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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 '유년 챕터' 끝내고 '새 페이지' 써내려가는 구효서

박경호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입력 2023-06-07 14:06 수정 2023-11-0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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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아임프롬인천 구효서 소설가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소설가 구효서를 한 문장으로 소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험적 글쓰기와 대중적 이야기를 오가는 다양성의 작가. 인생 대부분을 서울에서 산 그의 도시적 감수성이 나오다가도, 어떤 작품에선 유년기를 보낸 인천 강화도의 토속적 정서가 나온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중편 '풍경소리'(2017·이상문학상 대상작)에선 도시적 분위기와 토속적 정취를 결합한 듯한 느낌도 든다. 최신작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아기자기하면서 애틋한 로맨스다. 구효서는 이러한 자신의 글쓰기를 "변덕 부리는 것을 멈추지 않기"라고 한다.

그가 받은 굵직한 문학상으로 문단에서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제41회 이상문학상', '제45회 동인문학상', '제16회 대산문학상', '제6회 황순원문학상', '제6회 이효석문학상', '제27회 한국일보문학상' 등등.

구효서는 다작하는 소설가다. 이제까지 장편 30권에 소설집 10권을 냈고, 산문집도 여러 권이다. 다작의 힘은 매일 오전 9시 작업실로 출근해 정해진 분량의 글을 쓰고 오후 6시 퇴근하기로 유명한 전업 작가의 성실함과 그의 '변덕 부리기'에서 나온다. 구효서의 '글샘'은 어디서부터 솟는 걸까. 구효서는 그 원천이 고향 강화도라고 말한다.

■점토처럼 쌓여 정서의 토양이 된 강화도

구효서는 1957년 9월 18일 오전 10시 6분 45초께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 창말에서 2남 4녀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적은 창말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창후리 사태말이다. 구효서가 나고 자란 마을은 하점면 창후리와 이강리, 양사면 인화리에 걸쳐 있는 별립산(해발 399.8m) 끝자락이다. 마을 서쪽으로 창후리 포구를 낀 강화군 본도의 북단이자 접경지역이다.

창말은 소금 창고(倉庫)가 있었던 동네라서, 사태말은 아주 오래전 큰 사태(沙汰)가 났던 동네라서 이름이 붙었다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다. 옛 지명이 그렇듯 유래가 정확하진 않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창말, 사태말, 샛말을 아우른 지역의 공식 지명은 창교동(倉橋洞)이었다. 소금 창고와 배를 댈 수 있는 잔교가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화남 고재형(1846~1916)이 1906년 강화도를 여행하며 한시를 짓고, 마을을 설명한 산문을 곁들여 쓴 '심도기행'(2008년 김형우·강신엽 역)에 나온 '창교동'이란 제목의 한시를 보자.



'창교동은 서쪽 편 바닷가에 있는데,(倉橋洞在海西濱) / 이씨 구씨 서당엔 봄빛이 가득하다.(李具書樓共是春) / 한가로운 가운데에 소란함이 있다고 말하니,(因說閑中還有攪) / 석공과 소금 장수의 왕래가 빈번하기 때문이라네.(石工鹽賈往來頻)'

창교동은 '청해 이씨'와 '능성 구씨'가 많이 살았다. 석공과 소금 장수 왕래가 빈번한 마을이었다. 구효서가 바로 능성 구씨로, 그의 가족뿐 아니라 일가친척이 창교동 일대에 모여 살았다. 구효서는 지금도 해마다 4월 진달래 필 무렵 부모님 묘에 성묘하러, 추석과 설에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러, 가끔 혼자 밴댕이를 먹으러 고향에 온다.

"태어나서 처음 맞은 세계가 강화도였습니다. 저에게 최초로 각인된 세계이자, DNA라고 할 수 있겠죠. 나에게 있어 모든 그리운 것의 기준, 또는 아름답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것의 기준,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제 고향 강화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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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 기억을 되살려 가며 쓴 장편소설 '라디오 라디오'(1995) 시절, 태어난 집에서 촬영한 사진. 큰 누님 가족과 함께 살았다. 뒤로 보이는 문 안쪽이 안방이고, 그곳에 지금도 단편소설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의 모티브가 된 시계가 걸렸던 자리가 남아 있다. 아랫 줄 맨 왼쪽이 구효서. /구효서 작가 제공


구효서는 장편 '라디오 라디오' (1995·고려원, 2006 개정판·해냄),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2005·창비), 산문집 '소년은 지나간다'(2018·현대문학), 함민복 시인 등 16명이 함께 쓴 산문집 '강화도 지오그래피'(2018·작가정신) 등을 통해 소설과 산문을 넘나들며 여러 차례 강화도에 관한 글을 썼다. 주로 유년 시절의 기억을 썼다. 한국전쟁 이후 접경지역인 강화도 마을 곳곳에 달린 '유선 라디오 스피커'나 마을 무당이 소설 속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강화군 초등학교 대항 체육대회 때 귀가 중 길을 잃었다가 부근리의 거대한 고인돌을 보고 방향을 가늠했던 기억, 흩날리던 삐라를 줍던 기억, 꽃이 만발한 산 고개나 개구리 잡던 기억 등 1950~60년대 강화도 농어촌 마을 풍광이 생생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 보는 거대한 고인돌의 실루엣은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다음 그의 작품에서 몇몇 대목을 소개한다.

'샛말 너머 공 첨지댁 사내가 달빛 아래 홀로 게를 잡았던 날도 몇몇 호란의 뼈*가 그의 살갗을 스쳤다. 삼백 수십 년이 흘렀어도 짜디짠 소금 기운 때문에 예리한 뼛조각 끝이 쉬이 무디어지지 않아 게 잡는 사람들의 살갗에 상처를 남기기 일쑤였다.' (산문집 '소년은 지나간다' 中) *병자호란 때 죽은 이의 뼈를 뜻함.

'누구네 부엌엘 가든 거기에는 삐라가 가득가득 넘쳐흘렀으니까요. 땔 나무의 반은 삐라였습니다.' (장편 '라디오 라디오' 中)

구효서는 강후초등학교에 다녔다. 한 학년에 한 반씩인 시골학교였다. 강후초등학교는 2000년 폐교돼 최근까지 이 학교 1회 졸업생인 서예가 심은(沈隱) 전정우의 미술관으로 쓰였다가 현재 강화군이 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 중이다.

"집에서 가는데 10리(약 4㎞), 오는데 10리를 6년을 걸어 개근했어요. 유년 하면 그 작은 발로 그냥 끝없이 걸었구나…. 보이는 게 하늘, 바다, 산 이 세 개밖에 없었어요. 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봤으니 기억에 쌓였겠죠. 매일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우리한테 차곡차곡 마치 점토같이 쌓이잖아요. 그게 정서의 토양이 되는 겁니다. 작가가 돼서 이걸 하나하나 풀어쓰게 되는데, 요즘 와서는 조금 더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걸 아쉬움이 들기도 하네요."


강화군 창교동·능성 구씨 일가 출신

마을 풍경 담은 장편·산문집 다수 출간

읍 우시장 번성했지만, 자연스레 퇴락

모든 것의 기준이 제 고향 강화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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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강후초등학교 교정에서 촬영한 사진. 오른쪽 두번째 소년이 구효서다. /구효서 작가 제공

 

어린 시절 교동도에서 소 장수들이 소 떼를 배에 싣고 창후리 포구에서 내려 강화읍 우시장으로 끌고 갔던 기억이 흥미롭다. 소 장수들은 구효서 같은 동네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고 한두 마리를 강화읍 우시장까지 몰고 가게 했다고 한다. 구효서는 "소만 오면 아이들이 창후리 포구에 새까맣게 몰려 소를 먼저 차지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잊혀가는 강화 우시장이 구효서의 기억에는 아직 남아 있다.

인천강화옹진축협에 따르면 강화읍 남산리 현 미래지향아파트 자리에 있던 우시장은 1995년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강화 우시장은 1930~1950년대 현 강화읍 행정복지센터 자리에 있다가 서문 밖 인삼 수납장 공터로 이전해 1970년대까지 운영됐고, 이후 남산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주요 농경지이면서 한성과 개성을 잇는 해상교통의 중심지였던 강화도엔 오래전부터 소가 많았고, 우시장도 발달했다. 1948년 강화문화관이 펴낸 향토잡지 '강화' 제1호(2007년 강화문화원 복각)를 보면, 당시 강화군 전체에서 사육한 가축은 소 4천365마리, 돼지 5천596마리, 닭 2만8천571마리에 달했다.

강화 우시장엔 경기도 서부, 강원도와 충청도, 황해도에서도 장사꾼들이 몰렸다고 한다. 강화 우시장의 규모가 어떠했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공식 기록은 찾기 어렵고 강화도에 오래 산 노인들을 통해서 그 모습을 일부 되새길 수 있다. 강화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유중현(80) 씨는 "소가 많은 집은 소 주인과 소를 먹이고 키워준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우시장에 팔 땐 소 주인과 키워준 사람이 솟값을 반반씩 나눴다"며 "옛날엔 육우용(고기소)이 아니라 농사를 지으려고 집집이 소를 기르고 시장에서 사고팔고 했는데, 트랙터나 경운기가 보급되면서 자연스레 우시장도 쇠퇴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화 우시장이 얼마나 컸는지 날치기도 성행했다. 조선일보 1955년 4월26일자 신문에는 강화경찰서가 강화 우시장 일대에서 수차례에 걸쳐 현금 1만환을 훔친 날치기 일당 2명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교동도에도 우시장이 컸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까지 교동도의 생활권은 강화도가 아닌 황해도 연백군과 개풍군 등지였다. 교동도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황해도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정착해 형성한 시장으로 알려졌지만, 그 이전에 우시장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한기출(74) 교동향교 전교는 "교동도와 연백군은 간조 때 우마(牛馬)가 지나다닐 정도로 물이 빠져 배를 타지 않고도 소를 몰 수 있었다"며 "교동의 소가 강화도로 간 것은 휴전선으로 북쪽 왕래가 막힌 이후"라고 했다. 구효서가 어릴 적 봤던 소몰이 풍경은 남북 분단 상황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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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남산리 옛 우시장 모습. 촬영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강화군 제공

■결국엔 다시 쓰게 될 고향 이야기

1972년 열다섯 살부터 삶의 무대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이동한다. 제1호 국가산업단지인 수출산업공단 제1단지(일명 구로공단)가 조성된 영등포구 구로동이다. 당시 서울에서도 변두리에 속했지만, 구효서의 일상은 180도 바뀐다. "가족들은 공단으로 일하러 나가고, 저는 어렸으니까 학교에 다녔어요. 강화도에서는 농경사회니까 일과 삶이란 게 구분이 안 됐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노래도 하고 사물놀이도 하고 퍼져 앉아서 농담도 하고 그러잖아요. 서울 가니까 딱 분리가 돼서 그런 낭만이 없어졌어요. 가족도 밤에만 만나고, 집에선 잠만 자고, 아침이면 다 직장으로 가니까 이상한 거예요. 농경사회로부터 산업사회로 껑충 점프하고 나니 정말 삭막하더라고요."

구효서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빠듯한 살림에 물감값과 레슨비가 감당이 되질 않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그림을 포기하지 못했는데, 미술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에잇, 글이나 쓰자"며 펜과 노트만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막상 쓰기 시작하니 그림 그리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군대와 대학을 마치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마디'로 등단했다. 초창기부터 실험적 기법과 도시적 감수성의 소설을 쓰면서도 전통적 글쓰기에도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효서는 문단에서 꾸준한 글쓰기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매일매일 꾸준히 조금씩 씁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못하는 것도 (많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책 한 권을 내고 나면 그 책의 성격과 내용과 경향하고 아주 다른 쪽을 기웃거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요. 쓸거리가 있어서 쓰는 게 아니라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고민하는 거죠. 그 변덕의 결과물로 작품이 하나 나옵니다. 또 하나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가서 촌놈 티 벗으려고 엄청나게 도시화하려 했는데, 아무리 도시화를 하려 해도 촌놈일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강화도에서 막 도망치려 나왔다가 그 피로감에 다시 고향으로 들어오는, 이렇게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15살 무렵 서울로 온가족 상경

1987년 단편소설 '마디'로 등단

매일 꾸준히 글쓰기 활동 이어가


도시별 음식을 테마로 한 '요요시리즈'
강화도 젓국찌개 소재 소설 만들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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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겨울 강후초등학교 6학년 임종석 담임선생님과 학생들. 반이 하나밖에 없었고, 한 반에 학생은 무려 61명이었다. 뒤에서 두 번째 줄, 오른쪽 두 번 째가 구효서. /구효서 작가 제공

구효서가 2021년부터 잇따라 쓴 장편 '옆에 앉아서 울어도 돼요?'(2021·해냄), '빵 좋아하세요?'(2021·해냄), '통영이에요, 지금'(2023·해냄)은 작가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은 '요요 시리즈'로 통칭하는데, '슬로 시티·라이프·푸드'(Slow City&Life&Food)를 표방한다. 최신작 '통영이에요, 지금'은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의 벚꽃이 흩날리는 봄, 운치 있는 아이스크림 카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한 여성과 두 남성의 사랑 이야기다. 학생운동 리더이자 수배자, 그와 연인이었다는 이유로 고문·강압수사를 받은 여자, 그 여자를 사랑하게 돼 고문을 폭로(양심선언)한 경찰이 나온다. 아기자기한 통영에서의 현재 시점과 1980년대 엄혹한 시절 모습이 교차한다. 사람과 사람 간 사랑이 어디까지 애틋해질 수 있을지 써보고 싶었다는 게 구효서의 설명이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게 가능할지, 그게 평소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서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을 끌어왔다고 한다.

"1978년에 입대했는데 이듬해 10·26사태가 있었고, 그다음 해 5·18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다 겪고 복학하니 1981년이었어요. 그때부터 10년간 우리 사회가 (군부정권 독재와 이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엄청났죠. 이번 소설의 인물들은 특정한 모델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당시 운동권 리더였던 학생회장들, 양심선언한 군인과 경찰, 수사계통에 있던 사람들을 비롯해 학생운동을 했건 안 했건, 여학생이건 남학생이건 모두 소설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다만 저는 1980년대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1980년대를 소환한 겁니다."

이 소설에선 산양유(염소젖)로 만든 셔벗 아이스크림과 두꺼운 프라이팬으로 원두를 볶은 이디오피아식 커피가 중요한 음식으로 묘사된다. 구효서는 앞으로 '요요 시리즈'를 10권쯤 쓸 계획이다. 그는 이제껏 낸 수십 편의 작품 중 가장 애정 있는 작품으로 "금방 낳아 놓은 새끼가 가장 예쁘다"며 '요요 시리즈' 삼부작을 꼽았다. 늦둥이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통영은 바다가 있고, 남쪽 나라이고, 동피랑에 좋은 카페가 많아요. 산책하고 어슬렁거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에 통영만큼 좋은 곳이 없어요. 제가 소설에서 소개하는 음식들은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조금 시간이 들지만 대개 수제로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작에서 썼던 목포와 평창도 슬로 시티, 슬로 푸드,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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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의 구효서(앞줄 왼쪽 끝). 오른쪽으로는 다와다 요코(일본), 정현종, 잉고 슐체(독일), 벤 오크리(영국), 앤드류 모션(영국), 르 클레지오(프랑스), 신달자, 아미야 데브(인도) 등 여러 나라 작가들이 보인다. /구효서 작가 제공

 

앞으로 '요요 시리즈'에 고향 강화도가 포함될지 물었다. "당연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요요 시리즈' 강화도는 어떠한 음식이 등장할까. 그에게 다시 좋아하는 고향의 음식을 물었다.

"술 먹고 술병이 났을 때 제일 먼저 피로회복제로 먹는 음식이 젓국찌개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준 강화도 음식인데요. 돼지고기와 두부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새우젓으로 끓이는 음식이죠. 어머니는 고기가 귀한 시절 그냥 새우젓만 넣고 끓였습니다. 대신 매운 고추 송송 썰어서 칼칼하게 해서 그거 먹으면 기운을 차리게 돼요."

강화도 젓국찌개는 현재 '젓국갈비'로 널리 알려진 토속음식이자 강화 사람들의 '소울푸드'이다. 강화도 앞바다에선 해마다 2천400t가량의 젓새우가 잡힌다. 가을에 잡아 젓갈을 담그는 '추젓'의 전국 생산량 70%가 강화도에서 나온다. 그 옛날 먹을 것이 부족해도 새우젓만큼은 넉넉하게 있었다고 한다. 강화도 가정집에서 만든 젓국은 따로 정해진 조리법이 없었다. 호박이 나는 집에선 호박을, 감자를 심은 집에선 감자를 넣고 끓였다.

강화 사람들이 집에서만 먹던 젓국에 돼지고기를 넣어 강화읍 시장에서 판 지도 오래된 모양이다. 강화도에선 소만큼 돼지도 많이 키웠다. 앞서 소개한 향토지 '강화'에서는 1948년 당시에도 "강화종이라는 특수품종으로 발전돼 그 육미가 특이하며 품종이 우량하여 현재 각 지방에 종돈으로 다량 공급되니, 이는 도서로서 형성된 지방인 천혜로 전염병 등의 침입이 전무하다는 것도 한 원인일 것이다"고 했다.

강화읍 관청리에서 34년 동안 젓국갈비 전문점을 운영해 원조로 통하는 '일억조식당' 임경자(63) 사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화 사람들은 돼지 젓국을 먹었고, 저도 어릴 적 어머니가 늙은 호박과 두부를 넣고 끓여주던 기억으로 돼지갈비를 넣어 새로 개발한 음식"이라며 "전문점들이 생겨나면서 강화 밖에서도 유명해졌다"고 말했다.

 

■문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

유튜브, 넷플릭스 등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필두로 영상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책을 점차 읽지 않는 분위기다. 챗GPT 같은 초거대 인공지능(AI)이 소설까지 쓰는 시대다. 구효서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없앨 수 없는 '법'으로 존속할 것으로 본다. 모든 언어가 문법으로 이뤄졌듯 영상 언어 또한 언어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챗GPT에 대해선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문법의 기본은 문장을 쓰는 것이고 문장을 익히는 것이며 문학을 하는 것이죠. 사람이 생각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문학은 필수 불가결한 것인데, 어떻게 우리가 문학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저도 챗GPT를 해봤는데 멀쩡하게 씁니다. 앞으로 제한 없이 발전하리란 것은 저도 짐작할 수 있겠어요. 이제는 아마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가 다 책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만 누가 어떻게 명령했을 때 어떤 작품이 더 잘 나올지, 그것도 작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최초의 명령자는 언제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챗GPT 자주 사용" 긍정적 반응
작품 명령자와 퀄리티는 작가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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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동인문학상 시상식. 왼쪽부터 이문열, 신경숙, 오정희, 정과리, 꽃다발을 든 구효서 부부, 김화영, 김미현./구효서 작가 제공

구효서가 강화도에 대해 쓴 작품 가운데 단편 '시계가 걸렸던 자리'는 유년기가 아닌 현재 시점이다. 그가 생년월일에 더해 '분초'까지 세게 된 이유가 이 소설에서 나온다. 구효서는 마흔일곱이 되던 해 창말 옛집을 다시 찾는다. 'ㄱ'자로 지어진 한옥은 구효서의 아버지가 혼자서 행랑채(대문간 옆 집채)를 지어 'ㅁ'자 됐다. 2023년 현재까지도 그 집은 폐가로 남아있으나, 행랑채는 폭삭 주저앉았다.

고향집에 살던 시절 행랑 창문 밖으로 넓은 간척지와 서해가 보였고, 바다 건너 석모도와 교동도가 보였다고 한다.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고자 문 양쪽에 세운 기둥)에는 어린 구효서가 붓글씨 연습할 때 쓴 '구효서'란 글씨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부뚜막과 아버지가 만든 나무 책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구효서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아침 햇살이 막 방문 문턱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고 했다. 마흔일곱 생일 아침, 구효서는 고향집 안방에 쪼그리고 앉아 아침 햇살이 방문 턱에 떨어져 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 시각은 정확히 오전 10시 6분 45초이었다. 집에선 구효서가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시계를 들였는데, 안방 시계가 걸렸던 벽엔 녹슨 못 하나만 덩그러니 박혀 있었다.

"강화도에 대해 쓴 이야기는 거의 90% 이상이 유년 얘기입니다. 모든 유년의 기억들은 현재의 내가 기억해내는 것이잖아요? 강화도는 항상 추억의 대상, 기억의 대상이었죠. 현재 나의 기억과 생각이나 느낌들이 고향이라는 것을 만나서 새로운 세계나 느낌이 창출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저와 강화도가 이렇게 부딪히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는데요, 이것은 강화도가 나한테 작용하는 것이지요. 앞으론 유년 일색이 아니라 새롭게 강화도를 보고 싶습니다. 우리 선산에 가면 가족 묘역에 제 자리가 딱 있어요. 이제 곧 제가 묻힐 곳이 강화도이기도 합니다."

 

강화 소재 이야기 대부분 유년 시절

별립산 한국 역사의 중요한 장소

이젠 추억 아닌 새로운 고향 보고파

소중한 걸 품고 있는 알 같은 공간 강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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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가 출생 직후 이사해 열다섯 살때까지 살았던 강화군 창후리 창말 한옥집.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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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강화군 창후리 창말 한옥집 문설주에 어린 구효서가 붓글씨 연습을 하며 쓴 '구효서'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2023.05.12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구효서는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별립산을 떠올린다. 강후초등학교 교가에도 나오는 별립산은 '장엄한'이란 형용사가 붙어 어렸을 땐 정말로 장엄한 줄 알았다. 성인이 되고 보니 장엄하긴커녕 조그마한 산에 불과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올 때면 별립산부터 찾는다. 별립산을 보면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같은 자전적 소설을 떠올린다고 한다. 박완서의 고향은 황해도 개풍군으로, 구효서의 고향과 멀지 않다.

별립산과 강화도는 가깝게는 분단의 현장이면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미국, 프랑스, 일본과 국제전을 펼친 전선이고, 병자호란과 대몽항쟁을 치른 공간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구효서는 고향을 떠나고 나서야 그곳이 역사의 중심이었음을 생각하게 됐다. 그는 "내가 어릴 적 봤던 산과 지역이 역사 속에서 가늠되는 좌표들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품고 있는, 그런 알 같은 공간이 예나 지금이나 강화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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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송해면 하도리에 있는 '강영뫼 73인 순의비'. 주변에 잡초가 무성한 채로 방치돼 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강화도에서도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 인민군 등에 의해, 또는 이듬해 1·4후퇴 전후로 남측 지역 특공대 등에 의해 강화도 주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소설가 구효서의 고향인 강화군 하점면 창후리에서 양사면 인화리로 넘어가는 중외산 고개는 주요 민간인 학살 현장이다. 강화도에선 중외산을 강영뫼라고도 부른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을 규명한 '강화 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1950년 9월 29일 밤부터 30일 새벽 사이 강영뫼에서 인민군과 내무서원이 강화도 전역에서 붙잡아 온 주민 43명을 구덩이(참호)에 몰아넣고 학살했다.


이 사건은 1966년 창후리 간곡노인회장을 맡던 이병년 씨가 심도직물공업 김재소 사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에게 지원받아 '강영뫼 73인 순의비(殉義碑)'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면서 알려졌다. 순의비는 창후리 선착장 인근 언덕에 세워졌다가 1981년 도로 공사로 인해 송해면 하도리 강화유격용사위령탑 인근으로 옮겨졌다.

순의비에 쓰인 희생자 73명은 이병년 씨가 개인적으로 조사해 밝혀낸 명단이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순의비 명단 73명 가운데 일부는 개성 송악산으로 끌려가 희생됐다. 현재 순의비는 잡초에 둘러싸인 채 방치되고 있지만, 1970년대엔 반공의 표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어릴 적 구효서와 동네 사람들은 강영뫼를 지날 때 보이는 학살 장소를 '80년 구덩이'라고 불렀다. 80년이 된 구덩이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80명이 학살당한 구덩이라는 뜻인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2008년이 돼서야 정확한 희생자 수와 당시 상황이 조사됐기 때문에 정확한 내막을 몰랐던 동네 사람들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구나'하고 생각한 것이다.


구효서는 "친구들과 그곳을 지날 때 늘 마음을 졸이곤 했다"며 "앞으로 강화도 이야기를 쓰면 80년 구덩이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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