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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5)] 고집 있던 소년, 7개국 휘젓는 공직자 길을 걷다

김명래
김명래 기자 problema@kyeongin.com
입력 2023-07-05 15:28 수정 2023-11-02 17:12
박정남 전 주가봉 한국대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박정남 전 주가봉 한국대사

그는 늦깎이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1991년 4월 제25회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했는데 응시 제한 나이(만 32세)를 몇 개월 앞둔 마지막 시험이었다. 그해 합격자 중 나이 순으로 위에서 3번째, 최연소 합격자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외무부(현 외교부)에 입부했다. 그렇게 된 사연이 있다. 

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인 1981년 외무고시 1차에 합격했다. 고교 시절부터 품어 온 외교관 꿈의 실현이 눈앞에 한발 다가왔지만, 불현듯 찾아온 회의감이 머릿속을 휘젓다시피 했다. 세상사 무심한 듯 영어 공부와 고시에 몰입해 온 청년에게도 눈과 귀가 있었다. '모두 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고, 붙잡혀 감옥에 가는데, 나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싸움에 나설 용기는 없었다. 소극적 저항이랄까. 고시를 포기했다. 집에 알리지는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부유했다. 
나만 개인의 영달을 추구해도 되는가
독재정권 당시 괴로움에 고시 접어
6·29 선언 후에야 부채의식 덜었다
만 32세, 늦깎이 외교관의 길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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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대사(왼쪽)의 군복무 시절. /박정남 전 대사 제공

남들보다 네다섯 살 늦은 나이에 사병으로 입대해 최전방 GP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중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뼈대로 한 6·29 선언이 나왔다. 6·29 선언 이후 국내 정세에 대한 판단은 각자 다르겠지만, 외교관을 꿈꿔 온 청년의 부채의식을 덜어내기엔 충분했다. 제대하고 1988년부터 외무고시에 다시 도전했다. 1991년 꿈에 그리던 외교관이 돼 약 28년간 외교부에서 그리고 세계 7개국(스리랑카, 미국, 폴란드, 이스라엘, 이집트, 러시아, 가봉)에서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박정남(63) 전 주가봉 한국대사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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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대사는 1968년 인천 송현동 외할머니댁에 오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사진은 1972년 2월 서흥초등학교 졸업식.

박정남 전 대사의 선대인(박제근)은 평안북도 박천 출신으로 해방 이듬해 형제들과 함께 황해도 해주를 거쳐 인천 문학동에 정착했다. 한국전쟁 기간 1·4 후퇴 때 열여섯 나이에 이등병으로 입대해 1976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박 전 대사는 1959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한 산골 마을에서 1959년 태어났다. 2남 4녀 중 장남이었다.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충남 연무대초등학교(현 연무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부친의 월남 파병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외가가 있는 인천 송현동 수도국산 똥고개 꼭대기 집으로 이사하면서 인천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외할머니, 큰삼촌 내외와 외사촌 둘, 누나와 남동생 등 여덟 명이 초가집에서 살았다.

평안북도 박천에서 황해도 해주 거쳐
아버지 따라 인천 문학동에 정착
초3때 송현동 똥고개 꼭대기집에 이사
큰삼촌 내외까지 여덟명 초가집 살이
참 가난하게 컸습니다.
외항선이 인천항에 들어오면 똥고개가 먼저 보여요.
황해는 누렇잖아요. 온 세상 바다가 이런 줄 알았습니다.
"연무대 있다가 인천에 오니까 사람들 정말 많더라고요. 서흥초등학교가 있는 송현동에서 저도 가난했고 친구들도 가난하게 컸습니다. 외항선이 인천항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이 똥고개였어요. 겨울에 연탄을 때야 하는데, 똥고개 밑 연탄가게에서 연탄 두 장을 새끼줄에 꾀 꼭대기까지 땀 흘리며 날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에는 전교생이 연탄재를 들고 등교해 질퍽해진 학교 운동장에 던지던 일도 생각납니다. 태어나 인천에서 바다를 처음 봤거든요. 황해는 누렇잖아요. 중학교 때 아버님이 근무한 속초를 찾아가 '파란 바다'를 보기 전까지 온 세상의 바다가 인천 앞바다와 같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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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송현동 똥고개는 극작가 윤조병이 쓴 '아버지의 침묵'의 배경이 됐다. 극단 미추홀은 '아버지의 침묵'(윤조병 연출)으로 1990년 제8회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극단 미추홀 제공

서흥초등학교 뒷길로 수도국산에 오르는 언덕이 똥고개다. 1950~60년대에는 비탈의 텃밭 거름으로 인분을 써 골목골목에 냄새가 풍긴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진다. 1976년에는 똥고개 인근 현 송림체육관 부지에 송림위생처리장이 건립돼 인천시 분뇨의 절반가량을 처리했다. 분뇨 수거 차량이 인근 주택가를 수도 없이 지나다녔다. 2009년 폐쇄될 때까지 '악취 민원'이 빗발쳤다. 똥고개는 사실주의 극작가 윤조병(1939~2017)의 작품으로 제8회 전국연극제 대통령상(최우수상)을 받은 '아버지의 침묵'(1990년)의 배경이기도 했다. 극단 미추홀은 이 작품을 창립 40주년 기념 공연(2021년)으로 올렸다. 똥 냄새가 봄 냄새로 치환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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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송현동 고개.

2009년 폐쇄까지 '악취민원' 빗발쳐
극단 미추홀 선보인 '아버지의 침묵' 배경도

"봄 냄새? 허, 연탄까스 냄새, 화장실 똥냄새, 막혀버린 수채 냄새, 쓰레기 냄새, 퀴퀴한 방 안 냄새와 사람 냄새가 봄 냄새라구? 당신 코가 기능을 상실한 것 아니오? / 봄 냄새가 도시의 빌딩에서 난다고 생각하는 거요? 천만에. 숲에서 나는 거요. 흙에서 나는 거요. 숨 쉬는 저 숲, 숨 쉬는 골목길의 검은 흙에서 봄 냄새가 나는 거요." 똥고개는 송림 1·2구역 재개발사업으로 곧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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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동 시절 인천대건중고등학교 전경으로 1982년 촬영됐다. 대건중학교는 1985년 폐지되고, 대건고는 1998년 7월 연수구 동춘동 신축 교사로 이전한다. /인천대건고 제공

박 전 대사는 인천남중을 거쳐 1975년 인천대건고에 입학했다. 대건고가 현 위치인 연수구 동춘동이 아닌 동구 화수동에 있던 시절이다. 대건고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접한 'Treasure Island'(보물섬) 영어 다이제스트판이 소년 박정남을 '영어 소설'의 세계로 이끌었다. 주말이면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해적판을 찾아다녔다. 펄벅의 '대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조지오웰의 '1984' 그리고 '동물농장',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을 영어 원서로 섭렵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의 경우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고 그걸 다시 영어로 옮겼다. 1·2학년 내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영어 소설만 읽고 다른 과목에는 손을 놓아버렸다.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교내 시험 날 시험지에 이름만 적고 덮어둔 뒤 영어 소설을 꺼내 읽은 적도 있었다.

대건고 도서관서 '보물섬' 읽고 영어 빠져
시험날 시험지에 이름만 적고 소설 읽어
고3 돼서야 선배 말 듣고 미친척 공부
3월부터 6월까지 고교 수학 끝내
200등 아래던 성적이 12등까지 올랐다

"영어 단어와 문장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시절이었어요. 단어를 보면 그 단어가 나오는 소설이 통째로 생각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에요. 고3이 돼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미친 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인수분해부터 시작해 3월부터 6월까지 고교 수학을 끝냈고 그다음에 암기 과목을 공부했어요. 취업반을 제외한 300명 중 200등 아래였던 성적이 나중에 12등까지 올랐습니다. 친구들도 놀라고, 선생님들도 놀라고, 저도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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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대사는 연세대에 입학해서도 ACL 동아리 활동을 하며 영어 공부메 몰입했다. 사진은 연세대 교정에서 교우들과 함께 찍은 것으로 맨 오른쪽이 박정남 전 대사이다.

박 전 대사는 1978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이후에도 영어에 몰두했다. 주한 미군 라디오 방송 AFKN(현 AFN Korea) 청취 동아리인 ALC(AFKN Listeners' Club)에 가입해 활동했다. AFKN에서 평일 매시간 나오는 5분짜리 뉴스, 일요일 아침 9시 뉴스를 녹음해 영어 리스닝 교재로 삼았다. AFKN 뉴스 외에도 매주 토요일 방송되는 라디오 드라마를 받아 써 스크립트를 만들었다. 음성으로 모든 장면을 들려주는 라디오 드라마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쌓아 둔 스크립트 노트는 훗날 그가 학비와 생활비를 벌 목적으로 1년 정도 나간 동인천외국어학원에서 'AFKN 리스닝' 강사로 일할 때 교재로 쓰였다. 인천 최대 규모의 외국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며 연세대와 고려대 영문과 재학생이 와서 들을 정도의 명성을 얻었으니, 만약 그가 외교관이 안 됐다면 '일타 강사'로 이름을 날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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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대사(사진 맨 왼쪽)는 1980년대 동인천외국어학원 AFKN 리스닝 강사로 유명했다. 수강생들과 함께 작약도에 놀러가기도 했다.

박 전 대사는 1991년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그해 12월27일 정주연씨와 결혼했다. 신흥초, 박문여중, 인성여고를 나온 인천 토박이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조선호텔에 근무 중 인성여고 친구의 소개로 인연이 닿았다. 현 동인천길병원 부근에 있던 인하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는데, 박정남·정주연 부부의 예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신혼집은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과 제물포고등학교를 잇는 자유공원로 주변의 내동빌라였다. 박 전 대사 부부는 미국 유학 기간(1993~1995년)을 제외하고 1997년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가기 전까지 내동빌라에 살며 두 아들을 얻었다.

연세대 입학 후에도 영어공부 몰두
1991년 외무고시 합격하고 그해 결혼
'새 여권' 제작 처음 맡은 직무
영문이름 표기법 국가 일방적 지정에 '반대'
국가정보 기재 재량권 거쳐 현위치에 표기
"공무원 판단, 국민생활 영향력 깨달은 계기"

박 전 대사가 외교부에서 맡은 첫 직책은 여권과 법규계장(1992~1993년)으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 표준에 맞는 '새 여권'을 제작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로 여권 발급 연령 제한이 사라지고 그 이후 해외여행객은 매년 급증했다. 이름과 여권 번호, 유효 기간 등의 정보를 자동으로 인식하는 '기계 판독 여권'을 만들어야 했는데, 우리 국민의 한글 이름의 영문 표기 방식이 제각각인 게 골칫거리였다. 예를 들면 'CHUNG NAM'을 기계로 판독해도 한글 이름이 '정남'으로도, '청남'으로도, '충남'으로도 읽힐 수 있었다. 법무부는 중국 사례를 들어 영문 이름 표기법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박 전 대사는 '국민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그는 ICAO가 여권 발급 국가의 정보 기재 재량권을 부여한 위치(현 여권 소지인 서명란)에 한글 이름을 표기하고 이를 기계로 판독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아이디어로 문제를 해결했다. 여행문서 발급 100년 만에 첫 국제 표준 여권 발행이었다. 그는 "공무원의 판단과 선택이 국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했다. 이 경험으로 그는 남은 공직 생활에서 삼가는 태도를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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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대사는 첫 해외 근무지은 스리랑카에서 한인 축구회를 조직했다.

첫 해외근무지 스리랑카서 축구회 결성
여가시간 즐길거리 없던 직원들 접점 생겨
"스리랑카 한인 축구회 아직도 있다더라"

박정남 전 대사는 축구광이다. 서흥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보는 것도 그리고 직접 하는 것도 즐긴다. 인천에서 축현초등학교가 '인천 축구 톱(TOP)'으로 인정받던 시절, 서흥초등학교와 벌인 경기를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축구사랑나눔재단 이사장인 조병득 전 국가대표 골키퍼의 축현초 시절 활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축구만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경기 몰입도가 높고 실력도 출중했다. 그는 첫 해외 근무지인 주스리랑카 대사관 영사로 간 1997년, 콜롬보 한인 식당 사장의 권유로 한인 축구회를 결성했다. 스리랑카에 한국 봉제공장 150개 정도가 진출했는데 그 공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영사가 축구를 제대로 하긴 하겠어?'라는 반문은 곧 감탄사로 변했다. 처음에 7명이 나오던 축구회 회원은 50명까지 늘었다. 박 전 대사는 축구회 회원 20~30명을 집에 초대해 불고기 파티를 열어주는 등 열성적으로 축구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왜 영사가 축구회를 결성했을까.

"한인 식당에 딸린 노래방이 있었어요. 칸막이가 없는 커다란 홀에서 여러 개 테이블을 두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종이에 써 디스크자키에게 주면 틀어주는 노래방이었어요. 식당 사장님 말을 들어보니 노래 순서를 두고 패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고 해요. 대사님께 보고했어요. '젊은 친구들이 여가 시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카지노에 가거나 노래방에서 싸움을 한다고 하니 제가 축구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축구회가 시작됐어요. 축구회라는 접점이 생기면서 노래방에서 싸움이 사라졌어요. 스리랑카 한인 축구회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외교부 직원 중에 해외에서 축구회를 만들고 운영해 본 사람이 저 말도 또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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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있던 박정남 전 대사는 주미 대사관으로 자리를 옮겨 약 5년간 근무했다.

박 전 대사는 관운(官運)이 좋은 편에 속한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 필요 인원을 확보하는 목적으로 1980년대 20명씩 선발하던 외무고시 합격자를 1990년대 들어 확대하기 시작했다. 1980~9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원을 뽑은 해가 바로 박 전 대사가 합격한 1991년으로 49명이 선발됐다. 만약 20명을 뽑았다면 본인은 탈락했을 것이라고 박 전 대사는 설명했다. 또 주스리랑카 대사관에 근무 중이던 그가 1999년 모두가 선망하던 주미 대사관으로 발탁된 것은 외교부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된 인사였다.

'백이 없어도 워싱턴에 갈 수 있다'
입증하고 싶었던 홍순영 장관 
'고생하는 친구 찾아보라' 지시에 물망
실제 인사명령 불복 의지 갖췄던 홍 장관
취임 이후 워싱턴 인사관행 타파 시도

"나중에 알았는데 홍순영 장관님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워싱턴에서 한 번도 근무를 못 해 보셨어요. 백(back)이 없어도 험지에서 고생하면 워싱턴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홍 장관님이 김숙 인사국장(인사기획담당관)을 불러 '아프리카에서 고생하는 친구 중 워싱턴에 보낼만한 사람 찾아보라'고 지시해 케냐에서 한 명이 뽑혔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인사철에 인사국장에게 같은 지시를 내렸는데 마땅한 인물이 없었나 봐요. 그래서 아시아까지 범위를 넓혀 찾다가 제가 선발됐다고 들었습니다."

실제 홍순영 장관은 1998년 8월 취임 이후 '워싱턴 인사 관행' 타파를 시도했다. 그는 차관 시절부터 외교관의 인사 명령 불복 행위를 엄단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당시 공직 사회에서는 '청비총'이란 말이 있었는데 이는 청와대 비서실, 장·차관 비서관, 총무과 인사들이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하는 관행을 뜻했다. 박정남 전 대사의 경우 워싱턴 인사 이후 '제물포고 출신'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그건 그가 제물포고 출신 김숙 인사국장의 '백'으로 워싱턴에 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사 엄격히 구분…
공공 재산 사적인 사용 '극도 경계'
상급자 청탁 거절했다가 미운털 박혀




박정남 전 대사는 공사(公私)를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해 힘쓴 공직자였다. 공무원 재직 기간 '이해 충돌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주식 투자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적은 비용이라 할지라도 공공의 재산을 사적으로 쓰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했다. 한 재외공관 근무 시절엔 상급자의 청탁을 거절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장기간 곤혹을 치른 적도 있었다고 했다. 인천 출신이라는 이유로 지연(地緣)에 휘둘리지도 않았지만 본인의 직무 범위 내에 있는 인천 현안은 적극 지원했다. 인천시가 아시안게임 유치에 온 힘을 기울이던 2006년 6월 박 전 대사는 주폴란드 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문화외교국 홍보과장으로 부임했다. 국제 체육대회 유치 업무 담당 부서장이었다. 2014년 아시안게임 개최지 선정을 앞두고 인천은 인도 델리와 경쟁했다. 박 전 대사의 역할은 투표권이 있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원 국가의 공관에 연락해 '인천 유치'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2007년 4월 쿠웨이트에서 OCA 총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부터는 인천시 직원이 침낭을 들고 홍보과 사무실에 찾아와 외교부 직원들과 함께 유치 활동을 점검했다. OCA 총회 결과 인천은 32표를 얻어 델리(13표)를 넉넉하게 이겼다.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은 박 전 대사의 공로를 인정해 감사패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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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봉 대사 근무 시절엔 '인천 출신 세계여행가' 김찬삼(1926~2003) 교수를 매개로 인천과 가봉의 가교 역할을 했다. 박 전 대사의 고교 동창으로 송도고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김재민 교사가 2018년 가봉에 찾아왔다. 김찬삼 교수와 슈바이처 박사가 1963년 11월 찍은 사진의 가봉 슈바이처 박물관 전시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김재민 교사는 김찬삼 교수의 수제자로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주가봉 대사관의 도움으로 이 사진은 박물관에 전시됐다. 또 송도고와 슈바이처 병원은 2018년 8월 자매결연을 했다. 그 이듬해 송도고는 의료봉사단을 꾸려 가봉 슈바이처 병원에서 봉사 활동을 벌였다. 김재민 전 교사는 "직접 슈바이처 병원을 컨택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대사관에 문의하니 취지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나서 연결해줬다"며 "의료봉사단이 슈바이처 병원에 갔을 때도 대사관 직원분들이 함께 생활하다시피 하며 도움을 주셔서 프로그램을 의미 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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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주가봉대사를 비롯한 대사관 직원들의 노력으로 인천송도고등학교와 가봉 슈바이처병원이 결연을 맺고 상호 교류할 수 있었다.

인천유나이티드 이기면 기쁘고, 삼미슈퍼스타즈 생각하면 마음 아파요.
인천은 제 고향이고 저는 인천사람입니다.
박 전 대사는 2019년 12월 외교부를 정년퇴직하고 용인에서 아내, 아들과 거주하고 있다. 그에게 고향 인천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물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태어났지만 인천에서 컸습니다. 인천은 제 고향입니다. 인천유나이티드가 이기면 기쁘고, 삼미슈퍼스타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 저는 인천사람입니다. 인천이 국제적 도시로 발전하길 희망하고요. 재외동포청을 유치한 인천시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또 반대로 재외동포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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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전 대사는 2016년 11월 주가봉 대사로 부임해 외교 사절로 다양할 활동을 펼쳤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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