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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새 옷

박소란 발행일 2019-09-06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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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화려하고 특이한 '로브 카디건'
내 취향 아니었지만 고민끝에 구입
외출때 걸치면 영락없이 눈길끌어
친구들도 예상대로 '깔깔'대는 반응
옷으로 웃는 분위기에 흐뭇함 느껴


에세이 박소란2
박소란 시인
옷 얘기를 좀 해야겠다.

지난 여름 나는 특이하게 생긴 옷을 하나 샀다. 주로는 휴양지에서 입는 로브 카디건으로, 노란색 바탕에 파랑·보라·주황의 갖은 꽃잎이 그려진, 마구 그려진 제법 화려한 아이템이다. 평소 패션에 민감하고 과감한 스타일링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사실 유별날 것도 없는 수준이겠으나 내게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인터넷 쇼핑으로 이 옷을 샀다. 우연히 유튜브 영상을 클릭했다가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한 연예인이 입고 나온 것을 보고 "우앗!" 하고 반해버린 뒤, 간단한 서칭을 통해 브랜드와 제품명을 확인하고는 쇼핑몰까지 곧바로 직행했다. 그러나 막상 주문 버튼을 누를 엄두는 잘 나지 않았는데, 과연 입을 수 있을까? 이걸 입고 어딜 가지? 같은 고민들이 줄줄이 늘어섰기 때문이다. 일터에도, 학교에도, 어디에도 입고 가기에 뭣한 옷이랄까. 고향집에 입고 내려갔다간 아버지를 흠칫 긴장하게 만들 게 분명한 그런 옷.



아닌 게 아니라 이 옷은 평소의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딱히 취향이라고 한다면, 검정을 중심으로 회색이나 남색 같은 채도 낮은 색상의 옷을 나는 선호하는 편이다. 덕분에 옷장은 대개 어두컴컴하다. 디자인도 단순한 게 좋다. 내겐 그런 옷들이 어울리니까, 라기보다 언젠가부터 그런 색, 그런 디자인이 안정적으로 다가왔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불편한 자리에 나설 때마다 나는 더욱 그런 옷들을 찾아 입곤 했는데, 그 옷들이 나를 조금은 진정시켜주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누구의 눈에도 거슬리지 않는 옷. 어느 곳 어느 때나 무난히 어울리는 옷. 일종의 보호색이라 해야 할까.

그러니 갑작스레 화려한 옷에 눈이 간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나는 잠시 익숙지 않은 고민에 빠졌다. 내게 이런 옷이 어울리기나 할까? 이걸 입은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진 않을까? 나를 본 사람들은 놀라겠지. 그리고 놀리겠지. 속으로 좀 비웃을지도 몰라. 유별난 취향의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지도. 갖가지 걱정은 옷을 입는 내내 나 자신을 쭈뼛거리게 만들 것이다. 이쯤 되면 옷이 아니라 웬수로구나. 옷을 입기 전부터 이미 피곤해진 꼴이라니. 이런 스스로가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다 나는 옷 하나 입는 데에도 이토록 많은 걸 재는 어른이 되어버렸나. 그만두고 싶었다. 아, 지긋지긋해, 남들 눈 의식하는 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부러라도 나는 꼭 이 옷을 사야만 하겠다,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문제의 옷은 며칠 뒤 택배 상자에 싸여 무사히 내 앞에 놓였다. 한동안은 역시 잘 입게 되지 않았다. 어쩌다 가까운 곳으로 외출을 할 때 슬쩍 걸치고 나가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한두 번은 꼭 돌아보았다. 너무 대놓고 쳐다볼 때는 당황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차 익숙해진다고 해야 할지. 무뎌진다고 해야 할지. 그러려니, 적응이 되었다. 어느새 나는 도서관에 갈 때도, 슈퍼에 갈 때도 이 옷을 입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옷을 나풀거리며 책을 고르고 장을 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체로 엇비슷한 옷들을 입고 있었고, 어딘가 튄다 싶은 옷을 입은 이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친구들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너 요새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그 옷은 뭐임? 대체 어디서 주운 거?" 놀리고 싶어 안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아주 가끔은 "오, 예쁘다! 완전 내 취향" 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얼마 전 편한 사람들 몇이 모인 술자리에서는 내 이 특별한 옷을 돌려 입어보는 희한한 의식이 행해졌다. 물론 벌칙 같은 것이었으나…. 옷을 입은 지인들을 보며 "아, 이런 느낌이군" 새삼 깨닫게 되었다. 웃기다, 정말 웃겨. 그 각각의 모습이, 옷 하나로 달라지는 우리의 분위기가 재미있었다. 취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흐뭇함마저 느꼈다.

그래서 결론은, 사길 잘했다는 것. 입길 잘했다는 것. 뭐 어쨌든 웃으면 좋은 거니까.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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