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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6)] 유리천장도 막지못한 '중앙동 수학대장 이혜숙'

김성호
김성호 기자 ksh96@kyeongin.com
입력 2023-07-19 16:27 수정 2023-11-0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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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이 성장한 고향 인천은 다양성이 존재하는 도시였다. 외국 사람과 새로운 문물이 들어온 흔적이 가득한 도시에서 성장하며 이 소장은 자연스럽게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를 배웠다. 고교 시절에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과학 법칙에도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는 과학적 태도를 익혔다. 세상을 이끌어갈 성실하고 진취적인 여성을 길러내려 애쓴 인일여자고등학교의 교육 지향점은 그를 자연스럽게 이화여대 진학으로 이끌었고 그 역시 여성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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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일여자고등학교

이 소장은 1948년 강원도 원성군(현 원주시)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부모님을 따라 인천에 정착했기 때문에 강원도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유년 시절 기억은 옛 인천시청(현 인천 중구청) 맞은편 중앙동 한 주택가에서 시작된다. 지난달 29일 중구청 앞에서 그를 만났다.

강원도 원성군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무렵 부모님과 인천 정착
나와 다름 인정하는 태도 배웠다

이 소장은 중구청 담장 건너편 길에 있는 건물을 손으로 가리키며 "지금은 집이 남아 있지 않지만, 살던 곳이 이곳 근처였다"며 "그래도 옛 모습이 남아 있어 반갑다. 가끔 와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집 앞에서 자주 마주치던 화교(華僑) 학생들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이 소장이 살던 곳은 개항장 일대로 불리는 곳이다. 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그의 집으로부터 100여m 걸어가면 중국인 거리가 나오고 인근에는 화교학교가 있었다. 화교학교는 현재도 남아 있다.

한국 화교는 임오군란 시기 청나라 군역 상인 40여 명이 유입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가 141년 전인 1882년이다. 그들이 한반도에 지금과 같은 사회를 이루고 활발한 무역 활동을 벌인 것은 1882년 10월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이후다.

인천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생긴 중국인 마을이다. 화교 인구가 많을 때는 5천 명을 넘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약 3천 명의 화교가 인천에 살고 있다. 현재 남한 전체에는 1만6천여 명의 화교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정희 소설 '중국인 거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
'뙤놈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과 전혀 접촉이 없었음에도
언덕 위의 이층집,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한없이 상상과 호기심의 효모였다

이 소장은 중국인 언니·오빠를 약 올려 크게 혼난 일을 기억해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린아이였죠. 도대체 어린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 앞에 혼자 앉아있다가 무리를 지어 수다를 떨며 지나가던 화교 언니·오빠들을 놀렸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동네 아이들에게서 배운 무슨 노래를 불렀던 것 같은데…. 무리 중 큰 학생이 저를 야단치고, 어머니가 학생에게 사과하시고, 저는 무척 혼나고 그런 기억이 있네요."

이 소장이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인데, 그 일이 있었던 후로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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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인 인일여고 과학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혜숙 소장

여성스럽게 길러진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긴 머리카락 때문에 시간 뺏기는게 귀찮아

부모 허락 받지 않고 잘라냈던 당찬 아이

과학계서 여성의 역할 알기라도 한 것일까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자신이 여성으로서 짊어져야 할 앞으로의 역할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이 소장은 '여자답게' 보이는 예쁜 긴 머리를 부모 허락도 없이 잘라낼 만큼 스스로 결정을 내릴 줄 아는 당찬 아이였다.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혜숙의 머리는 굉장히 길었고, 사랑스럽고 예쁜 여자아이 모습이었다. 그런 이 소장의 어머니에게 매일 아침 딸의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따 주는 것은 등교 전 중요한 아침 일과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이 소장은 학교 안 이발소를 무작정 찾아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랐다. 이 소장은 긴 머리카락 때문에 시간을 뺏기는 게 귀찮았다고 한다. 머리를 자르고 더는 긴 머리와 씨름하지 않아도 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던 것으로 이 소장은 기억했다. 하지만 어머님은 상의도 없이 묻지도 않고 머리를 잘랐느냐며 그를 호되게 꾸중했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머리를 곱게 땋아주는 시간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아이를 여성스럽게 키우고 싶으셨겠지만, 제가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네요. 하지만 이해했어도 머리를 잘랐을 것 같아요. 그런데 단발머리가 관리하기 더 어렵더라고요. 그때 알았죠. 돌이켜보면 (예쁘게 보여야 하는) 그런 과정을 어딘가 불편하게 느낀 것 같아요. 여성스럽게 길러진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같아요."

이 소장은 그날 이후로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때보다 지금 머리카락 길이가 더 짧다. 이 소장은 "길면, 머리에 시간을 많이 들이게 되거든요. 좀 귀찮기도 하고요. 지금도 머리를 잘 만질지 모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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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시절 수학 강연을 하고 있는 이혜숙 소장. /이혜숙 소장 제공

이 소장에게 각인된 잊지 못할 어린 시절 기억 가운데에는 '개 건너'에 송충이를 잡으러 다닌 장면도 있다. '개 건너'는 갯벌을 건너야 갈 수 있다고 해서 부르던 지명으로, 지금의 인천 서구 일대다. 당시 명칭은 북구였다.

"요즘 부모들이나 학생이 들으면 기겁할 이야기일 텐데요. 인천여자중학교 재학 시절 깡통에 긴 젓가락 하나 들고 '개 건너'로 송충이를 잡으러 간 기억이 남아 있네요. 해충약이 귀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들이 송충이 박멸에 동원된 것 같아요. 송충이 잡는 일을 징그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놀이하듯, 경쟁하듯 깡통을 서로 가득 채우려고 했어요. 그러다 멀리서 물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빠져나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소장은 어머니에 대해 "여자아이인 나를 독립적으로 키우시려 했다"고 기억했다. 어머님은 "학교는 꼭 가야 하고, 학교에서 시키는 것은 꼭 해야 하며, 여자도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학교 숙제를 다 마쳐야 나가서 놀 수 있었다고 한다. 맏딸인 이 소장에게는 3명의 동생이 있는데, 이 소장을 포함한 4명 모두 초등·중등학교 개근상을 받았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 하루는 이 소장이 친구들의 장난으로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 급하게 병원에서 상처를 꿰맸는데, 어머니는 이 소장을 다시 학교로 돌려보내 남은 수업을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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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숙 소장이 교내에 전시된 옛 인일여고 교정을 재현한 미니어처를 살펴보고 있다.

배움의 즐거움을 일깨워준 선생님

이 소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시 공부를 잘해야 진학할 수 있는 명문인 인천여중·인일여고에 다녔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 소장은 교복을 입고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나서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준 스승을 만난 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과학 시간일 텐데요. 물리·화학·생물을 다 합한 그런 물상 과목을 중학교에 들어와서 참 재미있게 배우게 됐어요. 여성으로서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신 강순옥 선생님이 가르치는 물상을 만났는데,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어요. 다음에는 또 무엇을 배우게 될까 하는 기대감을 주는 수업이었어요."

이 소장이 과학 행정가이면서 수학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은 강순옥 교사에게 배운 가르침이 절대 적지 않다. 이 소장은 "배움의 즐거움을 일깨워준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강순옥 선생님은 이후 인일여고에서 근무하게 된다.

머리에 쏙쏙 들어온 강순옥 선생님 수업

과학 행정가·수학자의 삶으로 인도해

학교 실험실에서 보낸 시간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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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올해의 여성과학자상 수상. /이혜숙 소장 제공

'21세기를 주도할 성실하고 진취적인 여성의 육성'을 목표로 삼는 인일여고는 1961년 인천여자중학교 병설학교로 인가를 받아 설립됐다. 같은 해 4월 첫 입학생을 받았다. 1971년 인일여고는 인천여자중학교에서 분리됐다. 1971년 21학급, 1974년 30학급을 인가받고 1975년 정부 시책에 따라 평준화 학교가 됐다. 현재 인일여고 교사상은 '연구하고 실천하며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이며, 학생상은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다.

이 소장은 고교 시절 학교 실험실에서 보낸 시간이 행복했다고 기억했다. 인일여고 과학 실험실은 당시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소장이 고교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실험실에 처음 갔을 때 '대학 실험실이 고등학교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인일여고 실험실이 수준급이던 이유는 강순옥 교사의 열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소장은 "선생님이 실험실 예산을 확보하려고 다른 선생님들과 경쟁도 많이 하시고 외부에서 예산을 많이 받아오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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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인일여고 과학실에 앉아있는 이혜숙 소장

'남성'이었다면, 중·고등학교 교사로 오실 일은 없었을 거예요

고교 시절 이 소장이 실험실에서 배운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장은 "예를 들어 ○○법칙에 대한 실험을 하고 선생님이 설명해 주시고 나면 항상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로 마무리하셨어요. 항상 예외가 있다는 것이죠. 그 '룰'에 맞지 않는 결과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설명하셨어요. 과학자에게 굉장히 중요한 '태도'가 예외를 인정하는 것인데, 그걸 가르쳐주신 거죠."

이 소장은 고교 시절 선생님을 통해 한국에서 여성 과학인이 앞으로 싸우며 헤쳐나가야 할 현실을 미리 엿봤다.

"그 시절, 만약 선생님께서 서울공대 화공과를 졸업한 '남성'이었다면, 중·고등학교 교사로 오실 일은 없었을 거예요. 갈 곳이 굉장히 많고, 소위 빛나는 자리도 있었을 텐데…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회가 선생님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거죠."

이 소장은 이화여대 수학과 출신이다. 고교 시절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서울대 화학과로 진학하려고 마음먹고 원서까지 썼다. 하지만 강 교사의 만류로 이화여대 수학과로 진로를 바꿨다.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들려주시더군요. 서울대 화학과에 가면 '나 같은 사람'이 되겠지만 이화여대는 (너를) 잘 키워줄 거라고요."

언제나 의연하던 스승,  서울대 진학하려자 만류

자신의 뜻을 못 펼친 것에 대한 억울함 알게 돼

'여성 리더 육성' 이화여대 수학과로 진로 바꿔

제자 앞에서는 여성으로 겪은 억울함을 보여주는 일 없이 언제나 의연하던 스승이었다. '잘 나가는' 남성 동기 동창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부러운 내색을 하시지 않던 분이었지만, 제자가 서울대에 진학하려는 순간 만류하셨다.

"그제야 알게 됐죠. 선생님께서도 자신의 뜻을 못 펼친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으셨구나, 꼭꼭 숨기고 제자 앞에서는 의연하게 버티셨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인지 강 교사가 근무했던 인일여고에는 유명한 여성 과학인이 많다. 이혜숙 소장뿐 아니다. 의학박사 출신인 안명옥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화학공학자인 최순자 전 인하대 총장, 생물학자인 유순애 배재대 명예교수, 해양생물학자인 안인영 전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 등이다.

이 소장은 "농담으로 말씀드리곤 해요. 교사로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셨으니까 더 잘되신 거라고요. 그렇게 우리가 선생님을 위로하기도 했어요"라고 했다.

이화여대 수학과에서 공부하던 시절은 행복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이화여대는 여성 리더를 육성하는 학교 비전이 확실하게 서 있었다. 재학 시절 여성으로 억울함을 느낄 일이 없었다. 여자 대학에서 여성 리더를 길러내야 한다는 소임이 몸에 밴 교수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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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이화여대 자연대학 초청 강연에서 만난 1977년 노벨화학상 수상자 일리야 프리고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이혜숙 소장. /이혜숙 소장 제공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한 것은 1980년이다. 그가 공부할 때와 비교하면 이공계 학문을 공부하

는 학생이 늘었고, 유학을 다녀오는 학생도 많던 시기였다. 하지만 여성 인력이 진출하기에는 여전히 과학계 문이 

좁았다. 여성 과학 인력을 대하는 과학계 태도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다른 교수에게 제자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어요. 제가 이러 이러한 경력을 갖춘 학생이 있다고 말씀을 드리면 관심을 보이다가도 여성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단박에 '우리는 여성 안 뽑습니다'는 대답을 노골적으로

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저는 정색을 하고 '고소당하고 싶으냐'며 따졌죠.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다 유학을 다녀온 남성 교수들이에요. 만약 그 시절에 미국에서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소송을 겪을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대답한 것이죠. 어렵게 공부했는데, 여자라는 이유로 능력을 펼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죠."


그때부터 과학계의 성별 불균형을 바꾸려 애썼다.

"직업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이 누군가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죠. 저는 교수라는 확실한 직업이 있으니, 직업이 없는 제자와 여성 과학 인력을 대신해 싸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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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WISET여성과학기술인 멘토링의 밤 개막식

현실을 바꾸려면 더 많은 여성이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제안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WISE(Women Into Science & Engineering)다. 요약하면 이공계 공부에 재능이 있는 여학생과 이들의 모델이 될만한 여성 과학자를 일대일로 맺어주는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학생과 교육 현장의 동료 교수들이 힘을 모아 알음알음 시작하던 것이 나중에 정부의 지원을 받는 정식 프로그램으로 확대되며 전국에서 사업이 진행됐다. 2002년에는 '여성 과학 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나중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기타 공공기관으로 '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가 따로 세워졌고, 그가 초대 소장을 맡았다.


"이 운동을 하면서 '도대체 왜 여성 과학자가 많아야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싫어서 배우지 않는 건데 억지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의 질문이었죠.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답변하곤 했습니다. 과학을 하는 데 관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성의 관점과 남성의 그것이 다를 수 있다. 여성의 관점이 들어갈 때 비로소 과학이 조금 더 온전해질 수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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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대학원장 재임 시절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 명예 철학박사 학위 수여식. 사진 맨 오른쪽이 이혜숙 소장이다. /이혜숙 소장 제공

여성 과학 인력이 과학계에 제대로 자리를 잡게 하기 위해 힘쓰던 이 소장은 어느 날 과학계의 또 다른 불균형과 마주한다.

2013년 미국에서는 1997~2000년 사이 제조·판매된 10개의 약이 심각한 부작용으로 시장에서 퇴출됐다. 10개 중 8개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위험이 컸다. 미국 의회 입법 보조기관인 회계감사원(GAO)이 조사해 보니 신약 개발 과정에서 주로 수컷 동물이 사용됐고, 임상 실험도 주로 남성 위주로 진행됐다.

"차량 충돌 사고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치명적이라는 실험 결과가 있기도 해요. 왜냐하면 차량 충돌 실험에 쓰는 인체 모형이 백인 남성 평균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거죠. 이러한 사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장은 과학기술 성과가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 성별의 다름을 반영하고 연구하는 '젠더 혁신'에 힘쓰고 있다. 이 소장의 설명을 들으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젠더 편향 사례'는 차고 넘친다. 젠더 편향을 극복하려면 공공의 역할뿐 아니라 개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우리보다 조금 먼저 이런 운동을 시작했어요. 의사에게 '당신이 나를 진료할 때 남녀가 다름을 반영하느냐'고 묻는 운동인 거죠. 사실 이 문제는 연구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구 정책 기관이나 전문가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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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이혜숙 소장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한테 맞는 것을 하라

이 소장은 고향 인천의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 두 가지를 건넸다.

"제가 수학을 했다고 하면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겨운 공부를 어떻게 했느냐는 사람들도 있고요. 사실 수학은 언어이고 규칙이거든요. 수학을 쉽게 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나의 교양으로 수학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 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꼭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앞으로 다가올 세상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것과는 굉장히 다른 세상이잖아요. 마음을 활짝 열고 자기한테 맞는 것을 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이과·문과·예술이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요."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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