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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죽향의 짧은 만남 긴 이별
김윤배 발행일 2020-07-03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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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연관정에서 처음만난 김립
아버지 소식에 함께 찾아나섰지만
이미 세상떠난이 거처서 대성통곡
평양으로 돌아와 강나루에 이르러
울먹이며 남긴 詩한수 이후 못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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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시인
지금쯤 대동강은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유유히 흘러갈 것이다. 대동강에는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부벽루나 을밀대, 연관정 같은 명소가 줄지어 있다. 연관정은 절벽 위에 날아갈 듯 솟아 있는 정자다. 성종 때 평안감사 허굉이 지은 것으로 규모가 크고 건축미가 뛰어난 것이 특색이다.

연관정에서 굽어보는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신비한 은종을 감추고 있다는 백은탄이 건너다 보이고 능라도가 대동강을 가른다. 대동강에는 수많은 놀잇배가 떠 있었을 것이다. 여러 시인들이 대동강에 와서 사랑과 이별을 강물에 얹어 노래했다. 대동강은 사랑 앓는 시인들의 영원한 은유였던 것이다. 조의겸은 '사월이라 첫 여름 꽃은 이미 져버리고/주렴 바깥 훈풍에 제비가 날아드네/언덕 위 푸른 풀에 강물도 푸르니/이즈음 어느 누가 헤어지고 애태울꼬'라고 노래했다.

김립(병연, 삿갓 1807~1863)은 '깎아지른 절벽 위엔 높은 문이 서 있고/만경창파 대동강엔 푸른 물결 굽이치네/지나가는 봄 나그네 말술에 취했는데/천만 가지 수양버들 십리 강촌에 늘어졌구나/외로운 따오기 노을빛 끼고 날아들고/짝지은 갈매기 눈발처럼 휘나르네/물결 위에 정자 있고 정자 위에 내가 있어/초저녁에 앉았는데 밤이 깊자 달이 뜨네'라고 연관정을 노래했다.

진달래 만개한 봄이었다. 연관정 옆에서 퇴기 10여 명이 화전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김립은 고소한 기름 냄새에 발길을 멈추었다. 화전 몇 장과 술 몇 잔을 얻어먹고 일어서려는데, 그를 알아본 퇴기들이 자작시를 내밀었다. 시답지 않은 시를 훑어보던 중, 눈에 확 띄는 시 한편을 읽게 되었다. 죽향의 시 '강촌의 저녁 풍경'이었다. '실버들 천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구름인양 눈을 가려 마을을 볼 수 없네/목동의 피리 소리 그윽이 들리는데/보슬비 내리는 강촌에 날이 저무네.'로 끝나는 시였다. 이 시의 화답시가 앞의 김립의 시인데 그걸 아는 사람은 죽향 뿐이었다. 죽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퇴기라고는 하지만 서른을 막 넘긴, 곱고 순수해서 매력 있는 여인이었다.

죽향은 이튿날 김립이 머물고 있는 영명사로 찾아왔다. 그녀는 이미 영명사 주지 벽암대사가 불가에 입문시키고 일영이라는 법명을 준 불자였다. 그녀는 80이 넘은 아버지, 예동철 옹을 찾아야 한다며 눈물을 지었다. 김립이 아는 인물이었다. 예 옹은 평양서 50리쯤 떨어진 중화고을 성인주막에 살았었다.

그 밤 김립은 죽향의 집에서 하룻밤을 신세지고 날이 밝자 죽향을 앞세워 중화고을로 향했다. 김립은 걸음을 옮기며 즉흥시를 읊었다. '봄은 갔는데 늙으신 몸 어떠하실까/방에 앉아 나들이도 안 하셨다니/두견새야 뭐가 그리워 애타게 우느냐/울음소리에 못다 핀 꽃 떨어질세라'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시를 감상하고 있던 죽향은 아버지를 위해 부르는 노래라는 걸 알고 서러운 마음을 담아 시 한 편을 읊는다. '간절히 그리운 임은 산속에 계시건만/소식 모르는지 너무도 오래였어요/오늘은 오솔길 밟으며 찾아오건만/석양에 사립문 닫힌 집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녀는 시를 읊고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찾아간 성인주막에는 예 옹의 지방이 놓여있을 뿐,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죽향은 대성통곡을 했다. 김립은 그녀를 부축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대동강 나루에 이르러 죽향은 김립에게 "언제 또 뵈올 수 있을는지요, 꼭 다시 뵈옵고 모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울먹이며 시 한 수를 남긴다. '대동강에서 정든 님과 헤어지는데/천만가닥 실버들도 잡아매지 못하네요/눈물 어린 눈으로 눈물 젖은 눈 바라보니/님도 애가 타시는가 나도 애가 끊깁니다' 김립은 차마 죽향의 눈빛을 바로 보지 못하고 화답시를 읊는다. '꾀꼴새는 버드나무 숲에서 울어 대고/나는 누각에 기대어 풀밭만 바라보노라/그대 보내고 나 홀로 언덕에 남으면/달이 질 때 설움을 어이 달래리' 김립은 목이 메어 더는 노래하지 못한다. 그 후 죽향은 김립을 만나지 못했다.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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