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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특별기획 PART2·(1)] 모진 역랑에 쫓기듯 살아온 삶… "국가폭력 분명히 알려지길"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 기자 jebo@kyeongin.com
입력 2022-11-20 20:20 수정 2023-01-16 10:33

낙인 숨기며 살아온 50년, 동생 진동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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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시 단원구 경기창작센터 내 선감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선감도의 과거 모습.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짧게 자른 머리에 깔끔히 정리한 눈썹과 수염,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한 뿔테 안경까지. 선감학원 피해자 진동(60·가명)씨의 첫인상에서 지난날 고통의 흔적은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정돈된 외형만큼 그의 표정과 말투에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지난 5일 안성 소재 자택을 방문한 취재진에게 오렌지 주스를 내어주던 그의 모습은 사뭇 여유로워 보였다.

그러나 부엌 식탁에 마주 앉은 진동씨의 호흡은 곧 가빠졌다. 여덟 살 나이에 선감도로 끌려갔던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달라고 질문한 직후였다. 고요했던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연신 눈물을 훔치던 진동씨의 두껍고 거친 손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모진 역랑 앞에 늘 쫓기듯이 살았을 그의 삶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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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안성 소재 자택에서 만난 진동씨가 선감학원과 관련한 자신의 서류를 보고 있다. /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

진동씨는 선감학원과 관련한 모든 기억을 봉인한 채 살아왔다. 그는 기억의 공간 한편에 크고 단단한 벽을 둘렀다. 선감학원에서의 참혹했던 기억은 그 안에 전부 담았다. 스스로 잊고 살면 자신이 선감학원 출신이란 사실을 아무도 모를 거라 여겼다. 국가가 찍은 부랑아란 낙인을 숨길 그만의 방법이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선감학원이란 존재를 애써 잊고 살던 진동씨에게 2년 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처는 선감학원사건 피해자 신고센터. 과거에 당한 피해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떼 센터에 접수하라는 안내전화였다. 기억의 벽이 일순간 허물어진 순간이었다.



"센터 전화를 회사에서 받았는데, 하도 눈물이 나서 사무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그날은 주차장 한편에 앉아 울다가 그냥 퇴근했어요. 그 이후로 운전을 하다가도, 혼자 앉아 있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계속 우는 거예요.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 그런 기분이었어요."

참혹했던 기억 잊고 40년 넘는 세월 보내
보호자·집 있어도 수원역서 잡혀 끌려가
부실한 끼니 참고 황토 먹으며 5년 버텨

두 살 터울 형인 진성(62·가명)씨와 1970년 선감학원에 강제 입소하게 된 진동씨는 분명 부랑아가 아니었다. 삼형제는 당시 화성군 봉담면 내리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가정사 문제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지만, 형제의 신원을 보장할 보호자와 되돌아갈 집이 존재했다.

형제는 그러나 큰형이 돈벌이를 하던 수원역에 놀러갔다가 제복을 입은 경찰들에게 길거리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수집당했다. 5년간의 지옥 같은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마산포에서 배를 타고 선감도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줬어요. 반찬은 단무지랑 새우젓이었는데, 단무지는 손으로 누르면 푹 들어갈 정도로 삭은 상태였고,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새우젓에 든 새우 머리를 뜯어 보면 조그만 구더기들이 있었어요."

한창 먹고 클 나이였음에도 식사는 언제나 부실했다. 진동씨는 변비로 고생할 것을 알면서도 흙을 퍼먹었다. 그만큼 굶주렸다. 황토의 반질반질한 부분은 흙이 아닌, 단맛만 나지 않는 초콜릿같은 느낌이라 원생들이 자주 먹었다고 한다.



진동씨는 오전에 학교를 갔다가 오후에 돌아와 밭과 염전 등을 오가며 강제노역을 했다. 밤이 되면 매질이 이어졌다. 원생 중 한 명이 잘못을 하면 원생 전원이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봐주는 경우는 없었다.

"기숙사에는 방장들이 있었는데, 걔네들한테 엄청나게 맞았어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 되면 누구 한 명이 잘못했다는 이유로 단체로 맞고 기합을 받는 거예요. 곡괭이 자루 같은 걸로 때리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게 한 다음에 잡고 돌리는 식으로 고문을 해요. 이거 엄청나게 아픈데, 그 어린 나이에 별의별 기합은 다 받아 봤어요."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가 됐을 무렵, 진동씨는 형과 함께 선감도를 빠져나왔다. 형제는 당시 선감학원에서 부천의 한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집으로 돌아가진 못했지만, 형제는 노역과 매질이 없는 고아원에서의 생활에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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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 입소 당시 진동씨 원아대장. 기본적인 생년월일도 잘못 적혀 있다. /진동씨 제공

"선감학원에서 갑자기 육지로 나가라는 거예요. 그 당시 저는 어렸기 때문에 '갑자기 왜 우리를 내보내주는 거지'라는 그런 생각만 했어요. 선감도에서 나올 수 있던 이유도 최근에 알게 됐어요. 축산부에서 일하던 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나 봐요. 그 모습을 본 축산부 선생이 우리 형제 만큼은 책임지고 내보내 줄테니 나쁜 생각하지 말라고 형한테 이야기 했었대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열 몇 살 밖에 안 된 형이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고아원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진동씨는 스웨덴의 한 가정으로 입양될 예정이었고, 이 소식을 접한 진성씨가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갔다. 자신이 옆에 있으면 동생이 입양을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쓸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과 떨어져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진동씨도 고아원을 몰래 도망나왔다.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주변에 도움울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진동씨는 고아원에 찾아와 봉사활동을 했던 대학생 형·누나들을 떠올리며 인천의 한 대학교로 향했다. 학교 근처에서 이틀밤을 지낸 진동씨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형과 재회했다.

그때부터 형제는 진짜 부랑아가 됐다. 남의 집에 찾아가 밥을 빌어먹고, 청과물 시장 상인들이 버린 썩은 과일도 주워먹었다. 구두를 닦고, 껌을 팔며 돈을 벌었다.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도리가 없었다.

"저는 선감도에 갔다 오고 부랑아가 됐지, 그 전에 부랑아는 아니었어요. 갔다 오고 나서도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부랑아였지만, 저는 그 어린 나이에 살아 보겠다고 도둑질하고, 사기치는 것 빼놓고는 정말 별의별 일은 다 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도 없었고요."

초등 6학년 나이에 빠져나와 고아원 이동
"국가의 낙인 부랑아 꼬리표 떼려 살아와
설령 부랑아여도 때리고 일 시킨건 잘못"

30대로 접어든 1990년대가 돼서야 진동씨는 인천시에 정착해 예전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부랑아'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한 여정이었다. 남들에게 책 잡히지 않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게끔 살아가려고 부단히 애썼다.

아내에게 선감학원에서 겪은 일을 속시원히 털어놓은 시점도 불과 7개월 전쯤이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믿지도 않아요. 우리 집사람도 안 믿어요. 이해를 못하더라고요. 제가 그렇게 살아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저한테 '고생 하나도 안 하고 산 사람 같이 보인다'고 말해요. 근데 제가 그렇게 살려고 아등바등 발버둥 쳤던 것 같아요. 정말 처절하게 살았거든요. 외적으로는 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정작 속은 썩어 문드러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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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선감학원 희생자 유해시굴 작업 후 묘역에 국화꽃이 놓여있다. /김도우기자 pizza@kyeongin.com

진동씨는 원래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과거를 떠올리며 계속 우는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얘기라도 하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조금이라도 치유되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격리될 대상이 아니라 국가가 저지른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물론 당시 선감학원에 수용된 원생 중에 진짜 부랑아가 있을 수 있어요. 혹여 부랑아라 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을 강제로 일 시키고, 때린 건 잘못된 거잖아요. 거기 있었던 시간만큼은 모두가 피해자죠."

진동씨는 선감학원에 대한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 그곳에서의 기억을 다른 사람과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기업체 대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회장님 차량을 운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올해가 정년이지만, 제가 그만두고 싶을 때까지 일을 하라며 배려해준 분이에요. 그분께 거짓말을 했어요. 선감학원을 나와 고등학교까지 검정고시를 통과한 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요. 책 잡히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지만 살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 중에 하나예요. 언젠가는 제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날도 오겠죠."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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