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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아야 할 역사 '미서훈 독립운동가'
이원근 발행일 2021-03-01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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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2021.2.28 /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일제 피해 주민 목재지원 '홍헌'
3·1운동 고문 후유증 사망 증언
후손들, 보훈처 유공자등록 신청

화성시, 전담팀 꾸려 발굴 불구
홍면옥·차경규·홍열후 등 아직
형사기록 등 부실 선정 어려움

"공훈이 있는데도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돌아가신지 100년이 넘었는데…."

화성지역에서의 3·1만세 운동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치열했다. 1919년 3월 송산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제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모자를 체포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 때문에 당시 200여호의 가옥이 소실됐고 175명이 일제에 검거됐다.

당시 홍헌(당시 21세)은 자신의 산에서 벌채를 해 이재민들에게 무상으로 목재를 나눠주고 집을 복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당시 작성된 '이재민 재목 배급자 명부'에는 송산면 4개 리의 이재민 138명, 삼존리 32명, 육일리 29명, 사강리 42명 등 총 241명에게 목재를 나눠줬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마을 주민들은 그의 공로를 기려 은주전자와 은잔을 만들어 영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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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헌의 묘소와 그 옆에 화성시가 세운 기념비. /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 홍헌선생 후손 제공

여기에 자손들은 최근 홍헌에 대한 새로운 증언을 내놨다. 홍헌은 3·1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20년 11월 숨을 거뒀는데 만세운동 당시 종로경찰서에서의 고문이 원인이 됐을 수 있다는 것이다.

홍헌의 손자 홍완유(91)씨 아내인 김현순(87)씨는 "당시 '3·1운동의 주모자'라고 주장했던 고모부(이씨)를 따라다녔던 홍헌 선생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시어머니로부터 들었다"며 "당시 홍헌 선생이 종로경찰서 뒤쪽으로 나왔고 출혈이 많아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홍헌이 직접적으로 만세운동에 가담했는지, 옥고를 치렀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 없다. 일본 경찰로부터 사찰을 받아 신경쇠약으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화성시가 지난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전담팀을 꾸려 홍헌을 당시 지역 이재민을 도운 독립운동가로 알리고 있지만, 아직 독립유공자 인정은 받고 있지 못하다.

홍헌의 후손들은 이 증언들을 더해 최근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마쳤다. 김씨는 "지난해 12월 비석도 세워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홍헌 선생님의 업적이 알려지게 됐다"며 "좋은 일을 하다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그동안 아무 것도 못했구나'라고 생각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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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홍헌이 화성 송산지역 만세운동 당시 일제의 보복으로 집을 잃은 이재민을 위해 목재를 배부하고 기록한 문서. /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 홍헌선생 후손 제공

화성 지역에는 화성시가 발굴한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미서훈으로 남아있다. 송산 지역 3·1운동을 이끌면서 일본 경찰의 총에 맞기도 했던 홍면옥은 월북설 등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또 갈비뼈가 부러져 숨쉬기조차 힘들도록 옥고를 치렀던 차경규는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고 알려진 차봉구(아명)와 호적상 이름이 달라 형사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홍남후, 홍관후와 함께 사강리 일대 만세 운동에 참여해 주민들과 만세 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순사부장을 처단했던 홍열후도 옥고 기록이 없어 미서훈 독립운동가로 남았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8년부터 독립유공자 최소 수형·옥고 기준(3개월)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했더라도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 동조한 것이 아니면 사안별로 판단해 포상을 검토하는 등 기준을 변경했지만, 독립운동가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화성시 관계자는 "좌우 이념을 떠나서 독립운동의 행적은 바로 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2면(잊힌 영웅, 되찾은 영광…인천대, 독립유공자 포상 '역대 최다' 발굴)

/이원근기자 lwg33@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