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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죽서의 애절한 시편들

김윤배 발행일 2019-11-01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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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때 지은 '창밖에서 우는 저 새는
…두견화는 피었는지' 서정 넘쳐
서기보의 첩실로 님 향한 그리움
병약함으로 애잔한 시 짓기 낙 삼아
늘 홀로 지내는 고적함 잘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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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가을밤 깊어진다. 밤 깊어지며 생각이 깊어지는 건 계절 때문이리라. 찬바람이 인다. 별빛이 흔들린다. 열엿새 달빛이 유난히 밝고 시리다. 밝은 달빛으로 검은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려야 할 것 같은 고즈넉함이 사위를 흐른다. 귀뚜라미 울음이 울컥 숲을 토해놓는다. 이런 밤을 죽서는 수없이 보냈을 것이다. 밤 지새 눈물지으며 조용한 사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것이고, 오지 않는 님을 기다려 가슴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박죽서(1817~1851)는 원주 출신의 시인이다. 원주는 여류들의 문향이었다. 금원과 경춘이 원주 출신의 시인이다. 그녀가 남긴 주옥같은 시편을 생각하면 고향 마을이 원주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은 것이 못내 안타깝다.

박죽서는 부사 서기보(1785~1871)의 첩실로 들어간 이후 길지 않은 생애를 병약함으로 보내며 시를 짓는 일을 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그녀는 첩실이어서 늘 남편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오지 않는 님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슬프도록 애잔한 가락으로 많은 시편을 흐른다. 그녀는 병 깊은 몸으로 애달픔과 기다림의 십몇 년을 보내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이 뛰어나 십세시를 짓기도 했던 그녀는 첩실이거나 기녀였던 여류시인 금원, 운초, 경산, 경춘과 어울렸다. 모두 빼어난 시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용산에 있었던 삼호정에서 '삼호정시사'라는 동인을 만들어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으며 수심을 달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녀의 유고를 모아 '죽서시집'을 엮은 사람이 남편 서기보의 재종 돈보다. 166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돈보의 서문과 문우 금원의 발문이 뒤에 수록되어 있다. 남편 서기보는 시문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관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돈보는 '죽서시집' 서문에서 '혼자 있을 때는 단정하고 침중하고 그윽하여 마치 사색하는 듯하였다'고 적고 있다. 죽서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발문을 남긴 금원은 한마을에서 나고 자란 벗이었다. 금원은 '아! 이 책은 죽서가 지은 것이다. 책을 대하니 그 사람을 보는 것 같구나. 반짝이는 눈과 붉은 뺨이 은은하게 책장 사이에 어려 비쳐 있으니 아! 아름답구나'라고 죽서의 부재를 가슴 아파한다.

그녀가 10세 때 지었다는 시에서 '창밖에서 우는 저 새는/어느 산에서 자고 왔는고/아마도 산속의 일 알겠지/두견화는 피었는지'라고 노래한다. 왕유의 시를 차운했다고는 하지만 어린 소녀의 시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서정이 넘친다. 늘 홀로 있는 고적함이 잘 드러난 시가 '감회에 젖어서'다. '비낀 해 서산에 지고 달 동쪽에서 떠오르자/홀로 등불 앞에 누우니 온갖 일 공허하네/천지에 밤 들자 모두 적막해졌는데/어찌하리 이 마음속 번뇌를'에 이르면 그녀의 외로움이 뼈에 사무친다. 그녀의 그리움의 원형은 고향일 것이다. '고향을 그리며'에서 '난간에 홀로 기대니 시름 더욱 끝없는데/북풍에 눈 날리며 날이 저문다/멀리 구름 밖에서 들려오는 몇 마디 기러기 소리/동쪽 바라보니 고향은 하늘 서쪽'이라고 읊었지만 주로 한양에서 생활하던 죽서였으므로 원주는 남쪽이어야 맞을 것이지만, 서쪽이라야 울림이 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병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병을 얻고서'라는 시에서 '병 들고나자 한번 웃는 일도 드물어/꿈 속에서 생각만 오락가락/이 몸이 만약 새가 된다면/잠시도 헤어지지 않고 님 찾아 날아가리'라고 노래해 병든 몸이 님에게 얼마나 몹쓸 일인지 자책하는 것으로 읽히는 문장이 '잠시도 헤어지지 않고 님 찾아 날아가리'다. '병 앓고 나서'라는 시에서는 '앓고 나니 살구꽃 피는 봄 시절도 지나/마음은 흔들흔들 매지 않은 배와 같네/……/거울 속 파리한 모습 도리어 슬플뿐/스물 세 해 긴긴 세월 한 일이 무엇인고/절반은 바느질로 절반은 시를 써 없앴다네'라고 노래한 것으로 보아 병이 얼마나 오래고 깊었는지 짐작케 한다. 안타깝고 애처로운 일생이다.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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