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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있는 에세이]가을이 춥다
김서령 발행일 2020-10-16 제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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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몇번 쓰다보니 어느새 가을
몇계절 사라져 지난 겨울 일도 생생
설레는 소식이든 촌스러운 조화든
따뜻한 소식 가지고 날아왔으면…
먼저 떠난 사람들 잘 지내길 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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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소설가
말괄량이 삐삐는 고아였다. 엄마는 삐삐를 낳다가 죽었고, 선장이었던 아빠는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물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삐삐는 아빠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아빠는 수영을 잘해 식인종이 사는 섬까지 헤엄쳐 갔고, 그 섬의 왕이 되었다고 믿었다. 당장 아빠를 만날 수는 없지만 아빠의 생애는 식인종 섬에서 계속되고 있을 거라 삐삐는 믿어서 아주 많이 불행하지는 않았다.

종종 나는 삐삐 같은 생각을 한다. 죽어서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여전히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언제나 용감했던 삐삐의 아빠가 식인종 섬에서 왕이 되었듯, 그림을 그리던 이는 푸른 초원이 펼쳐진 고갯마루에서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수를 잘 놓던 이는 요정들이 실을 잣는 나라에서 꼼꼼하게 실을 고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런 것을 할 때가 있다.

계절이 차가워지다 보니 마음이 차져서 그런 것인가. 마음이 차지다 보니 그리운 이들이 절로 떠올라 그런 것인가. 지난 겨울 들었던, 아주 차가운 부고 하나가 떠올랐다, 새삼. 참 이상한 부고였다.

"주말쯤 A의 부고가 전해질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전화를 받은 건 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화요일에 전화를 걸어 주말쯤 A의 부고를 전할 예정이라고 말하는 친구라니. 무슨 소리냐는 내 말에 친구가 찬찬히 대답했다. A는 갑작스럽게 뇌사 판정을 받았고 그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서울로 오는 중이라고 했다. 장기기증에 대한 의논이 끝나면 사망선고를 내리고 장례를 치를 예정이라고. 나는 혹시 주말로 예정된 장례가 조문객들이 편하게 들르도록 한 배려일까 봐 손가락 끝까지 차디 차졌다. 그래, 참 차가운 시간이었다.

어느 시절 지겹도록 만나며 A의 노래를 듣고 연주를 들었다. 마지막 통화에선 그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우리가 이렇게 안 보고 살아도 되냐, 인마!" 그래서 몇 번이나 공허한 약속만 했다. "미안해, 미안해. 우리 정말 시간 잡자. 이렇게 안 보고 살면 안 되지." 빈말이라는 것을 둘 다 알아서 우리는 내내 즐거웠던 옛 얘기만 들춰냈다. 그러고도 좋았다. 세상 모든 이별이란 것이 갑작스러운 것이라지만 그 부고는 여태도 갑작스럽다. A는 수영을 잘할 테니 이 아득하고 야속한 공간을 헤엄치다 마음에 꼭 드는 섬을 만나 자리를 잡을 것이다. 바다도 잘 보이고 구름도 잘 보이는 해안가 언덕에 편안히 앉아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칠 수 있기를, A의 옛 친구 우리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기도했다. 먼 길 잘 떠나. 잘 가, A.

보송보송한 조끼를 입혔는데도 여섯 살 아이는 이제 가을이 춥다고 했다. 다이소 매장에 들러 이것저것 집어 드는데, 아이가 말도 안 되게 화사한 벚꽃 조화를 두 손 가득 들었다. "엄마, 나 이거 사고 싶어." 나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조화라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가을에 벚꽃이라니. 다음에, 다음에…. 내려놓으려는데 아이가 고집을 부렸다. "이거 내 방에 놓아두면 행복할 것 같애. 따뜻한 봄 같잖아. 안 추울 것 같애." 그 말에 그만 3천원짜리 조화 두 뭉치를 사고 말았다. 행복해질 것 같다는데, 겨우 6천원에 따뜻해질 것도 같다는데. 집에 들른 친구가 벚꽃 조화를 보고 촌스럽다며 타박을 했지만 나는 그냥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요즘 너무 이르게 추워서…."

마스크 몇 번 쓰다 보니 그만 가을이 와버렸다. 몇 계절이 뭉텅 사라져버려 지난겨울의 일도 이리 생생하다. 설레는 소식이든 촌스러운 조화든 따뜻한 소식 가지고 날아왔으면 좋겠다. 우리를 먼저 떠난 사람들도 어디서건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고.

/김서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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