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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칼럼]'백신'의 정치공학
이충환 발행일 2020-12-30 제19면
트럼프는 "대선이후 백신개발 발표는 음모"
獨·佛·伊 등은 동시접종 조율 공동성명 결속
日 스가 지지반등 노림·中 시진핑 치적 선전
우리도 '늑장확보' 논란… 자만한 정부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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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백신(vaccine)'이라는 이름을 처음 쓴 이는 '미생물학의 아버지' 루이 파스퇴르다. 가축 질병이었던 닭 콜레라와 탄저병의 예방법을 개발한 파스퇴르는 인간의 감염성 질환으로 연구를 확장했다. 광견병까지 정복한 1880년대에 이르러 예방접종을 위해 독성을 줄인 균으로 만든 약을 '백신'이라 이름 붙였다. 80여년 전 에드워드 제너가 소의 우두를 이용해 인류를 괴롭혀온 천연두의 예방법을 개발한 데서 영감을 얻었던 그는 암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바카(vacca)'에서 약 이름을 찾았다. 제너를 기리는 헌사였다. 영화로 치자면 일종의 '오마주'였던 셈이다.

인류를 역병에서 구해낸, 숭고하고 헌신적이며 존경의 의미까지 품고 있는 백신이 한 세기 반이 지나 돌연 정치공학적 키워드로 바뀌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 개발 발표가 대선 이후에 이뤄진 것은 자신의 재선을 막기 위한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트럼프와 백악관은 '트럼프 백신'이라 부르면서 자찬하고 있다. 지난 21일 방송과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백신을 공개 접종한 바이든 당선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이라고 추켜세우는 여유를 부렸다.

유럽에선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 27개 EU 회원국들이 일제히 백신 접종에 들어갔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백신을 빨리 승인하라며 유럽의약품청을 강하게 압박한 결과다. 앞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백신 동시접종을 조율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백신을 정치적 매개로 삼아 전에 없이 강한 결속을 보여주었다. "내년 상반기까지 모든 일본인이 백신을 맞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누차 밝혀온 스가 일본 총리는 이미 확보한 충분한 양의 백신과 내년 초 조기접종을 지지율 반등의 디딤돌로 삼으려 한다. 중국은 자체 개발한 시노백 백신을 시진핑 주석의 치적으로 내세우며 '우한포비아'를 망각의 강 너머로 밀어내고 있다.

이 겨울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정부의 백신 확보 실기(失機) 여부를 둘러싼 논란으로 세밑 정국이 뜨겁다. '조국사태'로 시작해 이제는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윤석열사태', 스무 번이 넘는 대책에도 여전히 답 없는 '부동산사태'와 더불어 정권의 안위를 좌우할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그 잠재적 파괴력은 집권여당이 '제2의 부동산사태'가 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일 정도다. 성마른 사람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레임덕'까지 연결 짓는다.

사실 논쟁 자체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정을 총괄하는 국무총리가 백신 조기도입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음을 시인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최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한 정세균 총리는 "정부가 코로나19 백신 도입 논의를 시작할 당시 확진자 수가 적었기 때문에 백신에 크게 의존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고 밝혔다. "철저한 방역, 치료제를 통한 환자 최소화, 그 다음에 백신 사용을 통해 코로나19 상황으로부터 가장 빨리 벗어나는 전략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오판(誤判)은 정부 스스로 'K방역'의 함정에 빠져든 결과다. K방역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주는 국민을 배경 삼아 칭찬에 취하고, 평가에 환호하며, 부러움에 자만한 정부가 자초한 낭패다. 백신이야말로 진짜 '게임 체인저'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가볍게 여기고, K방역을 호위의 방패막이로 삼은 정치적 타산의 필연이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의 부작용 사례를 확인한 뒤 접종하기 위해서"라거나 "백신을 세계 최초로 맞는 상황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변명은 차라리 가소롭다. 정 총리처럼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면 그 다음 말이 간단·단순·명료해지는 법인데 그걸 억지로 피하려하니 말이 말 같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논쟁을 벌이는 사이 주한미군을 위한 백신이 지난 2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국내에 첫 반입됐다. 그들에겐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우리에겐 그림의 떡이다. 오래된 사진첩 속의 흑백사진을 다시 꺼내보는 것 같다. 이 불편하고 자존심 상하는 기분은 도대체 무어람.

/이충환 언론학박사(경인교대 미디어리터러시연구소)·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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