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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황현산 비평을 기억하며

유성호 발행일 2018-08-15 제18면

선생은 문학 자체를 들여다보고
자신만의 문장·흐름·체온으로 표현
사회·역사적 맥락 품었음을 알기에
미학적 고투 산물임을 이해한 만큼
누구보다도 상황의 독법에 공 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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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황현산 선생이 지난 8일 별세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을 지낸 분이지만 우리에게는 비평가로, 번역가로, 산문가로 깊이 남을 분이다. 요즘 팔순 넘어서도 열정적인 문필 활동을 펼치시는 분들이 많은데, 70 초반이신 선생의 타계는 애석하기 짝이 없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2013)가 유례없이 젊은 층의 호응을 얻었고, 트위터나 칼럼들을 통해서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은 필치를 선생은 세상에 깊이 남겼다. 지난 6월 펴낸 산문집 '사소한 부탁'은 결국 유작이 된 셈인데, 거기서도 선생이 보여준 해박하고 단정하고 날카로운 식견과 통찰과 문장은 우리 산문 문학의 한 정점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스스로는 부정했지만, 선생의 탁월한 경륜과 심오한 철학이 새로운 차원의 산문 읽기 경험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은 '비평가'로 남을 것이다. 황현산 비평의 개성은, 텍스트의 기표와 흐름과 궁극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따라잡는 미학적 집념과 성실성에서 비롯한다. 선생의 비평은 텍스트에 대한 평면적 해석에 머무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동어반복에 가까운 해설 편향의 비평 풍토에서도 선생은 거리가 멀다. 섣부른 논쟁 위주의 비평 관행에서도 선생은 자신을 고독하고도 서늘하게 지켜가는 파수꾼이자 불침번임을 자임하였다. 그만큼 선생은, 문학 자체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자신만의 문장으로, 흐름으로, 체온으로 감싸 안아 표현한 비평가였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이 선생을 문학지상주의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선생은 누구보다도 상황의 독법에 공을 들이는 비평가였고, 문학이 미학적 고투의 산물임을 이해하는 만큼, 문학이 사회 역사적 맥락을 품고 있는 실체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선생은 텍스트를 상황의 평면적 반영으로 보는 시각에서 자유로운, 큰 품과 눈을 가졌던 비평가였을 뿐이다.

천천히 선생의 노작 '우물에서 하늘 보기'(2015)를 펼쳐본다. 여기서도 선생은 개개 시편에 담긴 주제와 방법과 시선과 그늘까지 읽어내는 열정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텍스트에 새겨진 정서가 존재의 본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회적 맥락에서 분출되는 것임을 설명하였다. 그래서 시인들의 눈물과 울음의 미학을 구조 차원이든 성정 차원이든 모두 선명하게 규명해내면서, 그 정서적 조건들을 앙양해내는 시인들의 고유한 언술 방식에 대해서도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더불어 선생은 상호텍스트적인 문법들을 다양하고도 꼼꼼하게 파악하고 설명해냄으로써 풍요로운 시 읽기의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처럼 단단하고 물샐 틈 없는 선생의 연금술이야말로 우리 비평의 한 진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 실린 몇 마디에 귀 기울여보자.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슬픔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거기에 원한이 섞여 있지 않아야 하겠지만, 함께 울자고 말할 수도 없고 편히 가라고 말할 수도 없다. 가슴에 묻자니 가슴이 좁고 하늘에 묻자니 하늘이 공허하다. 이 언어의 무능함과 마음의 무능함이 대낮에 두 눈을 뜨고 그 수많은 생명들을 잃어버린 한 나라의 무능함과 같다. 잘 가라, 아니 잘 가지 말라. 이렇게 쓰는 만사(輓詞)가 참으로 무능하다.



슬픔을 아름다움의 결정으로 이해한 이들은 심미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현산 선생은 우리 시대의 비극 앞에서, 맑고 순결한 슬픔이 아니라, '만사'라고 불러야 할 상실감이 온통 그 슬픔을 감싸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만큼 선생은 자신의 현실인식을 꾸준히 심화하면서, 언어예술로서의 시를 읽어내는 충실성을 동시에 예각화해갔다.

우리는 가끔씩, 황현산 비평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텍스트의 상황과 심연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기회와 욕구를 얻어왔다. 이제 그러한 비평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비평이 텍스트의 우호적 후경에 머물지 않고 경험적 지남(指南)이 되기도 하는 장면을, 선생은 여러 번 선사해주지 않았던가. 못내 그리울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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