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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공감]'여풍당당' 이경자 대한노인회 연수구지회장

박경호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20-04-01 제11면

인생은 110m 허들경기… 나는 110살까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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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노인회 인천 연수구지회 사무실이 있는 인천 연수구 노인복지관 앞에서 만난 이경자 지회장이 자신의 인생살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결혼 7년만에 다시 생업전선… 양계농장 거쳐 김치공장 대성공
정치인 남편 뒷바라지·사업 파산 도미노·암 투병생활 '고난 연속'
67세때 방통대 입학·딸 대신 박사학위 도전… "마음 늙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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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만 65세 이상 노령인구는 813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5.6%에 달한다.

 

노후생활의 핵심적인 커뮤니티인 경로당 운영은 대한노인회 산하 전국 244개 시·군·구 지회가 맡는다. 

 

노인들의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경로당은 전국에 6만5천여곳인데, 요즘 경로당을 가보면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그동안 노인회 여성지회장은 전국에서 6명뿐일 정도로 드물다.

인천에서는 이경자(77) 대한노인회 연수구지회장이 최초의 여성 노인회장으로 최근 당선돼 4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한다. 

 

전국 7번째 여성 노인회장이다. 인천 연수구에 있는 경로당 158곳의 살림살이를 살림꾼의 손길로 야무지게 매만진다는 포부다. 

 

여성 노인회장이 가꿀 경로당의 모습은 지금과는 어떻게 다를지 지역사회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이경자 회장은 한때 성공한 사업가였고, 현재는 박사학위과정을 밟고 있는 만학도다. 

 

지역사회에서 손꼽히는 여걸(女傑)이다. 그 인생살이도 무척이나 굴곡이 많다. 학창시절 육상선수였던 이경자 회장은 인생을 '110m 허들경기'에 비유하곤 한다. 

 

그는 "110살까지 살기로 작정하고 허들처럼 10개의 장애물 넘기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다"며 "지금은 장애물 9개쯤 넘은 것 같다"고 말했다.



공감인터뷰 이경자연수구노인회장2

이경자 회장은 1943년 인천 연수구 동춘동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때 동춘동은 송도유원지를 낀 바닷가였다. 이 회장이 태어날 당시는 동네에 10가구밖에 살지 않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기간 송도유원지 옆에 있는 교실 4개짜리 송도초등학교에 다녔는데, 동네에서 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이경자 회장뿐이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6·25때라서 동네와 주변 고아원 남자아이들이 얼마나 짓궂은지 학교 가는 여자아이를 너무 괴롭혔다"며 "그걸 피하려고 초등학교 1학년 때 문학초등학교로 전학을 가서 청량산을 넘고 들판을 걸어 통학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경자 회장이 살던 동춘동은 가난했다. 전기도, 버스도 없었고 농사 지을 땅이 없는 피란민들은 조개를 잡아 생계를 이었다. 

 

그래도 부모가 공부한다는 딸을 말리지 않았다. 1956년 현 중구 답동에 있던 박문중학교에 들어갔다. 

 

'꼬마열차'라 불린 옛 수인선 협궤열차가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씩 학교와 동네를 오갔다. 

 

이 회장은 "꼬마열차를 놓치면 몇 시간을 걸어서 집에 와야 했고 수녀원에서 잘 때도 많았다"며 "매일 성당에서 우리 동네 전기 들어오고 버스 들어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정도로 동네가 깡촌이었다"고 했다.

동인천에 있던 인천여자고등학교에서는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멀고 힘든 학업을 포기하려 할 때 수학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 

 

옛 인천공설운동장(현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열린 인천지역 고교연합대회에 인천여고 대표선수로 나서 달리기, 높이뛰기, 멀리뛰기, 허들 등 4종목을 뛰었다. 

 

이경자 회장은 "올드 미스인 수학 선생님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도망가고 싶다고 했더니 나를 애관극장으로 데려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여줬는데,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여주인공 스칼렛의 말에 감격해 마음을 다잡았다"며 "어릴 적부터 산으로 뛰어다닌 실력으로 대회 성적도 좋았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송도유원지 직원으로 취직하려 했는데 "순경 백조차도 없어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경자 회장은 "그땐 은행 예금 많은 집 딸은 은행에 취직하고 그런 시절인데, 농사짓는 우리 집은 백 하나 없어 취직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열아홉에 동생 셋을 데리고 중구 인현동에 방을 잡아 장사하면서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다. 옛 시장관사(현 인천시 역사자료관) 주변 부잣집들을 돌면서 이른바 '양키장사'를 했다. 

 

이 회장은 "아침에 홍예문 쪽 양색시 집에서 미군 지프가 떠나면 양색시를 찾아가 양키물건 좀 PX에서 사다 달라고 부탁해 물건을 뗐다"며 "화장품이나 속치마처럼 한국에 없는 미군 PX 물품들이 인천 부잣집 사모님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스무살 때인 1963년 양키장사 고객으로 만난 부인으로부터 "딸을 이화여대에 입학시키고 싶다"며 이경자 회장이 서울로 데려가 숙식을 책임지는 가정교사를 해달라고 제안을 받아 취직했다.

 

인천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에서 양키장사도 계속했다. 

 

이 회장은 "구두 신고 명동거리를 휘저으며 멋지게 사는데, 24살에 혼인을 정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며 "초등학교만 나온 남편과 결혼해 동춘동에서 다시 농사를 짓는 시절을 보내야 했다"고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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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7년만인 1974년 이경자 회장은 다시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농사를 짓다가 운수업으로 바꾼 남편의 사업이 실패했고, 셋째 딸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달걀장사를 하면서 닭 500마리를 직접 키우기 시작했다. 몇 년 후 1만마리까지 늘렸다. 

 

그리고 나서 1978년 연수동에 김치공장을 차렸는데, 주변에서는 "누가 김치를 사서 먹느냐"며 "이경자가 미쳤다"고 수군댔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장사를 했던 사업가 기질 때문인지 이경자 회장의 김치공장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선창산업 정해수 회장님이 내가 트럭에 애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납품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다면서 판로를 뚫어줬다"며 "선창산업, 대한제분, 동일방직 같은 공장 41곳에 김치를 납품했다"고 말했다.

사업은 탄탄대로로 뻗어 나갔다. 김치공장뿐 아니라 목재소와 가구공장, 홍익웨딩홀, 연수주유소, 여성병원, 산후조리원, 찜질방 등을 차리면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이 회장은 "돈을 너무 많이 벌게 되니까 연수구에 없는 걸 하나씩 차렸다"며 "주유소는 삼화고속 버스들을 유치하느라 대형 탱크 3개를 지하에 박아넣었다"고 말했다. 

 

이경자 회장의 남편은 정유택(1943~2013) 전 인천시의회 의원이다. 제2대, 제3대 인천시의원을 지냈다. 정치인 남편 뒷바라지도 이경자 회장의 몫이었다. 

 

이 회장은 "남편이 40대부터 몸이 좋질 않아서 내가 일선에서 뛰어야 했다"며 "남편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호주머니에 있는 걸 전부 도와주고 집에 돌아올 정도로 사람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가 이경자 회장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그해 사업이 차례로 무너지고 이듬해 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했다. 암세포가 목 주변까지 전이돼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000년에는 남편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목소리를 회복하기 위해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스피치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10년 넘는 세월을 암흑같이 보냈다. 아프고 나니 문득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경자 회장이 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해 늦깎이 대학생이 된 때는 그의 나이 67세. 

 

새벽 공부 끝에 6년 반 만에 방통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인하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본격적으로 노후생활의 인생설계와 경력단절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석사 학위를 따낸 후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에서 융합사업경영학 박사 학위에 도전하고 있다. 

 

이 회장은 "홍익대 미대를 나온 딸이 2016년 50세에 세상을 떴는데, 평소 내가 딸에게 박사 학위 받으라고 그렇게도 보챘다"며 "딸 대신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박사까지 도전하게 됐다"고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학업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틈틈이 백세생애설계사, 평생교육사, 노인지도교육사, 심리상담사 등 노인관련 자격증도 취득했다. 2014년부터는 연수구 노인대학 학장을 맡아 노인교육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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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이경자 회장은 "30년 넘게 오전 2시에 일어나서 새벽시장을 봤고, 안 해본 일이 없다"며 "박사 과정이건 노인회장이건 그간 살면서 부닥친 풍파에 비하면 어렵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경자 회장은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는 노인들에게 "마음이 늙어선 안 된다"며 "여성들도 남은 인생은 공부에 도전하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젊은이들에게 이경자 회장은 "경험이 살리는 것"이라며 "겨울을 나야 새싹이 돋듯 젊었을 때 고생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노인회 연수구지회장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할 일이 산더미라고 한다. 

 

인천에 없는 노인회관을 처음으로 연수구에 마련해야 하고, 처음으로 경로당 회장들에게 활동비를 지원하는 방안도 추진해야 한다. 

 

이경자 회장의 말대로 인생이 110m 허들경기라면, 그는 아직 결승점까지 30%나 더 뛸 일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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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사진/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경자 지회장은?

▲ 1943년 인천 출생 ▲ 인천여자고등학교 졸 ▲ 방송통신대 교육학 학사 ▲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 석사 ▲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융합산업경영학 박사 과정 ▲ 연수구노인대학 학장 ▲ 홍익농장·미성김치·홍익목재·홍익부페웨딩홀·홍익개발·홍익산후조리원·연수주유소·홍익찜질방 전 대표 ▲ 평생교육사 2급·사회복지사 2급·심리상담사·한국생애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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