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 뉴스홈

오피니언

[전호근 칼럼]책 도둑

전호근 발행일 2019-12-03 제22면

30년전 '논어 완질' 훔쳐갔던 청년
새삼 그 일이 떠오른 까닭은
얼마전 논어 번역서 탈고하며
올바로 읽고 풀이했는지 두려움과
그에게 뭘 훔치진 않았나 의심 때문


2019120101000008800000501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나는 대학원을 다닐 때 양현재(養賢齋)라는 곳에서 조교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에는 금속활자본 고서가 소장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7책으로 구성된 논어 완질도 있었다. 그 책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도둑이 들어 논어 완질을 훔쳐간 것이다.

그날 아침 출근해서도 도둑이 든 줄 모르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책을 들고 와 이 책이 여기 있던 물건이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비로소 서가의 한 곳이 텅 비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깜짝 놀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였다. 이야기인즉은 그날 도둑이 이곳에 들어와 책을 훔쳐 가지고 나가다가 경비의 눈에 띄어 붙잡혔다는 것이다. 이어 나에게 경찰서로 가서 참고인 진술을 하고 책을 도로 찾아가라고 했다.

밖에 나갔더니 경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쪽에는 경비 아저씨가 앉고 나는 뒷자리에 앉았는데 뒷좌석에는 이미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 있던 경찰로 보이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유식한 도둑인가 봅니다. 아니 어떻게 그 책이 귀한지 알아보고…."

대꾸가 없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살피려던 나는 흠칫 말꼬리를 흐렸다. 경찰인 줄 알고 말을 걸었던 그 사내의 손목에 채워진 금속물질이 어두운 차 안에서도 차갑게 반짝거렸던 때문이다.

그제야 그의 초라한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피의자는 대략 20대 후반으로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그는 낡은 청바지에 때 묻은 운동화, 항공점퍼 비슷한 윗도리를 걸치고 있었는데 몸에서 다소 불쾌한 냄새도 났다.

그는 이미 모든 걸 체념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숨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전문적인 고문서 도둑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일시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책을 훔치다 잡힌 것으로 보였다.

차를 타고 경찰서까지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도둑이 도둑다워 보이지 않는 데다 그가 나와 비슷한 또래인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 공부하며 논어를 읽는데 저 사람은 어쩌다가 학교에 몰래 들어와 논어를 훔치는 사람이 되었을까. 꼬리를 무는 상념 끝에 나는, 성현의 말을 훔치는 나 같은 자나 성현의 글이 적힌 책을 훔치는 그나 피차에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침묵 속에 경찰서에 도착한 뒤 나는 담당 형사에게 따로 그 도둑에게 다른 전과가 있는지 물었다. 예상대로 그는 초범이었다.

이윽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경찰에게 어제 퇴근한 시간, 그리고 다시 출근한 시간, 또 그가 훔친 책 외에 달리 없어진 물건은 없다고 일러주었고 경비 아저씨도 자기가 목격한 일을 진술했다. 그런 뒤 경찰은 이 책이 권당 얼마나 하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대략 3만원 정도 한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그보다 못한 책들이 인사동에서 권당 5만원을 호가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능하면 금액을 적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 도둑이 그나마 처벌을 약하게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비 아저씨가 저렇게 귀한 책이 그리 쌀 리가 있겠느냐며 자꾸 10만원이 넘는 물건이라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약간의 언쟁마저 있었지만 내가 한사코 3만원이라고 주장해서 결국 조서에는 훔친 물건의 액수가 21만원 상당의 책자 7권인 걸로 기록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다였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나는 어느 옛 책에서 선비의 집에 쌀을 훔치러 들어갔던 도둑이 선비가 밤늦게까지 글 읽는 소리를 듣고 훔치기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를 읽고 감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그 이야기가 과연 사실인지 의심스러워졌다. 과연 배고픈 도둑의 귀에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들어왔을까.

30년도 더 된 일이 떠오른 까닭은 얼마 전 논어 번역서를 탈고하면서 내가 그동안 논어를 올바로 읽고 풀이해 왔는지 두려운 마음과 함께 이런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지키던 책을 훔치려 했지만 혹 내가 그의 무엇을 훔쳤던 것은 아닌가.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