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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칼럼]라면의 기억
이충환 발행일 2020-10-21 제19면
학창·군대·기자 시절 맛있게 먹었던 추억
배고픔·결핍 채워주는 가장 원초적인 마법
인천 어린형제에겐 치유하기 어려운 '악몽'
어른들의 잘못 '일생의 트라우마' 어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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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해운대에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다녔다. 자주 물난리가 났다. 도시의 배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였다. 만조와 집중호우가 겹치면 시장통과 주변 일대가 물에 잠겼다. 학교에선 수재의연금을 모았다. 우리 반도 성금으로 라면 세 박스를 샀다. 가장 피해가 컸던 아이가 그날 이후 등교하지 않았다. 남은 라면 한 박스를 우리 집 다락에 보관했다. 전기공사업 면허를 따내겠다며 어른들이 밤낮없이 출타 중인 까닭에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다. 아무도 급장의 비밀을 몰랐다. 아주 오랫동안, 다락의 그 수재의연금 라면까지 포함해 정말 지겹도록 라면만 먹었다. 맛있는 음식도 질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전학했다. 결혼한 큰누나 집에 얹혀산 지 삼년만이었다. 보광동 비탈진 동네에 어른들이 살고 계셨다. 서울 학생들은 까만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다녔다. 궁리하다 신고 있던 청색 운동화에 검정색 페인트를 칠했다. 덧칠하고 연탄아궁이에서 말리길 서너 달 했더니 끝내 '킹콩' 가죽신이 됐다. 깔깔 놀려대던 친구들과 함께 야채튀김을 얹은 라면을 사 먹었다. 지금의 서울지하철 4호선과 경의중앙선 이촌역 부근이었다. 배를 채운 우리는 삼각지를 지나고 남영동을 거쳐서 남산 소월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라면으로 바꿔먹은 버스회수권의 대가가 너무 컸다. 라면은 우정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했다. 왕십리의 후배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해를 넘겼다. 2·12 총선을 앞두고 DJ가 귀국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국내에선 YS가 신군부정권에 홀로 맞서고 있었다. 휴학 중인 대학생들이 1월에 대거 입영통보를 받았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은 기표한 용지를 일일이 중대장에게 보이고 투표함에 밀어 넣어야 했다. 그곳에서 증기로 익힌 라면을 처음 맛봤다. 밥 찌는 기계에 라면사리를 차곡차곡 세운 식판들을 켜켜이 쌓아 넣고 뜨거운 김으로 쪄냈다. 따로 끓인 스프국물을 찐 사리 위에 끼얹어주었다. 제대 후 몇 번 그 맛을 재현해보려 했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올챙이 기자 시절, 인하대 후문엔 오직 라면 하나로 승부하는 집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천 토박이인 동기가 알려준 라면집은 가히 비교불가였다. 상호가 있긴 있었나. 가파른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탁자 3개가 전부인 식당. 부부가 화염이 사나운 프로판가스 버너에서 연신 라면국물이 끓어 넘치는 양은냄비를 들어냈다. 풀어헤친 계란이라고 해봐야 한 숟갈도 안 되고, 썰어 넣은 파조차도 있는 둥 없는 둥 한데 어떻게 그런 천상의 맛을 낼 수 있었을까. 오래전 안경 맞추러 들렀다가 라면집이 있던 골목을 찾아봤으나 반듯한 새 건물뿐이었다.

라면은 가장 원초적이고 공격적인 욕구인 배고픔을 달래고, 결핍을 채워주는 구원의 기억이다. 아무리 어려웠던 날들이었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 빙그레 미소 짓게 만드는 마법의 기억이다. 어디에서 태어났든, 어느 신병훈련소를 거쳤든, 어느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든, 똑같이 적용되는 공평의 기억이다. 라면은 그래서 한국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억이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참혹한 일을 겪은 인천의 열 살과 여덟 살 형제에게는 예외의 기억이 될 것 같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 치유하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

형제는 돌봄이 필요한 위기의 아이들이었다. 한겨울 설거지하는 손이 너무 시려 고무장갑을 사러오고, 깊은 밤이 무서워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형제를 보다 못한 이웃주민들이 여러 차례 신고를 했다. 지자체, 아동보호전문기관, 학교, 법원 모두가 아이들이 처해있는 위기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들 자기 앞에 그어져 있는 경계선 안에서만 움직였을 뿐이다. 그 편의적이고 형식적인 선을 뛰어넘어 형제를 보듬으려는 시도는 아예 없었다. 뒷북치는 정치권이나 총리나 대통령이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어른들의 잘못이 형제에게 추억으로 남아야 할 '라면의 기억'을 악몽으로 만들어버렸다. 일생의 트라우마는 또 어쩔 건가.

/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