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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새벽이 전하는 이야기들

김서령 발행일 2019-08-30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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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투정 아기 달래는 엄마의 목소리
할아버지 혈액순환 허벅지 때리기
친정엄마와 낯선 할머니 벤치대화
그래서 가엾고 곤한 냄새가 난다…
창문 닫고 자야할 가을 다가와 다행

에세이 김서령1
김서령 소설가
아파트 2층에 산다. 그건 무엇을 뜻하냐면, 여름이 조금 괴롭다는 건데 다른 이유가 아니라 더운 밤 창문을 열어놓고 자려면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마치 담을 사이에 두고 나와 둘이 소곤거리는 것인양 가까이 들린다는 것이다. 안 자겠다고 떼쓰는 우리 집 아기를 겨우 재우고 나면 창밖에선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너 정말 이러기야? 지금이 몇 시야? 진짜 안 잘 거야?" 내다보지 않아도 안다. 우리 집 아기만큼이나 안 자고 떼쓰는 아기를 어르려 밖에 데리고 나온 엄마의 목소리다. "제발 자자. 좀 자자. 엄마도 졸리다고." 아기를 업은 채 아파트 화단 근처를 살살 걷는 그 엄마는 자신의 목소리가 우리 집에 그렇게 스며들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을 터라 급기야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 "제발! 자라고! 엄마도 좀 살자고!" 그럼 아기는? 당연히 운다. 우리 집 아기도 깬다. 아기 좀 재우고 영화나 한 편, 소설이나 한 권…… 그건 꿈에서나 일어날 일이었다. 단지 내에 몇 개 없는 예쁜 벤치는 왜 하필 우리 집 아기방 아래에 놓였는지. 정말이지 여름은 괴로웠다.

며칠 전 새벽녘에 잠을 깼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것을 보다 잠이 들어서 처음에는 나를 깨운 것이 빗소리인 줄 알았다. 찰박, 찰박…… 잠시 후에 또 찰박. 어딘가서 물이 떨어지는 건가. 발코니 문을 열어두었는데 어딘가로 물이 새고 있나. 개수대 수도를 덜 잠갔나. 찰박찰박 소리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언뜻 내다본 창밖에는 이미 환한 새벽빛이 올라 있었고 비는 그친 후였다. 주방 수도꼭지도 잘 잠겨 있고 발코니도 멀쩡했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씻어낸 여름의 새벽 풍경은 청량하기 그지없었다. 더워도, 밤중 소음이 있어도 여름만큼 예쁜 계절이 또 어디 있을까. 이렇게 예쁜 초록을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소음의 근원지는 찾지 못한 채 창문을 닫으려던 찰나, 다시 찰박 소리가 들려왔다. 벤치였다.

놀랍게도 할아버지 한 분이었다. 반바지를 입고 이른 산책을 나온 어르신이 벤치에 앉아 허벅지를 찰박찰박 때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나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물안개가 나직하게 내려앉은 화단 옆 벤치에 앉아 반바지 자락을 허벅지 끝까지 끌어올리고 허벅지를 소리 나게 때리고 있다니. 한참 만에야 그건 그냥, 혈액순환을 위한 할아버지 나름의 운동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웃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마침 젖은 바람도 서늘해 나는 창문을 닫고 침대에 도로 누웠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그 광경이 쉬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몇 달 전 친정엄마는 우리 집에 다니러 왔다가 새벽녘 혼자 산책을 나섰다. TV라도 틀면 곤히 자는 딸네 식구들 깨울 것이 빤하니 아무도 몰래 조용히 나선 것이었다. 아침에 잠을 깨 엄마가 없다는 것을 알고 창문을 열어보니 벤치에 웬 낯선 할머니 한 분과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 들어와요!" 내 말에 손만 흔들어 보이고는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모르는 할머니와 벤치에 앉아있었다. 아침을 먹자고, 몇 번을 조른 후에야 들어온 엄마가 가만가만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들네서 살다가 며느리랑 사이가 안 좋아져서 딸네로 옮겼대. 근데 딸네랑도 안 좋아서 아들이랑 딸이 돈을 보태 여기다 전세를 얻어줬나 봐. 옛날에야 할아버지랑 살았겠지. 그러다 혼자되니까 아들네로 딸네로 돌다가 결국 혼자 사는 거지. 외롭대. 여긴 젊은 부부들만 살아서 노인네들도 없다고, 나랑 조금만 더 놀다 가자, 조금만 더 있다 가자, 그래서 붙잡혀 있었지." 나는 공연히 조금 찡해져서 "그럼 아침 드시고 가라 그러지." 그랬더니 엄마가 웃었다. "뭘, 처음 보는 노인네인데. 아이고, 자식들한테 좀 애살 있게 잘하지, 늙었다고 잔소리나 풀풀하고 그러면 누가 좋아한다고."

새벽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잠 못 이룬 사람들이 먼저 걷고, 바쁜 사람들이 먼저 걸으며 속엣말을 훌훌 아무 데나 떨어뜨린다. 그래서 새벽엔 가엾고 곤한 냄새가 난다. 나는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당기며 이제 곧 창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자야 할 가을이 부쩍 다가와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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