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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국사성황사, 5월 끝자락을 걷다

김인자 발행일 2019-05-31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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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골마다 생명감으로 활기
지친 일상 미소 짓게하는 온갖 꽃
산신 영험 소문에 무속인 발길 잦아
대관령 바람·안개·눈 소중한 자원
천혜 자연조건 사계절 휴양지 엄지


에세이 김인자2
김인자 시인·여행가
작은 창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잎은 피는데 열중하고 나는 바라보는데 집중한다. 자작나무 가지로 틈을 낸 창유리엔 숱한 잎들이 그림자를 만들고 부푼 하늘을 맘껏 들인다. 바람이 나들이를 하는 동안 동전만 한 잎들이 수다를 떨고 자리를 뜨자 푸른 햇살이 환하게 터를 잡는다. 나의 눈으로 창을 보는 일보다 창의 마음으로 세상을 들이는 고마움을 조금 알았을 때 선한 얼굴과 미소가 지천임을 알겠다.

번다함을 뒤로하고 대관령 골짜기로 돌아오자 애써 내려놓지 않아도 호흡은 느리게 유지된다. 놀라워라. 이 짧은 시간에 모든 속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니. 나무의 심장소리를 듣겠다고 이 나무 저 나무 귀를 대자 서늘하면서도 따듯한 기운이 내 몸으로 건너온다. 너무 늦었다 싶을 때 늦은 것은 없다는 진리를 보여준 그분이 지금처럼 가까이 있는 그분이라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달라 애원하지 않고 주겠다 몸부림치지 않는 것, 내 몸에 붙어있던 가파른 속도가 해제되고 이 세세한 곳까지 찾아와주신 그분의 존재.

이웃 담장에도 5월을 장식하는 장미가 치정처럼 붉다. 이 고원에서 여린 잎이 펼칠 세상을 염탐하는 일도 그러려니와 거칠고 투박한 토사를 부드럽게 개방하는 풀빛 온기를 생각하는 순간, '경이'라는 말을 조금 깨달았달까. 작은 풀잎 하나도 생산할 수 없으면서도 품격 없는 자만으로 타인을 분별하며 살아온 날들이 심히 수치스럽다. 좋은 것에 숨은 나쁜 것이나 나쁜 것에 깃든 좋은 것들, 보고도 못 본 눈과 듣고도 듣지 못하는 귀로 남을 탓하며 부질없는 것에 집착하거나 너그러웠던 건 아닐까. 능력 밖의 것들, 본 것에 생각을 덧씌우려다 상처 준 일, 과적으로 점철된 시간, 아침이 오니 어둠이 물러나는 건 당연할 것이나 오늘따라 이 산골마을은 적요를 넘어 맑은 영성으로 가득하다.

대관령의 5월 바람은 달큰하다. 백두대간 골마다 줄기마다 생명감으로 활기가 넘친다. 선자령 들머리에 위치한 국사성황사(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로 향하는 길목엔 노란 미나리아재비가 한창이다. 해마다 이맘때 온갖 꽃들과 마주하는 일은 지친 일상을 미소 짓게 한다. 주중엔 자동차로 가도 되지만 걷고 싶은 사람은 구영동고속도로 상행선 주차장에 차를 두고 15분쯤(1.5km) 걸으면 도착한다. 이 길은 포장도로를 택할 수도 있고 양떼목장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이용해도 좋다. 초행인 사람은 국사성황사를 큰 사찰로 상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기대는 접어두는 게 좋다.

국사성황사는 김유신을 모신 산신당과 국사성황신 범일국사의 사당인 국사성황사(강원도 기념물 제54호)가 있는 우리 전통문화의 현장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성황사는 '城隍祠'라는 현판이 걸린 약 17㎡의 3칸 기와를 올린 목조건물이 있고, 산신당은 한 칸짜리 조그만 목조 기와집으로 건물 중앙에 '山神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세계무형유산인 강릉단오제는 이곳 국사성황사에서 제를 지내고 그 신(神)을 강릉 단오장으로 모셔가는 행사로부터 단오제를 알린다. 때마침 내가 방문했던 날이 그날이라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인은 물론 도내 관료들, 전국의 무속인들, 많은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곳은 백두대간 그 어느 곳보다 산신이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진정한 무당이 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연일 찾아오는 무속인들로 조용할 날이 없다. 국사성황사를 둘러봤으면 선자령도 한 번 걸어보길 권한다.

국사성황사가 있는 대관령은 한반도에서 평균기온이 가장 낮고 적설량이 가장 많으며 겨울이 가장 긴 곳이다. 특히 이곳은 사철 바람이 심한 고원답게 바람을 이용하여 공해 없는 청정에너지(전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선자령 일대에 조성된 53기의 풍력발전기는 대관령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람 안개 눈이 많아 예전엔 악조건이었던 요소들이 지금은 소중한 자원이 되고 있는 대관령, 특히 목초지, 고랭지 작물, 각종 원시림, 전국 최고의 황태덕장과 동계 올림픽을 치를 만큼의 천혜의 자연조건들, 고도가 높아 여름에도 더위 걱정 없는 이곳은 사계절 휴양지로도 손색이 없다.

/김인자 시인·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