 2025년의 인천항 모습이다.인천항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했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가 문을 연 지 43년 만에 이룬 성과다. 300만TEU를 달성한 인천항은 '해양관광의 메카'로 도약할 준비에 나서고 있다.우선 내년 4월 송도 9공구에 수도권 최초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연다.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 위치도 참조5천~6천명의 관광객이 탈 수 있는 초대형 크루즈가 인천항에 기항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 크루즈 전용부두는 부산 북항(22만t급), 서귀포 강정항(15만t급), 제주항(15만t급), 속초항(10만t급) 등지에 있는데 인천항이 가장 크다.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면 국내 해양관광 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내년 4월과 10월에는 크루즈 전용 터미널 개장을 기념해 롯데관광개발과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크루즈가 인천을 모항(母港)으로 하는 크루즈선을 운항한다. 모항은 크루즈선이 중간에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 아니라 출발지로서 승객들이 타는 항구를 말한다. 11만4천t급 '코스타세리나'호는 내년 4월 인천∼상하이∼후쿠오카∼부산을 운항하고, 10월에는 인천에서 출발해 상하이∼일본 후쿠오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속초에 입항할 예정이다. 이를 포함해 내년 총 22척의 크루즈가 입항해 5만500여명의 여객이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을 이용할 전망이다. 이는 올해 인천항 임시 크루즈 부두와 내항에 총 10척(여객 수 2만6천120명)이 입항한 것보다 두 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지난 18일 열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 준공식에서 남봉현 인천항만공사 사장은 "크루즈터미널은 인천이 동북아 해양관광 거점으로 도약하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자리 잡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은 내년 12월 개장한다. 인천항과 중국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10개 항로 한중카페리의 새 둥지가 될 신국제여객터미널은 지상 5층, 전체 넓이 6만7천㎡ 규모로 축구장 9개 넓이보다 크다. 현재 인천항 제1국제여객터미널(2만5천587㎡)과 제2국제여객터미널(1만1천256㎡)을 합친 면적의 1.8배에 이른다.인천과 중국을 오가는 카페리 여객 수는 2016년 92만391명에 달했다가 '사드 갈등'이 불거진 지난해에는 60만359명으로 34.8% 줄었다. 올해 들어서는 11월까지 71만9천261명의 여객 수를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인천항만공사 조주선 항만시설팀장은 "신국제여객터미널이 인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준공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를 개발하는 '골든하버' 프로젝트도 내년부터 진행된다. 신국제여객터미널 배후단지에 호텔, 쇼핑몰, 컨벤션, 콘도, 럭셔리 리조트 등을 유치하는 사업이다. 골든하버는 삼면으로 바다 조망이 가능하다. 친수 공간이 부족한 인천시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해양관광문화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 따르면 2025년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은 363만TEU에 달하지만, 하역 능력은 286만TEU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77만4천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는 하역 시설이 부족한 셈이다. 하역 시설이 부족하면 컨테이너 화물 처리 속도가 늦어져 선박과 트레일러 등 화물 운송 장비 대기시간이 길어진다. 남북 경협이 활발히 이뤄지면, 컨테이너 물동량이 최대 120만TEU까지 추가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시설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다.해양수산부는 인천 신항 1-2단계 컨테이너 부두 개발사업을 내년 초 발표되는 신항만기본계획에 반영했다. 신항만기본계획은 인천 신항을 포함해 전국 10개 항만 건설 방향을 담은 중장기 계획으로, 2040년까지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 옆에 4천TEU급 선박 접안이 가능한 선석 4개를 추가로 건설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인천항만공사는 인천항 자동차 수출 물량 유치를 위해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성 계획도 세웠다. 인천항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고차 수출항이다. 지난해 인천항을 통해 수출한 중고차는 25만2천 대로, 전국 수출 물량 28만6천 대의 88.1%를 차지했다. 올해(1~9월) 인천항 중고차 수출 물동량은 20만4천 대를 기록하며 전국 수출량(23만1천 대)의 88.3%에 달한다. 인천시와 인천항만공사는 2025년까지 인천 남항 배후단지(중구 항동 7가 82의 7 일원 39만6천㎡)에 자동차 물류클러스터를 만들 예정이다. 여기에는 중고차 판매·경매장, 검사장, 정비장, 자원재생센터, 주차장 등이 들어선다.남봉현 사장은 "인천항을 동북아 물류 허브로 도약시킬 뿐만 아니라 그동안 소홀했던 해양 관광 부분도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이 과정에서 인천 지역사회 등 관계기관과 꾸준히 소통하겠다"고 밝혔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8일 제막식을 연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의 모습. 국내 최대 규모의 인천항 크루즈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가 정박할 수 있는 430m 길이의 부두를 갖췄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공사 현장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아이클릭아트인천 남항 자동차 물류클러스터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동북아 지형을 형상화한 용을 테마로 바다와 물에 관련된 수룡 또는 해룡을 디자한 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7]인천항 운영기관(상)-인천항만공사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7]인천항 운영기관(상)-인천항만공사

개항 이래 국가가 주도해온 항만 개발·운영1990년대 후반 국제경쟁 위해 도입논의 불구정부 예산 탓·투포트 정치적 논리 밀려 방치시민들, 서명 운동등 펼쳐 2005년 출범 이뤄인천항을 관리하는 기관은 어디일까?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만시설을 구축하는 업무는 관세 사무행정을 맡았던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이 담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청 교통국 인천부가 업무를 맡았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교통부 인천해사국이 인천항 업무를 수행한 이후에는 기관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인천항의 개발과 관리·운영 업무는 모두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인천항 관리권은 2005년 7월 기업에 이관됐다. 1997년 부두운영사 제도 도입으로 민간 하역사들이 정부로부터 부두 시설을 임차해 운영한 적은 있지만, 인천항 전체 운영 권한이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업에 넘어간 건 개항 이후 처음이다. '인천항만공사'가 그 주인공이다.항만공사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관(官)이 주도하던 항만 개발과 운영을 담당한다.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물류환경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중심 항만(Hub-Port)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1999년 3월 국무회의를 통해 항만공사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재정자립도가 높았던 인천항과 부산항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인천항의 경우 기존의 정부 관리 체제로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북중국 항만들과의 경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항만공사 설립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해양수산부는 항만공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선 4천억원의 정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정부가 일정부분 예산을 보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반면,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는 항만공사에 예산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도 물류비 상승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인천시민들은 인천항 발전을 위해선 항만공사제도를 조기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시민들은 부산항과 여수·광양항을 중심으로 하는 '투 포트 정책' 등 정치적 논리에 밀리면서 20여 년 동안 답보 상태에 빠져 수도권 지역 물동량의 15%밖에 처리하지 못하는 인천항의 현실을 지적했다. 시민들은 항만공사 조기 설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등 범시민적인 운동을 펼치며 항만공사 설립을 요구했다. 인천경제정의실천연합은 2001년 7월 논평을 통해 "국가 발전을 위해선 낙후된 인천항의 개발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선 인천항이 자율권을 갖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항만공사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우여곡절 끝에 2003년 4월 항만공사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인천항만공사 설립이 확정됐다. 인천시와 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인천항만공사설립위원회'는 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출범에 합의했다. 인천시 공무원 출신으로 '인천항만공사 설립추진기획단'에서 근무했던 인천항만공사 신용주 홍보팀장은 "인천항만공사 설립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수집하느라 설립추진기획단 10명은 휴일도 없이 일했다"며 "그래도 당시에는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진다는 설렘으로 힘든 줄 몰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수익 필요한 '기업' 형태… 마케팅 적극 펼쳐물동량 크게늘어 작년 '컨 300만 TEU' 돌파신항등 인프라 예산 투자 '선순환 구조' 갖춰인천항만공사 설립은 물동량 증가와 인프라 확충 등 인천항 발전의 계기가 됐다.인천항 물동량은 빠르게 늘어났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만들어진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1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달성하는 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그런데 2013년 200만TEU를 돌파하며 물동량 증가 속도가 빨라졌고, 지난해에는 부산항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300만TEU를 넘어섰다. 2005년 인천항만공사 출범 당시 114만9천TEU였던 물동량이 지난해 304만TEU로 2.6배 증가한 것이다. 출범 당시 29개였던 정기 컨테이너 항로도 49개까지 늘었다. 여수·광양항에 이어 국내 3위였던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규모는 지난 2015년을 기점으로 여수·광양항을 완전히 따돌렸다. 해수부에서 근무하다 인천항만공사로 자리를 옮긴 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해수부에서 인천항을 관리하던 당시에는 안정적인 운영에 방점을 뒀다.인천항만공사는 공기업이라도 수익을 발생시켜야 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물동량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벌였다"며 "전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이 늘어난 부분도 있지만, 증가속도를 고려하면 마케팅 효과가 크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물동량이 늘면서 인천항의 인프라를 갖추는 공사 속도도 빨라졌다. 2012년 벌크 물동량을 처리하는 북항이 문을 열었고, 2016년에는 송도국제도시에 신항이 개장했다. 항만 활성화에 필수적인 시설이 들어서는 배후단지 면적도 2005년 47만8천㎡에서 152만6천㎡로 3배 넘게 확장됐다. 조주선 인천항만공사 항만시설팀장은 "해수부에 속해 있을 때보다 예산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프라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며 "시설 투자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창립 기념식에 참석한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는 "인천은 항공과 해운이 결합한 강점이 있는 곳이다. 이제 역사적인 인천항만공사의 출범으로 인천항이 동북아의 물류 중심 항만으로 발전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인천항만공사와 함께 인천항은 성장하고 있다. 내년 4월에는 송도 9공구에 국내 최대 규모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 예정이며, 2020년에는 신국제여객터미널도 개장한다. 2025년에는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500만TEU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김영국 여객터미널사업팀장은 "인천항만공사가 설립된 이후 신규 물동량을 창출하면서 인천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며 "인천시민들과 함께 인천항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아이클릭아트2005년 7월 인천항만공사 청사에서 진행된 현판식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가 입주해 있는 정석빌딩과 현판.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위치한 인천 신항 전경. 인천항은 신항 개장 이후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를 돌파했다.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 조감도. /인천항만공사 제공인천항만공사 캐릭터. /인천항만공사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선박에 원료·제품 싣거나 내리는 역할 출항에 맞춰 신속하게 처리 정밀성 필요컨테이너·크레인 도입으로 맞은 '위기'내항TOC통합 등 변화 겪으며 활로 찾아최근 찾은 인천항 내항 부두. 한국지엠의 신차들이 부둣가 찬바람을 뚫고 파나마 선적(船籍)의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MEDITERRANEAN HIGHWAY)'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차량 전후 30㎝, 차량 좌우 10㎝의 빽빽한 간격으로 차를 손상 없이 실어야 한다.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하다. 시간당 60~80대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작업 속도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배에서 먼저 내릴 차량을 가장 나중에 싣는 등 선적(船積) 순서도 신경 써야 한다. 이 배의 경우 총 15개 층으로 돼 있는데, 선적 순서가 뒤바뀌면 목적지에서 차량을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차량을 직접 운전해 선내에 싣는 '드라이버', 실린 차를 정밀하게 주차하는 '키커', 키커가 정확한 위치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돕는 '신호수' 등 하역원과 이들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포맨' 간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이들은 배의 크기에 따라 십 수명씩 조를 이뤄 움직인다. 이번 선적 작업엔 80여 명의 인력이 6개 조로 구성돼 투입됐다. "하역원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라고 하면, 포맨은 지휘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문제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포맨 송한섭(60) 감독은 "제품 손상 없이 계획된 물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40여 년간 하역원과 포맨 등 하역업계에서 일한 그는 "조금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벌써 40년이 됐다"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일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포맨 송한섭 감독을 비롯한 하역원들의 이번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하역원은 부두에 있는 선박에 원료 등 각종 제품을 싣거나 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칭한다. 항운노조가 하는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납세는 양곡 같은 물건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양곡은 주로 배로 운송됐는데, 이때 양곡을 배에 싣거나 내리는 일을 했던 '조군(漕軍)'이라는 하역 인부가 오늘날 하역원의 시초격으로 평가된다. 임금을 목적으로 노동을 제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지금과 비슷한 측면이 많다.1883년 인천항 개항 후 물동량이 증가하면서 하역원을 포함한 부두노동자들이 늘어났다. 항만설비의 확충으로 하역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부두노동자들도 하역산업의 전문 노동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노동력 착취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거친 하역업계는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인천항의 물동량 증가가 주된 요인이었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1962년 130만8천828t을 기록했던 인천항의 화물하역실적은 1972년 949만5천105t으로 7배 이상 늘어났다. 이듬해(1973년)엔 1천509만2천830t으로 더욱 늘었다.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생산 규모 대량화와 유통 물량 팽창이 원자재와 생산품의 수출입 확대로 이어졌다. 이후 항만에 모습을 드러낸 '기계'는 하역원들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돼 무거운 화물을 내리는 일에 투입(1966년)됐고, 고철 작업 등을 하는 마그넷(자석)도 사용되기 시작(1968년)했다. 인천항 양곡 전용부두엔 진공 흡입식 사일로(silo)가 설치(1974년)되기도 했다. 수송과 하역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온 '컨테이너'는 1970년대 초반 인천항에 모습을 나타냈다. 대한통운이 1970년 3월부터 인천항에 컨테이너선을 월 2회 정기 취항하기로 하는 등 컨테이너 운송을 본격화했다. 당시 인천항엔 1천여 명의 항만 노무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포함된 노동조합은 진정서를 내고 대량실업 방지 대책 마련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1980·1990년대 산업화에 힘입어 인천항은 수도권 최대 항만으로 성장했고 하역원을 비롯한 하역업계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2007년),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2018년) 등 변화를 거치며 인천항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인천항 내항에서 만난 경력 25년의 포맨 김종현(60) 감독은 "불철주야 주어진 작업을 성실히 하고 있지만, 컨테이너가 아닌 물동량 규모가 줄어들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말 속에선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천항 내항의 지난해 기준 벌크(비컨테이너) 물동량은 2천353만3천t을 기록했다. 10년 전인 2007년 4천250만t에 비해 절반 가깝게 줄어든 것이다. 수년째 내리막이다. 벌크 화물이 진보된 컨테이너로 흡수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이런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평택항, 군산항 등 인접 항만과의 벌크 물동량 유치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내항을 포함한 인천항 전체 벌크 물동량은 최근 몇 년째 1억1천여t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지난해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하는 등 매년 증가세를 보이는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과 대비된다.김종현 감독은 "펄프 같은 경우 대부분 인천에서 처리돼 지방으로 갔는데, 지금은 대부분 평택이나 군산항으로 빠졌고, 벌크로 들어오던 납이나 알루미늄괴(塊), 원목 등은 요새 컨테이너로도 많이 들어와 내항 물동량이 줄어드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인천항 하역과 관계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몇천 명은 될 것"이라며 "(관계 기관들은) 인천항의 (비컨테이너) 물동량 확보를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송한섭 감독은 "우리 손을 거친 제품들이 북중미든, 동남아든 해외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을 알린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껏 일해왔다"며 "더욱 안전에 신경 쓰고 '하역만큼은 인천항이 최고'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글/이현준기자 uplh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내항 부두에서 하역원들이 한국지엠의 신차를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하고 있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는 한국지엠 신차들.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호에 선적되는 차량마다 바코드를 찍어 확인하는 모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5]줄잡이와 라싱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5]줄잡이와 라싱

수천~10만t넘는 선박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비트와 연결하는 '줄잡이'과거엔 항만 공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50~100m 접안 위치 옮기기도라싱 작업자들, 컨테이너·화물 등 선적 하면서 철제기구·로프 이용해 고정파손 예방·평형 유지 '출항전 필수 업무'… 급하더라도 가장 꼼꼼하게 진행대한민국을 흔히 '통상 국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고, 지하자원이 부족하다. 이런 점 때문에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바로 '통상 국가'다. 통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항만과 선박이다. 우리나라 교역의 98%가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항운노조는 바다를 통한 교역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한다. 선박이 항만에 접·이안하는 것을 돕고, 짐을 내리고 싣는 모든 과정에서 역할을 한다.지난 20일 오전 11시 인천항 내항. 인천과 중국 칭다오를 오가는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가 입항을 위해 안벽 가까이 다가오자 등에 'Line Handling'이라고 쓰인 옷을 입은 항운노조원들이 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줄잡이' 또는 '강취방'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선박이 부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선박에서 제공하는 줄을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구조물인 '비트'에 고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 한 척의 배는 앞뒤로 각각 4~6줄을 연결한다. 적게는 수천 t에서 10만t 이상의 무게인 선박을 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줄의 너비는 10㎝ 이상으로 두껍다.작업은 선박에서 육지 부분으로 내린 줄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줄은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 이와 연결된 '오소리 줄'이라고 불리는 얇은 줄로 구성된다. 선박에서 줄을 육지로 던지면 줄잡이들이 얇은 줄을 잡으면서 작업이 시작된다. 이때 비트에 묶어야 하는 줄은 바다에 빠져 있다. 줄잡이들은 먼저 얇은 줄을 끌어당긴 뒤,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이 나타나면 비트에 연결한다. 줄 자체가 무거운 데다 바닷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두 명이 힘을 합쳐 줄을 끌어당긴다. 줄을 비트에 건 뒤에는 선박에서 장비를 활용해 줄을 잡아당긴다. 느슨했던 줄은 팽팽해진다. 이러한 작업을 배 앞 뒤에서 각각 4차례 진행한 뒤에야 접안 작업이 마무리된다.줄잡이 업무는 카페리선뿐만 아니라 작은 어선부터 유조선이나 크루즈 등 대형 선박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다만 선박의 규모에 따라서 줄의 두께와 비트에 연결하는 줄의 개수 등이 달라질 뿐이다.인천항에서 20여 년간 줄잡이 업무를 한 이성환(59) 소장도 이날 작업을 했다. 이 소장은 "밖에서 보기에는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위험하고 힘들기도 한 작업"이라며 "선박에 타고 있는 선원들과 호흡이 맞지 않으면 줄의 무게 때문에 다치는 일도 발생한다"고 말했다.인천 신항과 남항이 조성되기 이전에는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 대부분이 인천항 내항으로 입항했다. 입항하려는 선박은 많았지만, 부두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선박을 접안하기 위해서 효율적으로 공간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줄잡이들이 선박을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접안돼 있는 선박의 위치를 50~100m 옮기는 데 줄을 이용한 것이다. 고정돼 있던 줄을 해체한 다음 이 줄을 길게 늘어뜨린 뒤 이동하고자 하는 곳에 있는 비트에 고정한다. 그런 후 선박에서 줄을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이 소장은 "과거에는 워낙 내항으로 들어오려는 배가 많았기 때문에 배 위치를 조정해서 더 많은 선박을 접안했다"며 "하지만 신항과 남항 등 항만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지금은 그러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이어 "다른 작업들은 많이 기계화가 이뤄졌지만, 줄잡이 작업은 앞으로도 기계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우리 업무가 단순해 보이지만, 선박들이 안전하게 접안해야 선원과 승객이 안전하게 승·하선할 수 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항운노조가 맡은 작업 중 또 다른 하나는 라싱(lashing)이다. '고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적된 화물을 고정하지 않으면, 배가 운항하는 과정에서 화물이 움직이게 된다. 이는 화물이 파손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박의 평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박 출항 준비에 있어서 필수 작업 중 하나가 바로 라싱이다.지난 26일 오전 10시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있는 'BOX ENDURANCE'호에선 컨테이너 선적 작업과 함께 이를 고정하는 라싱이 이뤄지고 있었다. 컨테이너 라싱은 철제 기구를 이용해 컨테이너와 선박을 'X'자 모양으로 연결하는 방식이다. 이날 선박에 실린 컨테이너는 361TEU이며, 모든 컨테이너에 대해 라싱 작업이 진행됐다.라싱 작업을 진행한 조성덕(56) 씨는 "컨테이너 선박은 정시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 시간이 빠듯한 경우가 많다"며 "밤낮, 날씨를 가리지 않고 (라싱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어 "라싱은 선박 안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에 급하더라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작업을 진행한다"고 강조했다.이날 라싱 작업에 투입된 항운노조원은 30명.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 작업이 함께 이뤄지면서 평소보다 긴 2시간가량 소요됐다. 일반적으로는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컨테이너를 'X'자 모양으로 라싱하는 것처럼 화물에 따라 작업 방식이 다르다. 자동차의 경우 4개 바퀴를 이용해 줄(벨트 형태)로 선박과 자동차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고정한다.화물 선적에 이어 라싱 작업이 완료되면, 줄잡이가 선박과 부두를 연결하는 줄을 풀어 준다. 이날 컨테이너 선적과 라싱을 마친 'BOX ENDURANCE'호도 줄잡이들이 비트에 연결된 줄을 풀자 출항했다.인천항 등 전국 항만에서 기계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천 신항과 같은 컨테이너 항만은 자동화·기계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중국 칭다오항은 '자동화'된 항만이라는 점을 앞세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하던 컨테이너 고정 작업을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조성덕 씨는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처음에만 해도 수작업이 많았지만, 점차 기계로 대신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앞으로 인천항도 자동화 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선박 안전을 위한 일이고, 현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줄잡이는 선박을 부두에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 20일 오전 인천항 내항에서 인천항운노조원들이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와 부두를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지난 26일 인천컨테이너터미널에 접안한 'BOX ENDURANCE'에 선적된 컨테이너를 선박과 연결하는 '라싱' 작업을 하고 있는 인천항운노조원들. 라싱 작업은 화물의 파손을 막고 선박의 운항 안전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컨테이너 선 뿐 아니라 다른 화물을 실은 선박도 라싱작업이 이뤄져야 출항할 수 있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개항기 인천항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별다른 장비는 커녕 일자리 불안정 시달려항운노조 시초 '모군청' 조합해 취업 주선인천항운노동조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130여 년 인천항의 역사를 함께한 주역이자, 지금의 인천항을 있게 한 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은 맨몸으로 항을 드나드는 짐을 날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인천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후에는 기계화, 상용화(항만 인력 공급 체제 개편), 내항 통합 등의 고비를 극복하며 인천항 격동의 시기마다 온몸으로 맞섰다.우리나라에 부두 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건 '개항기'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어 빌어먹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로 몰려들면서다. 이들은 처음에 어민, 소농민 등 일시적인 노동에 종사했다. 항만 물동량이 많아지면서 상시적 노동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었다. 부두 노동자 특성상 일정하지 않은 작업 시간과 작업량으로 안정적인 노동 공급이 어려워지자 한국인 하역원은 중구 내동에 '모군청(募軍廳)'이라는 하역조합을 꾸려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이 하역조합이 항운노조의 시초다. 조합은 개항 이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관리하에 독점적 노무공급체제를 인정받으며 성장했다.인천 부두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본격화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부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본의 군수 물자와 수탈 물자를 하역했다. 강경애(1907~1943) 소설 '인간문제'를 보면 당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은 '고통'에 가까웠다."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어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피부를 벗기는 듯했다."일제 수탈시기 파업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산업화 접어들면서 고용대책 등 관철시켜내항 TOC 통합·경쟁 심화로 줄어든 입지정부·정치권 접촉하며 시설투자 활로모색시대흐름 맞춰 성장 "인천항의 주인" 자부부두 노동자들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수차례에 거쳐 파업을 벌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쟁의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들은 민족적 차별에 대항하고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부두 노동자들은 광복 이후 미 군정, 한국전쟁, 4·19혁명 등의 역사적 혼란기에서도 하역 작업을 계속하며 노동조합을 정비해 나갔다. 1945년 10월 부두노동자들이 '인천자유노동조합'을 창설했을 당시 조합에 가입한 노동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운송 사업을 중심으로 한 '인천부두노동조합'이 따로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 노조는 분열과 통합을 되풀이하며 세를 키워 나가다가 항만과 운수 분야 노동자들을 통합한 인천항운노조를 1981년 8월 설립했다. 1998년 경인항운노조로 명칭을 바꿨다가 2004년 인천항운노조로 다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항운노조는 '기계'와의 투쟁을 시작했다. 1966년 인천항에 지게차와 크레인이 대량 도입되면서 중량화물 하역 작업이 기계화됐다. 1968년에는 마그넷(자석) 사용으로 고철, 철제류 작업도 기계화됐다. 항만 하역의 기계화는 노동조합의 존속을 위협했다.1978년 부두 노동자로 처음 조합에 들어온 이해우(69) 인천항운노조 위원장은 "당시 맨몸으로 일할 때는 어떤 물건이든 어깨에 지고 메는 게 전부였다. 석탄도 실제로 삽으로 떠서 포대에 담았다. 만석부두에 가면 속옷만 입고 막걸리와 원당(설탕)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는데 모두 부두 노동자들이었다"고 했다. 이어 "모든 게 기계화가 되면서 몸은 편해졌지만, 이후에는 실직의 두려움에 직면해야 했다"고 했다. 노조는 '근로자에 대한 대책 없는 기계화'를 반대하고 나섰다.대표적인 사건은 1974년 사료 도매업체 대한싸이로주식회사가 인천항에 양곡 전용부두와 진공 흡입식 하역기 2기를 완공한 것이었다. 1995년 인천항운노조가 발간한 '인천항변천사'를 보면, 당시 인천항의 양곡 하역량은 20~3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대량 실직은 불 보듯 뻔했다. 인천지부는 '대한싸이로에서 필요한 노무직은 조합원으로 둘 것', '작업 단계에서 감축한 분야는 보상할 것' 등의 대책을 강력하게 요구해 모두 관철했다.오광민 인천항운노조 쟁의부장은 "기계화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어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계로 인해 손상되는 노동의 대가를 노조의 강력한 요구로 보상받아 실제로 잘리거나 임금이 감소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컨테이너 도입 등 기계화의 큰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노조는 1988년 인항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앞장섰다. 당시 노조 간부들이 "부두 노동자의 못 배운 한(恨)을 풀어보자"며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전국 항운노조 중 학교를 설립한 곳은 인천이 처음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노조위원장이 인항학원 재단의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조합원 자녀들에 대한 복리 후생도 아끼지 않았다. 일찍이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의 학비를 지원했다. 1978년부터 최근까지 1만여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2007년에는 '항운노조 상용화 개편'이라는 큰 고비를 맞는다. 상용화 개편이란 기존 조합 소속 일용직 인력을 하역 회사별로 상시 고용하도록 항만 인력 공급 체제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노조 채용 비리 재발 방지, 항만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상용화 개편을 추진해왔다. 지난 100여 년간 부두 노동자를 공급해왔던 항운노조의 독점 고용권이 모두 깨지는 순간이었다.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하역 노동자 1천700여 명 중 48%가 희망퇴직을 신청해 노조가 철회 기간을 두기도 했다. 정부가 희망퇴직 시 생계지원금을 최대 1억7천만원까지 줬기 때문이다. 2천800여 명에 달했던 전체 조합원 수는 1천 명 초반대로 추락했다. 노조는 "인천항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한발 양보해 합의를 이뤘다.최근 인천항을 두고 노조에서는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내항 TOC(부두운영사) 통합으로 부두 노동자 수가 대폭 줄어들게 될 처지인 데다, 물동량 유지·확대를 위해 평택항 및 부산항과도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항운노조는 '항만 배후단지 조성을 위한 정부 지원', '부두 임대료 인하 촉구' 등 인천항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기업 관계자, 국회의원 등을 만나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이해우 위원장은 "인천항이 수도권이기 때문에 다른 항보다 비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인천항만공사는 시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항으로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그는 "인천항운노조는 인천항의 주인"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이어 "격동의 인천항 역사와 궤를 함께하며 인천항운노조는 다른 지역 노조보다 더 빨리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하며 성장했다"면서 "앞으로도 조합원들이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노조의 목표"라고 했다.글/윤설아기자 say@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인천항운노조는 지역 내 조합원들의 후생복지시설 마련을 위해 정부에 복지회관 건립을 건의, 2006년 '근로자의집'을 개관했다. 신협, 체력단련실, 인천항운노조 사무실, 휴게실 등의 시설을 갖췄다.1903년 제물포항 건어물 하역장에서 건어물을 나르고 있는 부두노동자들. /인천항운노조 제공1930년대 인천항에서 부두노동자들이 미곡 수출품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33년 가마니를 수송하던 우마차. /인천항운노조 제공1960년대 인천항에 하역된 밀가루 포대를 소형차에 싣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1970년대 부두 내 적재한 화물을 나르고 있는 모습. /인천항운노조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국내 젓새우 70~80% 잡히는 강화도… 배에서 바로 염장해 뛰어난 품질 '전국 입소문'매년 김장철마다 북새통 이루는 외포항 수산시장, 저렴하고 맛 좋은 '추젓' 인기 높아 현대식 냉동 창고 갖춘 경인북부수협 경매장, 지역 모든 제품 거쳐가는 '유통 중심지'김장에 빠질 수 없는 젓갈의 원재료가 되는 젓새우는 인천의 바다가 선물하는 중요한 수산자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인천 강화도 인근 바다는 젓새우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강화에서 생산하는 새우젓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명품 대접을 받는다.때문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강화의 포구는 새우잡이 어선으로 들썩이고 전국 각지에서 새우젓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지난 6일 찾아간 강화군 외포리에 있는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은 김장철을 맞아 새우젓 등 젓갈을 사러 온 손님과 관광객으로 북적였다.현재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18개 젓갈 판매 매장이 성업 중이다. 새우젓을 주력으로 밴댕이, 멸치 등 어림잡아 20여 종류가 넘는 젓갈을 판매하고 있다.이날 시장에서 만난 조경숙(50)씨는 서울 강남 수서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조씨는 추젓 12㎏을 샀다. 김장 100포기를 하려면 10㎏ 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강화 새우젓이 명품이라기에 올해는 강화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아보려고 멀리까지 찾아왔다"며 "김장 맛이 좋으면 앞으로 계속 강화 새우젓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충남 논산 강경에서 젓갈을 구매해 김장을 했다고 한다.새우젓은 가을에 담근 것을 '추젓'이라고 부른다.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을 '오젓', 6월에 담근 젓을 '육젓'이라고 하고, 겨울에 담근 젓을 '동백하젓'이라 부른다.김장철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은 추젓이 인기다. 오젓과 육젓은 추젓보다 가격이 비싸다. 이날 추젓이 1㎏에 2만원, 오젓은 2만5천원, 육젓은 4만원 선에서 판매됐다.잡히는 시기에 따라 새우 크기도 다른데, 추젓은 길이가 1~2㎝, 오젓은 2~3㎝, 육젓은 3㎝ 이상 된다.짠맛의 세기를 결정하는 염도 또한 시기별로 다르다. 가장 더울 때 잡히는 육젓은 부패 방지를 위해 소금이 많이 들어가야 해 짠맛이 강하다. 오젓이 중간 맛, 추젓이 가장 덜 짜다.이곳 상인들은 강화 새우젓이 다른 어떤 지역의 새우젓보다도 품질이 우수하다고 자랑했다.중국산 등을 속여 팔다가 적발돼 홍역을 치르기도 한 다른 지역과 달리, 오직 국산만을 고집하며 믿을 수 있는 새우젓이란 이미지를 지켜 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란다.정찬요(54) 강화새우젓축제사무국장은 "우리나라 젓새우의 70~80%가 강화에서 잡히는데, 산지에서 잡아 배에서 바로 염장하는 강화 새우젓은 전국 어디보다 경쟁력이 있다"며 "국내에 유통되는 새우젓의 70~80%는 외국산으로 보면 되는데, 강화에서 사는 새우젓은 원산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젓갈 상점 곳곳에는 새우젓이 가득 담긴 드럼통이 보였다. 매장 한 곳에 진열된 물건만 수천만 원어치가 된다고 한다. 새우젓 국물이 닿지 않아 노랗게 색이 변한 부분을 '윗밥'이라고 부른다. 이 윗밥을 걷어내고 판매하는데 먹어도 상관은 없다. 따로 가져가는 곳이 있다고 한다.강화 새우젓이 명품 소리를 듣게 된 것은 강화의 자연환경과 큰 연관성이 있다. 강화도는 한강이 임진강, 예성강과 만나는 곳이다.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하고 물살의 변동이 심해 갯벌도 발달해 있다.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합류 지역이라 어종도 풍부해 큰 새우 어장이 형성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석모도에 염전이 있던 시절에는 품질 좋은 소금이 생산되면서 뛰어난 새우젓이 생산됐다고 전해진다.젓새우는 조업 방법이 크게 두 가지다.'닻배'라고 부르는 배를 이용하는 연안자망 어업 방식과 '꽁지배'를 이용한 안강망 어업 방식이다.자망 어업은 새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해 잡는 방식이다. 안강망 어업은 조석 간만의 차가 큰 지점에 자루그물을 투하해 닻으로 고정 부설한다. 그러면 새우가 조류에 의해서 자루그물 속으로 들어가 잡힌다.강화도 어민들은 젓새우에 집중하고 있지만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어종도 많이 났다고 전해진다. 과거에는 조기, 밴댕이, 민어, 병어 등을 잡는 데 주력했다. 지금은 홍어, 까나리, 농어, 숭어 등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강화부지(1783년)에는 민어, 숭어, 석수어, 새우, 가리맛조개, 굴 등이 당시 강화의 수산물로 기록돼 있다.어민들이 생산한 새우젓은 창고로 옮겨 보관 숙성된다.수산시장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는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새우젓 보관창고 겸 경매장이 있는데, 이곳이 새우젓 유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 강화도에서 생산되는 새우젓이 모두 이곳을 거친다고 한다. 인천시와 강화군 등이 5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해 2011년 완공한 수산물 처리·저장시설이다. 저온 냉장창고, 냉동창고, 급속 냉동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옛날에는 새우젓을 토굴에 보관했는데, 지금은 현대식 냉장·냉동창고 등 체계적인 방법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금은 판매를 위해 물건이 빠져나가 창고가 비어 있지만, 10월 초가 되면 창고들이 모두 새우젓으로 가득 찬다.김용순(54) 경인북부수협 판매사업소장은 "옛날에는 토굴에 새우젓을 보관하다가 이곳에 보관시설을 설치하고 장소를 옮겼다"며 "최신식 시설에서 새우젓을 잘 숙성시켜 강화 새우젓의 상품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글/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강화 새우젓은 인천의 명품 수산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가을에 수확한 젓새우로 만든 '추젓'은 김장에 빠질 수 없는 재료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지난 9일 경인북부수협이 운영하는 수산물 처리·저장 시설에 보관 중인 새우젓이 숙성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판매장 18곳이 운영 중이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아이클릭아트김장철을 맞아 시장에서 젓갈을 고르는 손님들.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낡은 시설을 고쳐 지난 2009년 새롭게 조성된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 전경.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2]인천항 관문 `갑문` (하)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2]인천항 관문 '갑문' (하)

1910년대 미곡 수출 중심으로 떠오른 인천日, 곡물 반출위해 축항… 죄수등 강제동원처참했던 공사현장 '백범일지'에도 기록돼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10월 26일. 일본우선주식회사 깃발을 단 기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사도(沙島)를 지나 바다 위 거대한 철문 앞에 멈췄다. 두 개의 갑문을 지난 배는 400m가 넘는 거대한 길이의 부두에 정박했다. 8년여 동안 진행한 인천항 축항(갑문 건설) 공사를 마무리하고 준공식에 앞서 가진 시험 운항이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30분께 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700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인천항 축항 공사 준공식이 개최됐다. 수심이 얕고 9~10m에 달하는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24시간 선박 접안이 어려웠던 인천항에 4천500t급 기선 세 척이 항상 정박할 수 있는 항만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조선총독부는 물자를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해 1911년 현재 인천항 제1부두 근처에서 갑문 건설사업을 시작한다. 1933년 발간한 인천부사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한 공사에는 391만 4천455엔이 사용됐다. 1918년 당시 일본 내 쌀 한 섬(150㎏) 가격이 10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 돈으로 300억 엔, 우리나라 돈으로 3천억 원이 넘는 예산이 사용된 셈이다.조선총독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이유는 인천항이 우리나라 미곡 수출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천항은 1910년대부터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가 됐다고 한다. 1910년대 인천에서 투기의 일종인 '미두(米豆)'가 가장 성행한 것도 인천으로 쌀이 모였기 때문이다. 미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기간 내에 쌀을 사거나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일본이 우리나라 곡물을 자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진행한 축항 공사에는 조선인이 동원됐다. 특히, 인천 내동에 있던 경성감옥 인천 분감에 수감된 조선인 죄수들이 대거 끌려갔다. 그 가운데 백범 김구(1876~1949)도 있었다. 김구는 1911년 '안악 사건'(1910년 11월 안명근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서울에서 옥살이를 한다. 1914년 39세 때 인천 감옥으로 이감돼 축항 공사 현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그는 백범일지에 '아침저녁 쇠사슬로 허리를 매고 축항 공사장으로 출역을 간다. 흙 지게를 등에 지고 10여 장의 높은 사다리를 밟고 오르내린다. 불과 반일 만에 어깨가 붓고 등창이 나고 발이 부어서 운신을 못 하게 된다. 너무 힘들어 바다에 빠져 죽고 싶었으나 그러면 같이 쇠사슬을 맨 죄수들도 함께 바다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참고 일했다'고 참담한 심정을 기록했다. 인천항 내항 1부두 동쪽과 남쪽 시설은 콘크리트로 덧씌운 탓에 옛 축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북쪽 석축은 10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석축 위로 정박한 배를 묶어 두는 계선주(繫船柱) 역시 당시 모습대로 열을 지어 서 있다. 1930년대 인천 지역에 군수공장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인천항을 확장할 계획(제2선거 건설)을 세웠다. 인천항만공사가 2008년 발간한 '인천항사'에 따르면 당시 제2선거를 계획했던 지역은 지금의 인천 북항 일대로 추정된다. 인천도시역사관 배성수 관장은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조선목재, 동양방적(현 동일방직) 등 군수 물자 보급을 위한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많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제2선거 건설 계획은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공사 비용을 확보하지 못해 백지화됐다.경제개발로 화물 급증 1974년 새 갑문 준공한계 넘는 선박 드나들며 산업화 견인 역할역사적 명암 공존 '100년사 기념' 가치 충분일본이 시작하지 못한 공사는 1960년대 우리 정부에 의해 추진됐다.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1965년 서울 구로와 인천 부평·주안에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가 차례로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화물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0년 46만 6천259t이었던 인천항 물동량은 1969년 279만 8천t으로 600%나 올랐다. 인천연구원 김창수 도시경영센터장은 "당시에는 육로 운송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산 등 다른 지역까지 화물을 운반할 여건이 충분하지 않았다"며 "구로, 부평, 주안 등 공장에서 필요한 원자재 가운데 대부분이 인천항으로 수입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1974년 현재의 갑문이 만들어지면서 인천항은 컨테이너 하역 전용 부두인 4부두를 포함해 2부두와 3부두 등 5만t급 이상 대형 선박들을 동시에 접안해 하역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다. 항만 인프라가 만들어지면서 인천항 물동량도 급증했는데, 1979년에는 2천 400만t의 물동량을 처리했다.1980년대 들어서면서 인천항 물동량이 3천만t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갑문은 항상 배들로 가득했다는 게 당시 근무자들의 설명이다. 1978년부터 인천항 갑문에서 근무한 김익봉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장은 "인천항 갑문에 하루 50척의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데, 58척의 선박이 통항한 적도 있었다"며 "인천 앞바다와 내항 안에는 갑문을 이용하려고 대기하는 선박이 항상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입출항 선박이 너무 많아 갑문을 거의 온종일 열어 놓다 보니 내항의 물이 계속 줄어들어 수심이 낮아지는 현상까지 벌어졌다"며 "내항이 일정 수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외항의 물을 내항으로 공급하는 공사도 실시했다"고 덧붙였다.지난달 27일은 인천항 갑문이 처음 만들어진 지 100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인천 지역에서는 별도의 행사 없이 이를 조용히 지나쳤다. 현재 남아있는 갑문이 100년 전 만들어진 것도 아닌 데다, 일제 수탈의 역사를 굳이 기념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인천항 갑문의 축조일은 역사적으로 기념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지적한다.김창수 센터장은 "인천항 갑문은 100년 전 조선인의 피땀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한 시설"이라며 "명암이 함께 공존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갑문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는 일은 인천시 등 관계 기관이 반드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1918년 완공된 인천항 갑문에 선박이 입항하는 모습. 초창기 갑문은 현재 운영되는 '슬라이딩 게이트(미닫이)' 방식이 아닌 '마이터 게이트(여닫이)' 형태로 제작됐다.1911년 인천항 축항공사에 동원된 인천 내동 경성감옥 인천 분감 조선인 죄수들 모습. /인천항운노동조합 제공1918년 10월 27일 열린 인천항 축항공사 준공식 모습./인천항만공사 제공현재의 갑문이 지어지기 전인 1966년 인천항 전경.1974년 인천항 갑문타워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모습. /인천항만공사 제공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1]인천항 관문 `갑문` (상)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1]인천항 관문 '갑문' (상)

"NGB 인천대교 통과. 10시 20분에 갑문 도착합니다."지난달 19일 오전 10시 10분께 인천항 갑문 관제탑에서 무전이 울렸다.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에 탑승한 도선사가 보낸 것이다. 'NGB'라고 지칭된 이 선박은 인천항과 중국 웨이하이(威海)를 오가는 3만 1천t급 대형 카페리선 '뉴골드브릿지7호'. 인천 내항에 있는 제2여객터미널에 입항하려면 반드시 갑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갑문 관제탑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10시 20분께 뉴골든브릿지7호가 갑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갑문 주변에는 경고음이 울렸고, 1천50t에 달하는 외측 갑문이 천천히 열렸다. 배가 갑거(수로)에 완전히 진입하자 외측 갑문이 닫혔고, 배에서 내린 4개의 줄을 줄잡이들이 고정하기 시작했다.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 강석현 차장은 "내항과 외항의 수면 높이를 맞춰야 한다. 수로에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배가 흔들려 갑벽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에 배를 고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배가 고정되면 수로에 물이 들어온다. 이날 10시 20분께 외항의 수위는 4.7m. 내항의 해수면 높이는 최소 7m로 유지되기 때문에 수로에서 내항과 외항의 수위를 맞춰야 한다. 강 차장은 "내항의 수위가 높은 경우에는 내항 쪽에서 (수로로) 물을 보내고, (배가 수로에 들어온 후) 외항의 수위가 높으면 바다 쪽 외항으로 물을 흘려보낸다"고 했다.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9~10m의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해야 했다. 썰물 때 갯벌이 훤히 드러날 정도여서 큰 배는 물론 작은 배도 인천항에 접안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선박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으면 작은 배가 다가가 사람과 짐을 날랐다.김탁환과 이원태가 쓴 소설 '아편전쟁'에서도 이 같은 초창기 인천항의 모습이 묘사된다.'인천은 수심이 얕고 아직 부두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 상선이 곧바로 바닷가에 닿지 못한다오. 바닥이 평평한 짐배가 나가서 상선에 붙소. 승객과 상품을 짐배에 옮겨 싣는 게요.'인천항을 통한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일본은 만조와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시설을 원했다. 이에 1911년 항만 설비 확장 공사를 시작했고, 1918년 10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갑문이 인천항에 설치됐다.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당시 7~8%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인천항의 화물 증가 추세는 이보다 3배가 넘었다고 한다. 경인 공업지역의 원자재와 소비재 물동량이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당시 갑문 안쪽의 인천항 시설은 4천500t급 3선석에 불과해 수도권 지역 물동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정부는 1964년 인천항 갑문 제2선거 공사에 착수했고, 1974년 현재의 인천항 갑문이 설치됐다. 100년 전 축조한 갑문은 바닷속에 가라앉았다. 현재는 인천 내항 1부두 주변에서 일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항 갑문은 최대 길이 306m, 너비 32m를 가진 선박이 이용할 수 있는 5만t급과 길이 215m, 너비 19m 선박이 이동하는 1만t급 등 총 2개 수로로 운영되고 있다.갑문 축조와 내항 확장으로 안정적인 하역 환경이 조성되면서 인천항의 수출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천항사'에 따르면 인천항의 수출액은 1973년 3억 1천791만 3천 달러에서 갑문 완성 이듬해인 1975년 5억 9천941만 8천 달러로 급증했다. 1978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2004년 인천 남항이 개항하기 전까지 인천 내항은 몰려드는 배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해양수산부가 1999년 펴낸 '수도권 항만 기능정립·재정비계획'을 보면, 수도권 화물의 인천항 폭주로 인천항의 체선·체화 현상이 가장 심했던 때는 1990년이다. 그해 체선율은 48.2%였다. 체선율은 선박이 부두에 접안하지 못하고 12시간 이상 대기한 선박의 비율을 말한다. 100대 중 48대가 12시간 이상 기다렸다가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던 셈이다. 인천항의 체선율은 전국 항만 중 가장 높았다. 당시 평균 체선 시간은 70시간 정도로 길게는 일주일 이상을 바다에서 대기해야 갑문을 통해 인천항에 들어올 수 있었다.인천 남항에 이어 북항, 신항까지 문을 열면서 내항을 찾는 선박은 줄어들고 있다. 인천항만공사에 따르면 인천항 갑문을 입출항하는 선박은 2005년 1만 3천140척을 정점으로 계속 감소하고 있다. 벌크화물 하역항인 북항이 개항한 2010년 8천395척, 컨테이너 전용부두인 내항 4부두가 가동을 멈춘 지난해에는 5천 52척만이 갑문을 이용했다. 2005년에 비해 60% 이상 입출항 선박이 줄어든 셈이다. 지난해 물동량도 내항 하역량이 가장 많았던 2004년(4천529만t)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2천353만 3천730t으로 떨어졌다. 하역 장비의 발달로 수심과 관계없이 선박에서 짐을 싣고 내릴 수 있다 보니, 30분 이상 걸리는 갑문을 출입하기 꺼리는 것이다.하지만 갑문 속에 있는 내항은 아직 항만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는 게 갑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설명이다. 1978년부터 갑문에서 근무한 인천항만공사 김익봉 갑문운영팀장은 "갑문은 24시간 해수면 높이가 일정하고, 물이 잔잔하기 때문에 정밀기계나 자동차 하역에 적합한 항구"라며 "인천항 발전을 이끌어온 항구라는 자부심을 품고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인천항 갑문으로 3만1천t급 대형 카페리선 뉴골드브릿지 7호가 들어오고 있다. 인천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9~10m의 조수 간만 차이가 있어 갑문 운영이 필수적이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갑문 관제탑 모습.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인천항 갑문 관제실. 이곳에서 인천 내항과 외항의 수면 높이를 조절한다.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0]연평도 꽃게잡이

[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0]연평도 꽃게잡이

조기 인기에 밀려 그냥 버리던 찬밥1960년대 들어서 '대표수산물' 등극장비 열악했지만 작은배 가득 채워中불법조업 등 남획탓 어획량 급감'어민들 주 수입원' 자원 보호 시급국내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꽃게'를 검색하면 관련 검색어에 인천 옹진군 '연평도'가 나온다. 연평도를 검색하면 '연평도 꽃게'가 관련 검색어로 뜬다.서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꽃게는 인천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특히 인천 앞바다 서해 5도 중 한 곳인 연평도는 꽃게 산지로 유명하다. 인천 소래포구 어시장이나 인천종합어시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꽃게가 한가득 담겨 있는 통과 그 앞에 적혀 있는 '연평도산'이라는 팻말이다.꽃게는 봄철과 가을철에 잡힌다. 봄철에는 알이 가득 배 있는 암꽃게가 주로 잡히며 암꽃게는 주로 게장을 담가 먹는다. 한정식에서 빠지지 않는 간장게장은 암꽃게로 만든다. 가을철에는 찜이나 탕으로 해먹는 숫꽃게가 살이 많고 맛도 좋다. 여름철은 꽃게 산란을 위해 금어기로 지정돼 있다. 가을철 꽃게잡이는 8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이뤄진다. 수온이 내려가면 꽃게가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어민들은 어획 활동을 하지 않는다.지난 11일 새벽 5시 40분 연평도 당섬선착장. 해가 뜨기 직전이라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꽃게잡이 어선들이 켜 놓은 조명들이 선착장 주변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전날 풍랑주의보로 출항하지 못한 어선들이 만선을 기대하며 출항 준비에 한창이었다. 9.8t급 자망 어선인 '정복호'도 출항 준비를 마쳤다. 6시가 조금 지나자 20여 척의 어선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키를 돌렸다. 정복호는 연평도 남서쪽 해역으로 향했다.정복호 유호봉(60) 선장은 1990년대 초부터 연평도에서 꽃게잡이를 했다. 중간에 강원도나 전라도 앞바다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 연평도에서 꽃게잡이 어선을 탔다. 자망 어선은 선원 6명과 선장 1명이 한 조로 일한다. 너비 5m 길이 500m의 직사각형 모양의 그물을 바다에 수직으로 펼쳐놓은 뒤 며칠 있다가 걷어 올리는 방식으로 조업한다. 그물과 연결된 굵은 밧줄을 끌어올리는 것은 선박에 설치된 장비를 이용하지만, 그물과 밧줄을 끊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물을 연결해 바다로 던져 넣는 작업은 선원들이 역할을 나눠 진행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선원 간 호흡이 어긋나면 밧줄이 선원들을 덮치는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작업 과정에서 선장은 선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지시하기도 했다. 유호봉 선장은 "바다 위에서는 항상 긴장해야 한다. 작업 과정에서 말을 험하게 하는 이유도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이날 오전 6시 50분. 40분 이상을 내달려 도착한 바다에서 첫 그물을 끌어올렸다. 꽃게는 그물에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그물을 20~30분간 끌어올렸으나 그물 한가득 꽃게가 매달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선원들은 한목소리로 "꽃게잡이가 예년만 못하다"고 했다. 점점 꽃게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어선의 불법 조업이 꽃게잡이 어획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때보다 중국어선이 많이 줄었지만 꽃게 어획량은 여전히 늘어나지 않고 있다고 했다.유호봉 선장은 2008년 4월 중국어선을 직접 나포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우리 어선 30여 척이 연평도 앞바다까지 내려와 있는 중국어선을 직접 나포한 것이다. 어선 4척이 한 조가 돼 중국어선을 쫓았다. 직접 중국어선에 올라가 선원들을 붙잡고 해양경찰에 인계했다. 그는 "당시 중국어선이 한 번 지나간 자리는 고기 씨가 마를 정도로 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자원 보호를 위한 조치를 더 강하게 취해야 한다"며 "이곳에서 살게 될 후손들을 위해서도 지금보다는 더 자원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꽃게가 인천의 대표 수산물이 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인천에서 꽃게를 잡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 전이라는 게 연평도 어민들 이야기다. 이전까지만 해도 연평도의 대표 어종은 '조기'였다. '조기 파시'라고 불릴 정도로 전국의 어선들이 봄철이면 연평도로 몰려들었다. 한때 1천여 척이 넘기도 했다. 이때에는 꽃게가 그물에 걸려 올라와도 모두 버렸다고 한다. 어민들은 조기로 큰돈을 벌어들였고, 이 때문에 술집과 기생집 등도 연평도에 넘쳐났다.경향신문은 1962년 5월 14일자 기사에서 "조기잡이의 '골든타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연평도를 중심으로 한 어장 일대는 어선 1천200여 척과 어민 1만여 명이 숨가쁜 준비 태세 속에서 조기잡이 '붐'을 이루며 북적이고 있다"고 보도했다.연평도 주민 강유선(75·여)씨는 "꽃게잡이를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 이후로 기억한다"며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기 힘들자 어민들이 2년 정도는 흑산도 등 남해로 내려가 조기잡이를 하기도 했다. 이들이 연평도로 다시 올라와 꽃게잡이를 시작한 것이 60년대 중후반 정도"라고 말했다.강씨는 당시 잡았던 꽃게를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져다가 팔았다고 한다. 배를 10시간가량 타고 인천항에 도착한 뒤 경인전철을 타고 노량진으로 향했다.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상한 꽃게는 중간에 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강씨는 "조기잡이 때에는 중국과 일본 상인들이 연평도에 와서 조기를 샀다. 무역이 이뤄진 것"이라며 "하지만 꽃게잡이를 시작했을 때에는 판로가 없어 노량진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인천에 어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라고 했다.1960년대만 하더라도 어선의 규모는 작았다. 어획 방식은 자망 방식으로 지금과 비슷하지만, 장비가 열악해 그물을 끌어올리는 것은 모두 선원들의 몫이었다. 이 때문에 그물의 크기도 100m 정도로 짧았고, 걷어 올릴 수 있는 그물의 수도 적었다.연평도에서 30년 넘게 배를 탄 노영철(68)씨는 "예전에는 꽃게가 그물에 한가득 걸리는 날이 많았다"며 "처음에는 참나무로 된 닻을 만들어 조업을 하기도 했는데, 배가 작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차재득(78)씨는 "점점 꽃게 먹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느낀다. 단적으로 예전보다 바다에 수초가 줄었다"면서 "꽃게의 먹이가 되는 작은 물고기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남획이 불러온 결과"라고 강조했다.서해수산연구소에 따르면 인천 해역 꽃게 어획량은 1990년 처음 해당 통계를 집계한 이래 2009년 1만 4천675t을 기록했으나 점차 줄어 2015년 1만t, 2017년 5천723t 등 계속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꽃게 어획량이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연평도 어민들의 주 수입원은 꽃게다. 당섬선착장 인근과 마을 곳곳에서는 주민들이 모여 꽃게 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물과 꽃게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1척의 배에서 잡아온 꽃게를 그물에서 떼어내는 데 10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한다.글·사진/정운기자 jw33@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지난 11일 정복호 선원들이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꽃게 잡이를 하고 있는 모습. 연평도 인근 해역은 국내 대표 꽃게 산지로 이름이 나 있으며 꽃게는 연평도 어민들의 주 수입원이기도 하다. /경인일보DB정복호 유호봉 선장. /경인일보DB연평도 당섬선착장 인근에서 꽃게를 분류하는 모습. /경인일보DB1950년대 연평도의 모습. 조기잡이를 위해 전국에서 어선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는 꽃게가 그물에 걸려 올라와도 버렸다고 한다. /강유선씨 제공연평도 앞 바다에서 잡아 올린 꽃게를 그물과 분리하는 모습. 분리 작업은 선원들이 아닌 연평도 주민들이 맡아서 한다. /경인일보DB소래포구 어시장에서 꽃게를 판매하는 모습. /경인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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