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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8]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 할아버지(上)

김민재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7-05-11 제17면

전쟁도 터지기전에
반동분자 '낙인'
고향 떠나 목숨 지켰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창일 할아버지 인터뷰3
황해도 재령군 출신 실향민 김창일 할아버지가 인천 중구 용동 자택에서 고향을 떠나 인천에 정착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300마지기 논 유복한 집안 둘째 도련님
北 '농지 몰수' 토지개혁과 현물세 반발
총살 위기 속 지인 도움에 홀로 '평양行'
정세 좋지 않아 고향 친구따라 부산으로

남겨진 가족은 인민군 동생덕에 살아남아
형·아내 피란 소식에 인천 왔지만 못찾아
유격대에 뜻모아 북한침투 죽을 고비넘겨
아내와 극적 상봉후 정착위해 공무원 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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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재령 출신 김창일(91)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지기도 전에 이미 북한에서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혀 가족을 등지고 홀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1926년 2월생인 김창일 할아버지는 재령군 서호면 신환포리에 300마지기 논과 정미소를 가지고 있는 유복한 집안의 둘째 도련님이었다.



정미소가 곡창지대인 안악과 신천, 재령이 만나는 곳에 있어 할아버지의 집에는 늘 일꾼이 넘쳐났다.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할아버지가 전쟁 전 고향을 떠난 이유는 1945년 해방 이후 들어선 북한 정권의 토지개혁에서 출발한다.

'농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세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 불로(不勞)지주로부터 농지를 무상 몰수해 소유권을 농민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역사문화연구소가 낸 '북한의 역사'를 보면 당시 북한의 전체 경지면적 182만98정보 가운데 55.4%에 해당하는 100만8천178정보가 몰수됐다.

김창일 할아버지 집안의 논도 몰수 대상이었다. 졸지에 땅을 빼앗긴 지주들은 북한의 토지개혁을 반대했지만 많은 수의 소작농들은 토지개혁을 환영했다.

이렇게 토지개혁으로 땅을 얻은 가난한 농민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기반 세력이 됐다.
월북작가를 비롯한 지식인 계층도 북한의 토지개혁을 찬양해 힘을 더했고 토지개혁에 반발하는 지주들은 반동분자가 되었다.

1946년 북한으로 넘어간 소설가 이태준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쓴 소설 '농토'를 통해 해방 후 토지개혁이 진행되는 북한 농촌사회의 모습을 그려냈다.

"왜놈들만 물러갔으면 뭘 허는 거유? 세상이 공평하게 돼야지. 조선놈끼리 또 압제나 허구 또 착취나 하는 세상이면 우리 같은 건 밤낮 마찬가지지 뭐요? 토지개혁은 누구나 먼저 사람으루 똑같은 사람이 되구, 누구나 다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터 닦는 거요 이게!" 소설 주인공인 소작농 억쇠가 토지 개혁의 취지를 설명하며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연중기획 실향민 김창일 할아버지 인터뷰5

땅을 빼앗긴 김창일 할아버지네 집안은 현물세라는 이중고를 겪었다. 동아일보가 1949년 1월 연재한 '이북독재의 현실'이란 타이틀의 기획 시리즈를 보면 북한은 자작농에게서 쌀의 25%를 현물세로 받아가고 부역에 강제 동원했다.

현물세로 거둔 쌀은 대부분 소련으로 흘러갔다는 기사도 있다. 가혹한 현물세와 부역을 견디지 못해 반항한 지주들은 처형당하거나 탄광으로 끌려갔다. 현물세는 땅을 뺏긴 지주계급이나 새로 땅을 얻은 농민들이나 마찬가지 고충이었다.

재령군민회가 1999년 편찬한 '재령군지'에도 "8·15 해방과 함께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해 한 약탈행위는 천인공노할 사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백성을 괴롭힌 것은 현물세라는 명목으로 양곡을 수탈해간 것이다. 1946년 (재령군) 신원면사무소에는 농민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양곡이 창고마다 가득 차 있었고 기타 노적한 것은 5천여 가마니나 있었다. 소련군은 매일 기차와 군용트럭으로 운반해 가져가는 바람에 면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한 군민회원의 증언이 나온다.

그 회원은 또 "의혈청년들이 현물세 창고와 벼 5천 가마에 기름을 붓고 방화했다가 체포돼 주동자가 사형을 당했다"고 회고했다.

땅을 빼앗긴 지주들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월남을 선택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이 논의됐는데 우익세력이 우위를 점하면서 북한과 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 대신에 1949년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농지개혁법)을 단행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김창일 할아버지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어느 날 북한의 토지개혁과 현물세에 반발했다가 내무서에 끌려가 총살을 당할 처지에 몰렸다.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에게 생명의 은인이 나타났다.

내무서의 간부급 직원이 몇 년 전 할아버지를 중매까지 해준 집안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내무서 간부는 할아버지를 밤에 몰래 풀어줬고 평양으로 가는 통행증도 써주었다. 곧바로 해주로 달아난 김 할아버지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 고향 재령에 부모와 형제, 부인을 남겨두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평양에서 홀로 전쟁을 맞았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에 성공한 국군은 1950년 10월 19일 북한의 수도 평양을 탈환했다. 평양시청 앞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열렸고 이승만 대통령이 그해 10월 30일 평양 땅을 밟았다.

지인의 소개로 평양의 구두공장에서 일하며 숨어지내던 할아버지도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마음에 평양시청 앞으로 나갔다.

프랑스 '르 피가로'지 특파원 세르주 브롱베르제(Serge Bromberger·1912~1986) 등 한국전쟁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에 따르면 당시 평양 사람들은 집 안에 걸어뒀던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길바닥에 내던지고 짓밟았다.

또 봇짐에 허리 휜 여자들이 평양시청에 몰려들어 북한 군복 속의 오리털을 빼내 가져가느라 오리털이 발목까지 찼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인파 속에서 고향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월남했던 친구가 국군이 돼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평양 탈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공군의 가세로 다시 수세에 몰린 국군은 후퇴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함께 내려가자는 군인 친구의 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행선지는 부산이었다.

"친구가 정세가 좋지 않으니 함께 후퇴하자고 했지. 부산으로 가기 전에 집에 한 번 들르려고 했는데 혹시 나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까 봐 가보지 못했어. 내가 온다는 소식이 어찌어찌 전해져 집에서 소까지 잡았다고 하는데. 국군이 된 친구네 집 가족들은 모두 몰살당했다고 하더라고."

뒤늦게 만난 아내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재령에 남겨진 김창일 할아버지의 가족들도 반동분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큰 고초를 당할 뻔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3살 터울이 지는 동생이 북한군 소좌여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나중에 보니까 동생 창성이가 원래는 원산농대에 진학해 소련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전쟁통에 못 가고 인민군 소좌가 됐어. 다행히 우리 가족에게 인민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나타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가 많고 땅을 지켜야 한다며 동생과 함께 북한에 남았고 형과 형수, 아내가 1·4 후퇴 때 피란을 했지."

부산으로 간 할아버지는 친구를 따라 국군 장교를 꿈꾸었다. 당시 부산 동래에는 육군종합학교가 있었는데 초급장교 숫자가 부족해져 장교를 모집 중이었다고 한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1·2기 생도들이 임관을 하기도 전에 전쟁에 동원됐다가 다수 전사한 상황이었다.

육군사관학교 나종남 교수가 쓴 '6·25전쟁 초기 육사 생도 참전전투 연구'에 따르면 임관을 불과 20여 일 앞둔 육사 생도 1기와 입교한 지 20여 일밖에 안 된 2기 생도 530명이 전쟁에 동원됐고 이 가운데 200여 명이 전사했다.

"전쟁에서 소위가 부족해지니까 모집을 많이 해 군인을 할까 고민했지. 부산에 같이 내려간 친구가 교관을 했는데 도리어 (전쟁에) 나가면 죽는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포기했지."

연중기획 실향민 김창일 할아버지 인터뷰2

할아버지는 형과 아내가 인천으로 피란 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는 즉각 인천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가족을 쉽게 찾을 수는 없었다.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인천에 있는 고향 사람들과 유격대를 결성해 황해도의 섬 초도로 넘어갔다.

동료들이 북한에 침투 작전을 갔다가 줄줄이 전사했지만 할아버지는 살아남아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지금의 인천 동구 송림동 수도국산 피란민 촌에서 헤어진 아내를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아내는 피란 이후 수도국산에 따로 정착해 친정부모를 모시고 행상을 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물건을 잘 팔아주던 어느 집 안주인이 자기 아들과 아내를 맺어주려고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이 나는 못 찾아도 형님네 가족은 만날 것이다"며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니나다를까 동향 사람에게 물어물어 형을 만난 할아버지는 부인이 형네 집과는 따로 떨어져 인천 어딘가에 산다고 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할아버지는 피란민들이 많은 길거리부터 샅샅이 훑었다. 수도국산 쪽에서 아내를 봤다는 말을 듣고 거리를 헤매던 중 그야말로 드라마처럼 아내를 길에서 찾았다.

할아버지는 인천에 이미 자리를 잡은 아내 곁을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954년 할아버지는 안정적인 공무원의 길을 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무작정 인천시청을 찾아가 당시 김정렬 시장(1907~1974)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시장 비서진들이 할아버지를 막아서느라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그 소리를 듣고는 김정렬 시장이 나와서는 할아버지를 만나줬다.

"먹고 살아야겠으니 일자리 하나 얻을 수 있겠냐"는 당돌하고도 엉뚱한 질문에 김정렬 시장은 할아버지에게 건설과 계약직 업무를 내주었다. 당시 군복무를 겸해서 정부 기관 연관 일을 하던 차여서 김정렬 시장이 선뜻 일자리를 줬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직 자리를 얻은 할아버지는 이후 정식 채용절차를 거쳐 인천시청 말단 공무원으로 계속 일하게 됐다.

"사실 안정적으로 살려고 했던 것이 가장 컸지만 그때는 공무원들이 정보가 빨랐기 때문에 북한 소식을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을까 해서 공무원을 했지. 공무원 월급도 박봉이라 아내가 여기저기 일을 하러 다니지 않으면 생활이 어려웠어."

북한의 반동분자에서 인천시청 공무원이 된 할아버지는 20여 년 동안 인천시청에서 공보실장, 사회과장, 새마을과장, 양정과장 등을 지냈다. 퇴직 30년이 지난 그는 지금도 '공직생활'을 일생의 가장 큰 보람으로 느낀다고 했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사진/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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