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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북한강의 느린 시간을 걷던 최하림 시인

김윤배 발행일 2019-02-15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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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잘 쓰여지지 않을땐 강 찾아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생각한다
'세상은 어느 만큼 살았으며,
죽은자들과 대면 얼마남지 않아
흐르는 시간 붙잡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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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입춘 지난 북한강은 물빛이 순하다. 강물은 강안의 높은 산들을 다 담고 있다. 눈으로 들어오는 풍광들이 포실한 느낌이다. 마른 풀들과 언덕의 흙도 부드럽게 감긴다. 봄이 멀지 않은 것이다. 북한강변을 따라 올라가면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문호리에는 '갤러리 서종'이 있다. 이곳은 최하림 시인이 영면 두 달 전에 '최하림 시전집'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장소다. 그의 제자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는 따뜻하고 소박하고 무겁고 슬픔에 차 있었다. 이미 병 깊었던 시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제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펜을 들 힘이 없어 서명을 못했으니 나갈 때 한 권씩 가지고 가라' 했다. 제자들 몇몇이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어깨를 들먹이는 제자들을 시인은 엷은 미소로 바라볼 뿐이었다.

최하림(1939~2010)시인은 목포에서 나고 자랐다. 20대 초반에 목포의 문청들이었던 김현, 김승옥, 김치수와 함께 '산문시대'라는 동인을 만들어 활동했다. 후에 김현과 김치수는 평론가로, 김승옥은 소설가로, 최하림은 시인으로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이루어내 문단의 중요한 작가들로 한국문학사에 기록되었다.

1964년, '빈약한 올페의 회상'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그는 사유 깊은 시세계를 선보이며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관심을 갖는 시적 대상은 '시간'이었다. 그는 시전집 서문에 '어느 날 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배후 없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현재가 과거라는 시간의 그림자를 끌고 이동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에게 역사도 삶도 시도 시간에 다름 없었다.



최하림 시인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격동기에 광주를 떠나 있었던 것에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죄의식으로 빚어낸 불후의 시편이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 있는가'다.

'……바람과/바람의 외침들이/보이지 않는 내 손짓/보이지 않는 내 눈짓/보이지 않는 내 소리짓/을 보고 있다/보이지 않는 내 맘까지/저 배반과 음모까지도 보고 있다/이 도시의 눈들이 내 모든 것을 보고 있다/오오 나를 감시하는 눈들이 보는 저 꽃!/하늘의 상석에 올려진, 아직도/피비린내 나는,/눈부시고 눈부신 꽃/살가죽이 터지고/창자가 기어나오고/신음소리도 죽은,/자정과도 같은,/침묵의 검은 줄기가/가슴을 휩쓸면서/발끝에서 심장으로/정수리로/오오 정수리로……'는 5·18을 노래한 무수한 시편들 속에서 찬연하게 빛난다.

그가 문호리로 옮겨오기 전 살았던 영동의 호탄리는 금강 상류였다. 'K와 함께'는 꿈속에서 함께 있었던 친구를 노래하지만 시간의 의미를 묻는 시편으로 읽힌다. '…유독 그 시간이 출렁거린다고 느꼈던 것은/너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갈대밭에 너와 나는 나란히 앉아 있었으되/너는 내 시간에 없었고 나도 네 시간에 없었다/오늘 밤도 강 건너 산 위로 둥글게 달은/떠오를 것이고 상수리도 오를 것이다/나는 유리창 너머로 볼 것이다/나는 김병익에게로 가 너를 꿈에 보았다고/말 할 것이다/아니 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나는 네 그림자가 드리운 미명 속을 갈 것이다/금강물을 따라갈 것이다'에서 시인은 꿈에 본 친구를 김병익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다 미명 속 금강물을 따라갈 거라고 노래한다. 죽은 친구의 그림자가 드리운 미명의 금강은 불길한 느낌이다.

그는 시가 잘 쓰여지지 않는 날은 북한강을 찾았다. 자택에서 걸어서 갈 거리에 북한강은 흐른다. 그는 언제나처럼 바위에 앉아 강물이 철철철 흐르는 모습을 본다. 넘치듯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생각한다. '세상은 어느 만큼 살았으며, 세상 흐름을 얼마쯤 내다볼 줄 아는,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는 순간에 강물은 혹은 시간은 사라져버리겠지요.'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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