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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인천·(8)]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와 무의도 유배

김민재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04-11 제15면

고립된 섬에서도 멈추지않은 '항일, 애국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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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함경도 출생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인천과 인연 이후 계몽운동 펼쳐
강화읍에 보창학교 세워 '훈맹정음' 창시 박두성 선생등 인재 다수 배출
기독교 전도사로 간도 오가며 독립활동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귀양생활
무의도 행적 구체 내용 확인안돼… 항일단체와 지속 교류 뒷날 도모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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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1873~1935)를 인천의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해외로 망명하기 전 강화도에서 교육과 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펼친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동휘가 인천에 남긴 발자국은 강화도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동휘는 인천 용유도에 딸린 섬 무의도에서 꼭 1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동휘와 관련한 각종 연구 서적이나 독립유공자 공적서를 보면 무의도 유배는 그의 위대한 여정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건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동휘가 인천 무의도에 남긴 역사의 흔적을 이제라도 되찾아 복원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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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무관 출신의 이동휘는 1903년 강화진위대장으로 임명되면서 인천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는 강화 부윤과의 갈등으로 이듬해 스스로 군복을 벗은 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 무렵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강화읍에 보창학교를 세웠고, 대중강연과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제의 감시가 매서워지자 그는 기독교 전도사 직책을 갖고 북간도를 넘나들며 항일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강화도와 함경도를 중심으로 애국 계몽운동을 펼치던 이동휘가 무의도로 유배를 가게 된 이유는 1911년 일본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에 휘말리면서다.

안명근이 국권 회복을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집으로 날조해 관련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백범 김구도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5년이 선고됐고, 이동휘는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원도안치' 1년의 행정처분을 받아 무의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는 이동휘와 상면이 없었는데 유치장의 명패를 보고서 역시 체포당한 줄 알았다"며 이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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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중국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핵심 간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를 따르던 항일단체와 끊임 없이 교류하며 뒷날을 도모했던 시기로 여겨진다. 또 기독교에 심취해 성경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러시아지역 한인신문 '선봉(先鋒)'은 1935년 2월 15일자 신문에 이동휘의 부고 기사를 실으면서 '리동휘 동무의 일생'이라는 제목의 일대기를 썼는데 여기에 짧지만 중요한 대목이 등장한다.

그가 해외에 조직한 항일단체를 유배 생활 기간에도 이끌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그는 삼년 안치의 처분을 받고 황해의 외로운 섬-무의도에서 삼년의 세월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가 간도에 있을 때 지도-조직한 철혈 광복단은 쉬지 않고 열렬히 활동하였다."

기사에는 유배 기간이 3년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1년이 맞다.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이동휘의 국내 행적이 구전으로만 전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기서 등장하는 '철혈 광복단'은 이동휘가 105인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1~2개월 전 간도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면서 그를 따르는 항일 그룹 대표자를 소집해 조직한 비밀 항일운동 지도부다.

이동휘는 1911년 3월 한성 경무총감부로 압송됐다가 그해 6월 19일 무의도 유배 처분을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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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상하이 도착 환영식. 꽃목걸이를 걸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왼쪽이 이동휘다. /독립기념관 제공

광복단 회원 명단과 구체적인 활동 내역은 자료 부족으로 학계에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훗날 이동휘가 조직한 사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인사회당과 대한국민회의, 북간도 국민회 등 해외 항일단체의 씨앗이 됐다.

이동휘는 무의도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이 조직한 광복단의 활동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무의도 유배 생활은 그가 더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해외 이주를 결심한 계기가 됐다.

1912년 6월 귀양 생활에서 풀려난 이동휘는 1년 뒤 기독교 전도사로 변장해 북간도로 탈출한다.

1919년 일제가 작성한 '재외배일조선유력자명부'에는 이동휘가 1913년 6월 4일 간도로 이주했다고 나와 있는데 이동휘가 안창호에 쓴 1913년 9월 22일자 편지를 보면 그보다 3~4개월 전에 망명했다고 나온다.

상해 임시정부의 첫 번째 국무총리로 잘 알려졌지만, 그가 해외에서 펼친 사회주의 독립운동 이력 탓에 왜곡된 평가를 받기도 했고, 군사정권이 종식된 1990년대에 들어서야 제대로 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에서야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일부 기록은 구전 중심으로 서술되다 보니 무의도 유배 사건에 대한 기록도 제각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의 유배 기간이다. 독립유공자의 공식 정보라고 할 수 있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이동휘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함경도에서 체포돼 황해도 무의도에서 3년간 유배되었다고 나와 있다.

또 1912년 가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유배지를 탈출하여 북간도로 망명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3년의 유배 처분을 받았으나 중간에 탈출했다는 내용으로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영종·용유지역 향토지도 독립투사 이동휘가 무의도 3년간 은신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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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2월 15일자 러시아 한인 소식지 '선봉'에 실린 이동휘의 부고 기사. /독립기념관 제공

이는 이동휘 부고 기사에서 일대기를 쓴 신문 '선봉'과 이동휘의 아들이 남긴 여러 버전의 이동휘 전기 내용이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

이동휘의 아들 이일영은 직접 집필한 전기를 1991년 공개했는데 "황해도 무의도 섬에서 정배사의하고 있던 이동휘 선생은 섬 중에 사는 어부들의 도움과 전우들의 활동 아래에서 예수교 전도사로 변장하고 1912년 무의도 섬에서 탈주하여 무사히 두만강을 건너갔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재미 한인단체가 발행한 신한민보는 1912년 7월 29일자 기사로 이동휘가 1년 간의 유배 생활을 마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학계는 이동휘의 일대기 전체를 살펴봤을 때 "작년 6월 18일부터 인천부 대무의섬에 안치를 당하였던 대한교육가 이동휘씨는 1년 기한이 찼음으로 해방되어 그 고향 성진군으로 보내었는데 이씨는 섬에 있을 때에 성경 연구에 전심하였다고 한다"는 신한민보 기사 내용이 사실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이동휘와 인천의 인연은 그의 유배 생활 종료로 끝났지만, 20여 년이 지난 1935년 2월 그의 죽음이 국내에 전해졌을 때 강화도 주민들은 추모 행사를 계획했을 정도로 이동휘가 인천에 남긴 공적은 뚜렷하다.

강화의 유지들은 이동휘 추모식을 준비했지만 강화경찰서가 허가하지 않아 불발됐다.

이동휘가 강화에 설립한 보창학교는 우수한 인재를 다수 배출했다.

'훈맹정음'의 창시자 송암 박두성 선생이 대표적이다. 1888년 교동에서 태어난 박두성은 1895년 되던 해 이동휘가 보창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고, 이동휘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육계에 몸담았다.

한일병합의 굴욕을 맞은 1910년 이동휘는 망명을 권유했으나 그는 남아서 후진 양성에 힘쓰기로 헀다.

이에 이동휘가 소나무의 절개를 지키라며 송암(松岩)이란 호를 지어주고 '남이 하지 않는 일에 평생을 바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가 박두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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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독립기념관에 조성된 이동휘 어록비. /국가보훈처 제공

이동휘는 교육가이자 웅변가이기도 했다.

이동휘는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강화도 진위대원과 주민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배워야 하겠고 알아야 하겠다. 군함도 있어야 하겠고 대포도 있어야 하겠다. 독립군도 양성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10리 사이에 1교씩을 설립하고 삼천리 강토에 3천교를 설립하여 3천만 동포의 애국정신을 배양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오늘부터 또 내일부터 시작하여야 하겠다."

이동휘는 망명 이후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고,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했고, 러시아 공산당과 교류하며 독립을 꾀한다.

이동휘는 혁명적 방법으로 조국 광복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했고, 무장을 통한 항일 투쟁 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강한 눈보라를 만나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치료를 받던 중 1933년 1월 31일 서거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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