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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 말(言)과 신자유주의

입력 2022-12-05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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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평소 출석을 부르지 않는 내가 그날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모두 불렀다. 2022년 10월31일 월요일, 154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저 참혹한 주말이 지난 뒤 처음으로 강의가 있던 날의 일이다. 중간시험이 막 끝난 뒤라서일까. 한눈에 보기에도 평소보다 수업에 참여한 학생의 수가 적은 게 마음에 걸렸다. 대답 없는 몇몇 학생들에게 강의가 끝난 뒤 전화를 돌렸다. 반가운 목소리가 하나둘 들려온다. 다음날까지 수업에 오지 않았던 모든 학생의 안부를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도 잠깐, 곧바로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슬픔이 몰려왔고 책임져야 할 자들의 말 같지 않은 말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

말(言)이란 무엇일까? 또 말이 통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말을 뜻하는 한자 '언(言)'은 입(口)에서 나오는 음파(≡)가 위쪽으로 퍼져나가는 모양을 본뜬 글자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입이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래에 있는 입(口)은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말이 통한다는 것은 높은 사람의 말이 아래로 전달된다는 뜻이 아니라 낮은 사람의 말이 위에까지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래로 높은 사람의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란 없다.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의 말은 아무리 목소리를 낮게 하더라도 다 알아서 듣기 때문이다. 


말, 낮은 사람 言 위까지 전달 의미
권력자, 아랫사람 말 잘 듣지 않아
 

 

그런데 높은 사람의 말은 말(言)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명령(令)이기 때문이다. 명령을 뜻하는 한자 령(令)은 입(口)이 위쪽에 위치하고 아래에 사람이 엎드려 기는 모양(入)을 본뜬 글자다. 곧 아래에 있는 사람이 신분이 높은 사람이 하는 말에 복종하는 모양을 그린 글자가 령(令)자의 본뜻이다.

명령, 곧 권력자의 말이 쉽게 전달되는 것은 그 말이 반드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하수인들이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은 잘 들리지 않는다. 때로 온몸을 던지며 죽음으로 항거해도 그들의 말은 세상에 반향을 일으키기 어렵다. 세상이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후 대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행안부 장관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열렸던 집회를 소요(騷擾)라고 표현했다. 집회를 일종의 소요 사태로 간주한 것이다. 대통령은 사고현장을 둘러보면서 "여기서 그렇게 많이 죽었단 말이야?"라며 반말로 물었다. 귀를 의심했다. 참사 희생자에 대한 도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유족들에 대한 배려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명령을 듣거나 명령하기만 하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 애초 희생자들의 절규나 유가족들의 슬픔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외신 기자의 질문에 웃음을 흘리며 말장난을 일삼는 국무총리도 다르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윗사람들 표현 결여
역사 거꾸로 흘러 왕·귀족 재탄생
타인 고통 못 느끼는 신봉자들 출현


인간은 타인의 처지에 자신을 놓을 줄 아는 존재라지만 이들은 그런 능력을 완전히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도 똑같은 인간인데 왜 그런 능력이 사라졌을까? 루소의 '에밀'을 읽어보면 답이 나온다.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왕은 백성을 동정하지 않는다. 왜? 자신은 백성이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평민을 동정하지 않는다. 왜? 자신들은 평민이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를 동정하지 않는다. 왜? 자신들은 결코 가난해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이 부를 독점하고 있던 시대의 글이다. 18세기 프랑스 시민들은 루소의 이 글을 읽고 혁명을 일으켜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렸다. 그로 인해 왕과 귀족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역사가 거꾸로 흘러 지금 왕과 귀족이 다시 탄생했다. 권력과 부가 세습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권력과 부의 결탁은 부자가 결코 가난해질 리가 없다는 생각을 현실화했다. 그 결과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이 대량으로 출현했다. 그들의 이념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고 그들의 언어는 신자유주의의 언어다.

/전호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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