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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2)] 낯선 음 따라 걷다보니 윤희정표 블루스 자리잡아

김성호
김성호 기자 ksh96@kyeongin.com
입력 2023-05-24 14:23 수정 2023-11-02 17:11

재즈 가수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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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가수 윤희정.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머리 전체를 감싸는 인상적인 디자인의 모자를 쓰고 등장하는 윤희정은 그가 재즈 공연을 시작한 지 3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 어느덧 우리나라 재즈를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유명한 재즈 가수는 자신의 이름을 딴 노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도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자신만의 블루스가 있다. 윤희정에게도 윤희정의 블루스가 있다.

'나 어릴 적 고향에 가고파/언덕 너머 푸르른 하늘/(중략)/나 살던 곳 그대로 있을까/수도 곡산 언덕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지금쯤 무엇을 할까/(중략)/아버지의 고향은 평안도 어머니의 고향은 순천 한 동네 살며 중매결혼에 가마 타고 말 타고 혼인을 하셨지/(후략)'(곡 YHJ blues, 이판근 곡·윤희정 작사)

윤희정이 가사를 붙인 이 노래 'YHJ blues'는 윤희정이 고향 인천을 잊지 않고 살아온 인천사람이라는 사실을 소개하는 데 참 좋은 노래다.

노래 가사처럼 윤희정은 평안도 출신 아버지와 순천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3년 2남 4녀 6남매 가운데 둘째로 인천 동구 송현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인천은 실향민이 많은 도시인데 윤희정의 아버지 또한 그랬다. 윤희정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북에서 만나 결혼했다. 부부는 한국전쟁 때 외동아들을 데리고 피란길에 오른다. 혼란한 피란길에 부부는 서로를 놓쳐 잠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시기도 있었는데, 어머니는 인천에, 아버지는 수원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어느 날 서로의 소식을 듣게 된 부부는 상봉했고 어머니가 자리를 잡은 인천으로 아버지가 찾아와 가족이 모두 인천에 눌러앉았다.

한국전쟁 영향으로 송현동에는 피란민이 모여들었고 수도국산과 수문통 인근에는 피란민촌이 형성되며 인구가 계속 늘었다. '2018년 인천 동구 도시생활사 조사'를 보면 '송현동'이 1962년에는 1동부터 4동까지 분할됐고, 1966년에는 송현동 인구가 인천시 전체 인구 52만5천827명 중 8%를 차지하는 4만1천887명이었다. 송현주공아파트 자리에는 '수용소촌'이, 옛 수문통 인근에는 '수문통 피란민촌'이 있었다.

 

실향민의 도시 인천 출신 윤희정
송현동 수도국산 피란민촌서 자라
인천항 개항 계기 서양 음악 유입

 

 

 

YHJ blues 속 '수도 곡산'이란 지명이 눈에 띈다. 윤희정이 송현동에서 성장하며 들었던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지명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수도국산'의 오기(誤記)다. 현재 수도국산에는 윤희정이 기억하는 달동네는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동네 흔적을 간직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대신 옛 기억을 전해주고 있다.

수도국산은 '송현배수지'가 들어서면서 불린 이름이다. 송현배수지는 1910년 12월부터 급수가 시작된 상수도 공급 시설이다. 상수도 시설은 근대 도시가 갖춰야 하는 기본 인프라 중 하나인데, 인천은 원래 우물이 적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수질 또한 나빴다고 한다. 개항 이후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물 확보가 최대 숙원으로 떠오르며 만들어진 것이 송현배수지다. 인천 최초 상수도 시설이자 도시계획시설이라는 의미도 있다. 송림산 혹은 만수산이라 불리던 해발 고도 56.8m인 낮은 산에 자리 잡았다. 부지 면적 3만6천780㎡에 저수조 3개를 갖췄다. 인천부(인천 옛 이름) 거주 일본인을 위해 설치된 수도시설로 특히 조선인이 모여 살았던 송현동과 송림동 주변은 그 혜택을 잘 누리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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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 재즈 가수 윤희정.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신나게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그곳의 울림이 너무 좋은 거예요.

윤희정의 유년 시절 기억 속 수도국산은 더없이 훌륭한 '놀이터'로 남아 있다. 그는 "허허벌판에 어마어마하게 큰 물통이 서 있었고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넓은 평지가 있어 뛰어놀았는데, 지금은 친구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상했다.


윤희정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중앙시장에서 '대동양행'이라는 가전제품 판매점을 크게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언제나 라디오와 전축이 빼곡했다.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상점에 붙은 양행(洋行)이라는 글자가 낯설게 느껴진다.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역임한 김윤식 시인은 '양행'이라는 이름에 대해 "서양 물품, 박래품을 파는 행상이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1950~60년 당시 '양행'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던 시절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풍기는 이름으로 사용됐다"고 했다.

세련된 이름 덕에 아버님의 장사가 잘 됐기 때문이었을까. 윤희정의 어린 시절에는 산동네 꼭대기에 집이 있었는데, 이사할 때마다 점점 내려와 대동양행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집을 장만했다.

신식 물품을 파는 세련된 아버지는 귀도 예민했다.

"아버님이 특히 귀가 예민한 분이셨어요. 고교 시절 장난을 치곤 했는데, 제가 진열대에 있는 아무 라디오나 전축 스위치를 켜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님은 '야 명희야, 위에서 다섯 번째 선반에 있는 일곱 번째 라디오 끄라우'라고 하셨어요." 윤희정 본명은 김명희다.

윤희정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아버지에게서 찾았다. 아버지는 노래를 잘 불렀다. 윤희정은 '학교 공부'보다 '음악 공부'를 더 좋아했는데, 윤희정의 다른 형제들은 노래보다 학교 공부를 더 잘했다. 윤희정의 어머니는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늘 강조했다. 어머님이 자라면 자고, 밥 먹으라면 밥 먹는 착한 오빠와 동생들이었다. 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 오빠는 1971년 사법시험을 최연소 수석으로 합격한 서울대 출신 김병준 변호사다. 판사 출신인 김병준 변호사는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시 고문변호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안상수 전 인천시장과는 서울대 동기라고 한다. 윤희정의 다른 동생들 대부분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재직했다.

'공부에는 다 때가 있다'고 강조한 어머님 말씀이 윤희정에게도 결과적으로는 통했다. 학창시절 책보다는 통기타 공부에 더 열심이었던 윤희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가수가 됐다.

 

음악적 재능 있는 아버지 닮아
중학교 2학년 친구따라 기타 배워
고등학교 졸업 후 가수 인생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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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정이 일반인에게 재즈를 가르치고 무대에 세우는 공연 '재즈 프렌즈 파티'의 공연 모습. 2013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윤희정 제공

윤희정은 1965년 3월부터 1971년 2월까지 인성여중·고에 재학했다. 통기타 열풍이 막 불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친구 소개로 따라간 인천YMCA '싱얼롱'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기타를 처음 배웠다. 그때부터 공부보다는 기타 치고 노래하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학교에서는 음악반 활동을 했다. 교실에 있던 풍금과 통기타를 윤희정이 연주하며 학교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을 이끌고 합창대회를 나가기도 했다.


"'선라이즈 선셋',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그런 노래가 유행하던 시기였어요. 통기타를 들고 노래를 신나게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학교 건물을 보면 각 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어요. 그곳의 울림이 너무 좋은 거예요. 100원일까, 10원이었을까 돈을 받고 공연을 하면 계단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들어찼죠." (웃음)

재즈 가수 윤희정은 포크 가수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해인 1971년 '제1회 KBS배 쟁탈 전국노래자랑'에서 우승하며 KBS의 월급을 받는 '전속가수'가 됐다. 당시 노래자랑은 지금 우리가 아는 전국노래자랑과는 다른 방송 프로그램이었다. 월별 우승자를 뽑고 우승자끼리 다시 경쟁을 펼쳐 최종 승자를 뽑는 요즘으로 말하면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프로그램이다. 1972년에는 첫 앨범도 발매했다. 이렇다 할 경력도 없는 풋내기가 전국 단위 경쟁에서 우승한 데에는 학창시절 영향이 컸다고 윤희정은 기억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가진, 내가 보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고교를 막 졸업한 윤희정이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인천은 대중음악적 자양분이 풍부한 도시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인천을 빼놓을 수 없다.

인천은 인천항 개항을 계기로 각국의 외교관, 선교사, 군인, 기술자, 상인, 선원 등을 통해 서양의 음악이 광범위하게 유입됐다. 특히 인천 부평의 미 군수 지원 사령부인 애스컴(ASCOM)을 통해 다양한 서구 음악 장르가 퍼져 나갔다. 애스컴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미군이 반드시 거쳤던 관문이었는데, 이곳에서 미군들이 머물다 동두천, 송탄, 평택 등으로 배치받았다. 애스컴에서는 젊은 미군이 좋아한 재즈와 팝 음악을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최신 악기, 원판 LP 등을 부대 주변에서 구하기 쉬웠다. 부대 주변에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클럽이 많았는데, 국내 밴드와 가수들에게는 이들 무대가 자연스럽게 음악적 내공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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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출신 재즈 가수 윤희정.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50년대 말 애스컴 미군들이 좋아했던 여가수는 김시스터즈, 패티김, 리나박 등이었다고 한다. 인천 중구 신포동 일대에도 외국인 전용 클럽이 성업했다. 외국인 선원과 기술자들은 이곳에서 재즈, 블루스 같은 자신의 고향에서 즐겨 듣던 음악과 위스키, 맥주를 벗 삼아 향수를 달랬다. 인천에서 성장한 국민가수 송창식, 밴드 키보이스의 김홍탁·박상규, 사랑과 평화 이철호 등은 이들 클럽을 통해 전파된 팝송을 들으며 훗날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성장했다. 인천이 음악도시로 불리는 이유다.

윤희정은 2년여의 전속가수 활동이 끝나고 결혼과 출산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가수 활동도 시들해졌다. 이후 노래가 하고 싶어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며 해외를 누비기도 했다.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던 어느 날 "재즈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한 기획사 관계자 제안에 따라 우리나라 재즈 연구자이자 작곡가인 이판근 선생을 만났다. 1992년 일이다.


1992년 해외 활동 중 재즈 가수 권유 받아
1997년 '윤희정&프렌즈' 교육 형식 콘서트 진행
100차례 진행 김건모 등 제자 되어 대중화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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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정&프렌즈' 공연 무대에 선 윤희정과 배우 이하늬. 윤희정은 이 공연에서 가수, 배우, 법조인, 정치인 등 유명인에게 재즈를 가르치고 함께 노래했다. 윤희정을 스타로 만들며 재즈를 대중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7년 첫 공연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100차례 이어졌다. /윤희정 제공

"재즈를 배우러 갔는데, 들려주는 음악의 사운드가 '도'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솔'도 아니고 이상해요. ~쉐 ~쉐 이래요. 음이 정확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게 왜 이러냐'고 물어봤더니. 그게 '블러싸운드'라고 그러더라고요. 아지랑이 같은 소리였죠. '도'도 아니고 '레'도 아니고 '미 플랫'이었을까. 쉥쉥 하는 소리가 참 묘하다고 생각했죠."

윤희정은 "이 음악을 하면 성공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음악을 하니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판근 선생은 "왜 재즈를 하려 하느냐, 재즈를 배우는 것은 거적을 뒤집어쓰는 일이다. 너무나 큰 고생이다"라며 만류했지만, 윤희정은 재즈 공부를 시작했다. 야단도 맞았고, 숙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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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정과 딸 쏘머즈

다이아몬드를 팔려면 깎아내고 또 깎아내야 제대로 되잖아요.

"어렵고 힘들지만 해 볼 만하다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가진, 내가 보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이아몬드를 팔려면 어마어마하게 많이 깎아내고 또 깎아내야 제대로 된 보석으로 다듬어지잖아요."


윤희정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즈의 얼굴이 된 데는 '윤희정&프렌즈' 공연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97년 한 극장 관계자가 먼저 제안했고 윤희정이 수락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이들을 무대에 세우기로 기획했다. 자신도 재즈를 배우는 입장이면서 '셀럽'을 가르쳐 함께 무대에 서는 교육 형식의 콘서트였다. 결과는 대성공. 그렇게 1997년부터 2011년까지 100차례 공연했다. 김건모, 박경림, 남경주, 홍사덕, 송일국 등 200여 명이 제자가 되어 윤희정과 함께 재즈를 퍼뜨렸다.

그의 재즈 인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6일에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카포레' 컨벤션홀에서 자신의 딸 '쏘머즈'(싱어송라이터), 'CEOJ Band' 등과 함께 무대에 선다.

윤희정은 자신의 음악적 성공을 인천에서 찾았다. 그는 "인천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내게는 근원적인 뿌리"라며 "그 인천이 준 자양분을 먹고 살았으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 했다.


 

■이야기플러스|윤희정을 가수로 만든 '싱얼롱Y'

1960년대 젊음의 혈기 발산처

전국 유행 음악교육 프로그램


'싱얼롱 Y'는 YMCA가 1963년부터 선보인 음악 교육 프로그램이다.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한 전석환 작곡가가 '젊은이들이 음악을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다 함께 부를 노래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제안해 시작된 행사다.

1회 행사의 이름은 '싱얼롱 with YMCA'였는데, 시간이 지나며 '싱얼롱-Y'로 바꿨다. Y는 YMCA, 젊음·청년(youth), 그리고 당신(you) 등을 뜻하는 의미로 쓰였다.

1963년 4월 서울 종로에 있는 YMCA '친교실'에서 첫 행사가 열렸다. 연세대 음대에서 공부하고, 주한 미8군 장교클럽에서 활동한 전석환 작곡가가 매주 토요일 전자오르간과 통기타를 들고 직접 진행했다. 고(故) 박상규 등 인천 출신 뮤지션 3인으로 구성된 '코코넛 트리오'가 옆에서 도왔다.


전석환
1960~1970년대 '싱얼롱 Y'로 전국에 싱얼롱·통기타 열풍을 일으킨 작곡가 전석환.


전석환이 채보·편곡한 악보와 가사를 나눠주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동요와 미국 노래, 민요 등을 가르쳤다. 간단한 율동도 소개했다.

1회 행사 참석자는 13명에 불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교실이 비좁아 '서울YMCA 강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3개월 만에 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을 가득 메웠다. 입소문이 나자 오전부터 줄을 서는 일이 벌어졌고, 행사를 매주 2차례로 늘리자는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1963년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전석환을 출연시켜 같은 형식의 '다함께 노래하자'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KBS는 1964년 라디오 프로그램 '3천만의 합창', 1965년 TV 프로그램 '노래의 메아리'를 신설하기도 했다.

싱얼롱-Y는 1965년 군산을 시작으로 인천 등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인천YMCA는 당시 '공보관'에서 전석환의 후배가 행사를 진행했다. 인천 출신 재즈 가수 윤희정도 중학교 재학 시절 1년 동안 행사에 참여하며 노래와 기타를 배웠다. 윤희정 1집(1972년)에는 전석환 작사·작곡 '버들피리'가 수록돼 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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