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지도 못한채 대충 씹어 삼키는 밥
시간없어 때우는 끼니 더욱 초라해
먹는 것 만큼은 서럽지 않았으면…
늘 고되고 쫓겨 밥때 놓치기 일쑤
누구나 편하게 식사했으면 좋겠다 |
박소란 시인 |
요즈음의 내 일터는 집에서 꽤 먼 곳에 있다. 초록버스를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2호선을 타고 얼마 뒤 다시 4호선으로 갈아탄다. 그렇게 집에서 일터까지는 꼬박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출퇴근 시간이 '9-6'을 조금 벗어나 있는 덕분에 만원 버스, 만원 지하철의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것만은 실로 큰 행운이다. 그만큼 여유가 생겨서일까. 무심코 지나쳤던 광경들이 드문드문 눈에 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내 시선을 붙든 것은 붐비는 지하철 승강장 의자에 앉아 혼자 삶은 고구마를 먹는 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었다. 자판기와 쓰레기통과 나란히 앉은 그가 엉거주춤 꺼내 든 비닐 팩에는 먹기 좋게 잘린 고구마 몇 개가 담겨 있었고, 한 컵 물도 없이 그는 그걸 묵묵히 집어삼켰다. 오가는 사람들이 그를 수시로 힐끔거렸다. 행인들의 눈에는 천진한 호기심, 아니 어쩌면 뜻 모를 핀잔, 경멸 같은 것이 묻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들이 영 편치 않았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반도 채 비우지 못한 비닐 팩을 주섬주섬 챙겨 자리를 떴다.
그 후로 거리 안팎에서 빵이나 떡, 달걀, 김밥 등을 먹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때로는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때로는 지하철 맨 구석에 서거나 버스 맨 뒷자리에 숨듯이 앉아서 조용조용 봉지를 바스락거렸다. 조심조심 냄새를 피웠다. 때로는 멈춘 채가 아니라 걸으며, 어딘가로 바삐 향하는 채로 밥을 먹는 이도 보였다. 분명 밥이었다. 커피나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와는 다른 것. 식사에 가까운 것. 때우는 밥, 허기를 누르기 위한 밥 말이다.
이때의 끼니는 곧잘 초라해진다. 집이나 식당이 아닌 곳에서 밥을 먹는 일은 어쩐지 외롭다. 서럽다.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대충 씹어 넘기는 밥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때면 무언가를 먹는 일이 이토록 치욕스러운 것인가 새삼 되짚게 된다. 길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그 사람을 얼마나 궁색하게 만드는지, 물론 먹는 당사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밥을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고. 시간이 부족해서, 혹은 돈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지. 그 이유라는 것을 들여다보게 되면 끼니는 더욱 초라해진다.
얼마 전 한 사이트 게시판에서 본 글들이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음식 먹는 것이 민폐라는 걸 잘 알지만, 통학 시간이 거의 한 시간 이상 되니 오가는 중 간단히 아침을 때우게 된다"고 털어놓는 학생이나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 냄새가 덜한 도넛이나 머핀 정도는 먹어도 괜찮을지" 묻는 직장인의 사연들. 이런 이야기에는 뭐라고 대꾸를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대중교통 내 음식 섭취 민원은 해마다 늘고, 도가 지나칠 정도의 행위로 폐를 끼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으므로.
다만 생각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일에서만큼은 누구도 외롭거나 서럽지 않으면 좋겠다고. 어색한 자세로 눈치 보며 때우는 밥 대신 편하고 당당한 밥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생활은 늘 그렇듯 고되고 우리는 자주 쫓긴다. 달리다시피 걷는다. 그러는 사이 밥때는 저만치 멀어져 있기 일쑤.
"여기서 그런 걸 먹으면 어떡해요!" 호되게 꾸짖는 사람. 냄새가 역한 듯 코를 막는 사람. 지하철 구석에 서서 찬 은박지에 싸인 김밥을 집어먹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서둘러 하차하는 사람. 무거운 백팩을 메고서 종종종. 후미진 어딘가로 가서 또 남은 김밥을 급히 삼키겠지. 그가 나선 문 위 포스터는 '음식물 반입 제한'이란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승객 안전 및 피해 예방을 위해 불결·악취 물품이나 음식물의 운송을 제한'한다는 것. 옳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후의 저 김밥이 오늘 그가 맞은 첫 끼일 것이라는 서글픈 짐작을 잠시 해볼 뿐.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