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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빚다, 흥에 취하다: 우리동네 술도가를 찾아서·(16)] 아버지의 열정 잇는 '화성 배혜정도가'

김학석·민정주
김학석·민정주 기자 zuk@kyeongin.com
입력 2022-07-18 21:10 수정 2022-07-19 09:26

"하찮은 것도 갈고 닦으면 명품"… 막걸리처럼 걸쭉한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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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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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배혜정도가의 배혜정 대표가 막걸리의 고급화를 추진한 것은 1990년대였다. 요즘에야 전통주의 고급화 또는 프리미엄 막걸리라는 것이 전혀 튀지 않지만 당시에는 '도대체 그게 뭐냐'는 반응이 보통이었다. 배 대표는 자신이 직접 막걸리 고급화를 추진한 이유를 세 가지로 손꼽았다.

배 대표는 건설사 일본 지점장으로 일했던 남편과 함께 5년여 간 일본에서 산 적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흔치 않았는데 일본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활발히 하는 것은 그녀에게 인상적이었다. 일본인들이 문화를 만들고 가꾸는 것도 눈여겨보았다.

배 대표는 "별것도 아닌 것 같은 것도 갈고 닦아서 매우 훌륭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감명 깊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며 "하찮은 것도 갈고 닦으면 명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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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정도가 로고./박소연기자 parksy@kyeongin.com

우리나라 주류업계 최초의 여성 CEO로 사업을 시작할 마음을 먹은 것, 명품이 되는 것은 만드는 사람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에 더해 마지막 이유는 배 대표의 아버지다.



그녀는 "아버지가 간장 사업을 하셨으면 나도 간장 사업을 했을 것"이라며 "막걸리 사업을 하게 된 인연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고, 아버지가 사업을 하도록 이끌어 주셨고, 아버지도 막걸리의 고급화를 꿈꾸셨다"고 말했다.


국내 주류업계 첫 여성 CEO 도전
故 배상면 국순당 회장 유지 이어
"포기땐 가족·여자 망신이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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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정도가의 배혜정 대표가 우곡생주의 맛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화성/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고급화를 추진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배 대표는 "당시 고급화를 위한 인프라가 국내에 전혀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고급 막걸리를 일본에 수출하고자 했다. 수출을 하려면 유통기한이 길어야 한다. 유통기한을 늘리는 방편 중 하나는 페트병이 아닌 병에 막걸리를 담는 것이다.

또한 일본 사람들은 500㎖ 용량의 술을 선호했다. 당시 국내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막걸리는 750㎖들이 페트병에 담겼다. 막걸리 생산이야 가업이니 어떻게든 해내겠는데, 포장 용기 만드는 일이 그렇게 힘들 줄은 예상치 못했다.

배 대표는 "일단은 유리병을 찍어낼 금형이 없었다. 그렇다고 만들자니 당시 돈으로 몇 억원이 들어가는데 쌀 살 돈도 부족했던 회사가 그만한 돈을 투자할 수는 없었다. 다른 회사가 버린 금형을 3천만원에 사다가 다듬어서 500㎖ 병을 만들었다. 이런저런 고생을 하고도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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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진출이 흔치 않았고, 가업을 이은 일이어서인지 배 대표는 이따금 취미생활로 사업을 한다는 오해를 샀다고 한다.

그녀는 "적당히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정말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버지를 쫓아가 왜 나한테 사업을 시키셨냐며 투덜대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예술은 8년, 사업은 10년'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예술계에서 일가를 이루는 일보다 더 힘든 게 사업이라는 말씀이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낮게 보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셨다"며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진검승부를 하는 사람이다. 사업을 중도에 그만두면 인생을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가족들에게 망신, 여자 망신이 된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의 뒤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계신다"고 말했다.

20여년간 다채로운 제품 개발 경험
젊은층 겨냥한 '호랑이 생막걸리'
단맛·산미 풍부 '우곡생주' 자부심
아버지가 주신 '부자' 향미 뛰어나


20여 년 간의 고생담을 길게 풀어놓았지만 사업의 핵심인 주류 제조에 관해서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배 대표는 "제품 개발을 정말 많이 했다. 개수로는 우리가 제일 많을 것이다. 금방 사장된 제품도 많다. 너무 시대를 앞서간 제품도 있다. 지금 다시 출시하면 잘 팔릴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제품들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제품도 만들 수 있다"며 "제품 하나를 탄생시킬 때마다 엄청난 고생이 뒤따르지만 나는 내가 이 사업을 하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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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정도가에서는 자색고구마·포도 막걸리 부자, 호랑이막걸리 등 다양한 주류를 생산하고 있다. 화성/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배 대표가 가장 아끼는 제품은 '우곡생주'다. 막걸리의 재료는 단순하다. 쌀과 물. 누룩을 만드는 노하우가 품질의 차이를 만든다. 우곡생주는 누룩의 발효과정을 통해 맛의 조화를 이루어낸 프리미엄 막걸리다.

쌀이 가진 단맛과 발효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맛이 진하게 풍긴다. 쌀이 이렇게 달 수가 있나 싶다. 그에 못지 않게 산미도 풍부해서 맛에 빈틈이 없는 느낌이다. 질감도 걸쭉해서 입안에 오래 머물며 풍미를 입안 가득 전한다. 2019년 열린 '대한민국 우리술 대축제'에서 탁주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우곡생주는 여느 막걸리보다 뻑뻑한 술이다. 가수를 거의 안 한다. 맛이 진해서 호불호가 있기는 하다. 술을 많이 드시는 분들보다 술을 좋아하는 분들이 더 선호하시는 것 같다. 색다른 술이라는 개념이고 식전주로 좋다"고 소개했다.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은 '호랑이 생 막걸리'다. 젊은 사람들을 겨냥한 술로 깔끔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가장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술은 '부자'다. 배 대표의 아버지 고(故) 배상면 국순당 회장이 남긴 술이다. 국내에서 최초로 병 막걸리로 출시된 술이기도 하다.

배 대표는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술이다. 이걸로 사업을 시작했다. 누룩의 향미가 뛰어난 술"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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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정도가에서 판매 중인 술./박소연기자 parksy@kyeongin.com

이제 장성한 아들이 함께 사업을 이끌고 있다.

배 대표는 "아들과 사업 방향에 대해서는 고급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데서 합의를 봤다. 그러나 역시 세대가 다르니 의견 차이가 있다. 나는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고 아들은 현대적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한다. 제품 이름을 영어로 짓거나 디자인을 너무 세련되게 하려고 한다. 요즘은 내가 많이 양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업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요즘 막걸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우리 사업도 안정됐다. 양조장들도 많아져서 저마다 경쟁이 치열하다. 경쟁은 사업의 숙명이고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전통주 시장이 경쟁하며 발전해 가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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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김학석·민정주기자 zu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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