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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인천·(30)]인천항 우련통운 설립자 배인복

김민재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10-10 제1면

기업인 평가에 가려진 '상인독립군'

상하이 후원활동 제대로 조명안돼
'묻힌 자금줄' 등 추가 연구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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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의 하역업체 우련통운의 설립자 배인복(1911~1997)은 인천항만 업계를 이끈 기업인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인천에서 태어난 배인복은 1940년대 초반 일제의 징집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무역업을 했을 때 이역만리 타국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의 재정적 버팀목이 돼주었다.

상하이 한인 사회에서 이렇게 독립운동 후원을 했던 상인들을 '상인독립군'으로 불렀는데 배인복도 그 중 하나였다. 상하이 한인 사회의 대부격인 대표 상인독립군 김시문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뒷바라지를 했다.



아쉽게도 인천은 기업인으로서 평가에만 몰두한 나머지 일제 강점기 배인복에 대한 행적은 놓치고 말았다.

1940년대 상하이에서 어떤 독립운동가와 교류했고,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지원했는지도 현재로선 기록이나 증언조차 구하기 쉽지 않다.

일제의 수탈과 징집을 피해 상하이로 넘어간 인천의 이름 모를 상인들이 배인복처럼 상인독립군으로 활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배인복은 코흘리개 꼬마 시절이었던 1919년 3·1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동네를 누볐고, 청소년기였던 1926년에 벌어진 6·10 만세 운동 때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런 그가 외국에 가서도 서슬퍼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다는 사실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상인독립군을 연구한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실장은 "당시 상하이 한인사회에서는 공공연하게 독립운동을 지원할 수 없었던 이유로 서로가 모르게 활동을 했을 수도 있어 배인복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지금으로서는 관련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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