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이 말하는 '김포시장 후보 그는 어떤 사람인가'
공보물에는 없는 '시크릿스토리'를 들려드립니다.
시장 후보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지금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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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아내 방혜란·모친 임영순 여사는 정하영 후보가 험로를 걸을 때 쓰러지지 않게 지탱해준 버팀목이다. /정하영 후보 선거사무소 제공 |
더불어민주당 정하영(59) 김포시장 후보는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캠프 구성원이 거의 바뀌지 않는다. 짧게는 6~7년, 길게는 십수 년을 함께한 동지들이다.
민주화 투쟁의 바람이 일던 1980년대 정하영 후보는 김포에서 처음 지역운동이라는 걸 시작했다. 영호남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 지역운동이 활성화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집안의 4대 독자였던 정하영 후보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모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서울로 일찍이 유학을 떠나 중고교를 다닌 그는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병역의무를 마쳤다. 대학 졸업자의 취업이 지금만큼 어렵지 않던 시절, 정하영 후보는 사회 문제에 눈을 뜨고 평범한 삶을 뿌리쳤다. 조부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당시의 농사는 고된 직업이었다. 식량주권의 중요성이 막 부각하던 무렵 청년 정하영은 흙을 일구며 다양한 부조리를 마주했고, 수세(농업용수 사용료) 폐지운동 등 사회운동에 뛰어든다.
지난 11일 만난 캠프 동지들은 "정하영 후보는 '김포 시민운동 1세대'로 지역운동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라며 "당시 시민운동은 중앙집권형이었는데 정하영 등 몇몇 뜻있는 청년이 일어나 농업도시 김포의 현안과 관련한 시위가 본격적으로 태동했다"고 설명했다.
한 동지는 "정하영 후보는 80년대 중후반 우루과이라운드(다자간 무역협상), 그중에서도 수입쌀 반대를 위해 격렬히 싸우며 소위 '빨갱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북한을 코앞에 둔 김포는 그때만 해도 보수 초강세지역이어서 시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하니 정하영에 대한 시선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조부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얼마든지 직장 다니며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음에도 구태여 고향에 와서는 하지 말라는 농사를 하고, 바깥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신의 귀한 손자를 빨갱이 취급하니 설득을 많이 하셨다더라. 조부가 '그럴 거면 나가라'고 강수를 뒀는데 손자가 진짜로 집을 나가는 바람에 상심이 크셨다고 들었다"고 전언했다.정하영 후보는 '김포 시민운동 1세대'로 지역운동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통한다. /정하영 후보 선거사무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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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영 후보의 조부는 4대 독자로 대학까지 나온 손자가 남들처럼 직장다니며 평범한 삶을 살길 원했다. /정하영 후보 선거사무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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