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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사과하세요

박소란 발행일 2020-01-17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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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인터넷쇼핑몰 잇단 실수에
의례적 "죄송해요"조차 없어 찜찜
잘못은 있어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
'사과의 멸종' 냉엄한 세상 생존전략
죄책감·부끄러움 희석 결과 아닐지


에세이 박소란2
박소란 시인
세탁물을 맡긴 지 열흘이 지났지만 세탁소에선 연락이 없었다. 평소라면 '세탁물 찾아가세요'하는 메시지가 몇 번은 왔을 텐데, 이상하네. 전화로 문의하자 "아, 그 옷? 진작 다 됐어요" 한다. "왜 문자가 안 왔을까요?" 물으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글쎄요. 가끔 그런 일이 있더라고요" 한다. 덧붙이는 어떤 말도 없다. 의례적인 "죄송해요" 정도는 기대했는데. 좀 따져 묻고도 싶었지만 별일도 아닌데 싶어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운동화를 산 뒤 반품 신청을 했다. 쇼핑몰에서 보내온 메시지에 따라 택배회사에 전화를 걸어 회수 요청을 했는데 뜻밖에도 일이 복잡해졌다. 택배회사가 엉뚱한 곳으로 가 엉뚱한 물건을 회수한 것. 어떻게 이런 일이?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알고 보니 내가 받은 메시지에 송장 번호가 잘못 기재돼 있었던 것이다. 쇼핑몰과 어렵사리 통화가 되었으나 "아, 저런…" 할 뿐. 이 사고는 쇼핑몰과는 무관한 운동화 판매업체의 과실이라고 선을 긋는 듯했다. "그럼 지금 확인된 송장 번호로 다시 회수 요청을 하면 되나요?" 그뿐인가요? 그런가요? 그렇군요. 잘못은 있었으나 잘못한 사람은 거기 없었다.

최근 이런 식의 찜찜한 일들을 연거푸 겪은 뒤 나는 화가 좀 났다. 분명 뭔가 이상해. 그 누구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만 하잖아. 미안하단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은근슬쩍 사과를 회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을 말하는 순간 실로 엄청난 재앙이 일 것처럼. 나는 모르는 어떤 매뉴얼이 그들 사이에 있는 건지? '사과는, 사과만은 절대 해선 안됩니다. 사과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예요.' 요상한 경고를 받기라도 한 것 같다.

하긴, 길을 걷다 어깨를 슬쩍 부딪혀도 "아, 죄송합니다" 대신 쌍욕부터 날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소한의 예의를 기대하는 것조차 지금은 무리일까.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토로하자 이런 얘기를 들려준다. "6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말이야. 유학생 선배들이 일러준 팁이 있어. 운전하다 작은 접촉사고를 내더라도 '아임 쏘리'가 아니라 '아 유 오케이?'로 시작하라는 것. '쏘리' 하는 순간 상황이 불리해질 수 있다는 거지." 한국에서 하듯 사과를 남발했다간 호구가 되기 십상이라고.

친구가 전제한 바와 달리, 이제 한국에서도 '아임 쏘리'를 듣기란 어렵게 되었다. 앞으로는 더더욱 사과가 귀해지겠지. 멸종 위기에 처한 사과. '사과의 멸종'은 냉엄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너도 나도 익힐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생존 전략과 유관한 것일까. 얕잡아 보이지 않기 위한 처세이기 이전에 죄책감이나 부끄러움 같은 고유의 감정들이 점차 희석된 결과는 아닐까. 최근 본 영화 '경계선'의 황량한 풍경이 떠오른다. 영화는 루이비통을 메고 이케아로 집을 꾸민 채 그럴듯한 일상을 영위하지만 정작 그 내면은 죄와 병으로 일그러진 인물들을 비춘다. 그들 깊은 곳에 자리한 죄책감, 수치심, 분노를 감지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인간 자신이 아니라 '트롤'이다. 트롤의 입장에서라면, 죄책감과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인간, 그 인간다움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겠다.

몇 년 전 봤던 영화 '만추' 생각도 난다. 거기 이런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식사를 하다 말고 느닷없이 화를 내며 옆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놀란 여자 주인공이 달려와 무슨 일이냐 묻자 그는 말한다. "이 사람이 내 포크를 썼어요, 내 포크를. 그런데 사과도 안 하잖아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러자 잠시 주춤하던 여자 주인공 역시 같은 편이 되어 "사과해요. 포크 쓴 거 사과하라고요" 소리친다. 당황한 옆 사람은 결국 "미… 미안해" 용서를 빈다. 너무 늦은 용서를. 물론, 이 속에는 숨은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정말이지 실수로 남의 포크를 사용했을 뿐이라 해도 적절한 사과를 건너뛰어선 안된다. 우리 포크는 생각보다 예민하고 또 날카롭다.

/박소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