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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정지은 발행일 2019-11-08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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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즐기는
단점 많은 곰돌이 푸 친구들
그들 우정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힘들때 이들의 세상 걱정없는 대화
읽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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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문화평론가
뉴스를 끊은 지 꽤 됐다. 명색이 신문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적절한 방법은 아니지만 '뉴스'로 다뤄지는 소식들에 들썩이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어 고민 끝에 한시적으로 선택한 방법이다. 사실 뉴스보다 먼저 끊은 건 SNS다. 하루라도 업데이트되는 소식들을 못 보면 마음이 불안했는데 막상 끊고 나니 또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두 번째 선택으로 뉴스를 보지 않게 된 것이다. 안 보고 모르면 마음이라도 편하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이 또한 효과가 괜찮다. 가장 놀라운 것은 꼭 알아야 할 것처럼 챙겨보던 그 모든 소식들을 몰라도 일상에 별다른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뉴스를 비롯한 각종 소식들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너무 소식을 모르다 보니 자칫하면 이 귀여운 곰돌이와 유쾌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뻔했기 때문이다. 바로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곰돌이 푸(Winnie the Pooh : Exploring a Classic)' 전시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인 꼬마 크리스토퍼 로빈과 이 꼬마의 둘도 없는 친구인 곰돌이 푸가 주인공이다. 물론 꼭 이 전시를 봐야 하는 건 아니지만, 디즈니 만화에서 빨간 티셔츠를 입히고 노란 곰으로 캐릭터화되기 이전, 보송보송한 털 인형에 가까운 원형의 푸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 놓치기 아까웠다.

바로 지금, 매일매일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날인 푸에게는 다양한 모험을 떠나는 친구들이 있다. 소심한 피글렛, 항상 우울한 당나귀 이요르, 에너지 넘치는 호랑이 티거, 허세 가득한 부엉이 아울, 간섭대장 래빗까지…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아 보이는 친구들이지만 이들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즐거운 하루를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오늘은 무슨 신나는 일이 생길까?"라니!

"그냥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들을 수 없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을 비우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 이런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이 철학적인 곰은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꿀단지를 껴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준다.

노는 것조차 딱히 뭘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푸와 친구들이 하는 '푸스틱(poohsticks)'놀이가 그렇다. 다리 위에서 동시에 나뭇가지를 떨어뜨린 뒤 다리 반대편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강물을 따라 가장 먼저 흘러내려오는 나뭇가지의 주인이 이기는 놀이다. 푸가 자신의 앞발에 튕겨져 강물로 떨어진 솔방울이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보다가 발명한 게임이라고 한다. 강물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바람에 다리 난간에 붙어 서서 한참을 멍하니 내려다봐야 할 때도 있지만, 로빈과 푸에게는 즐거운 놀이 중 하나다. 사실 실제 해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놀이일 수도 있고 뭔가를 하기보다는 기다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놀이지만, 이 둘에게는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실제 동화의 배경이 된 영국 하트필드에서는 일 년에 한번, 푸스틱스 시합이 공식적으로 열린다고 하는데 그때만큼은 어른들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 동화 속 세계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그것밖에 할 게 없는 바로 그때 '모험'이 시작되고 소년과 곰이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정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우린 평생 친구지? 그렇지?"라는 물음에 "그보다 더 오래!"라고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려워진 나는, 이들의 우정이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름다워 보이는 이들의 우정이 동화이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책을 덮으며 싱긋 웃고 만다. 로빈과 푸, 친구들이 나누는 우정이 '왜 나에게는 없을까' 고민하며 우울해하는 대신, 힘들 때 이들의 순진무구하고 세상 걱정 없는 대화를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원작 책을 처음으로 읽으면서 뭔가에 쫓기듯 분주하던 마음과 들끓는 욕망을 슬그머니 내려놓아 본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 쉽지 않지만, 이 동글동글한 곰돌이 푸와 함께라면 좀 편안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정지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