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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악성민원'을 민원합니다

김우성·조수현·변민철
김우성·조수현·변민철 기자 wskim@kyeongin.com
입력 2024-03-28 19:34 수정 2024-03-2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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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찍기' 김포 공무원 사망 그후… 커져가는 변화의 목소리

애써 웃으며 견뎠고… 협박 시달려도 참았고… 해코지하면 당했고

 

김포시 9급 공무원이 '좌표찍기'에 따른 민원폭주에 시달리다 숨진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사상 첫 악성민원TF를 가동하고 속속 대책을 내놓고 있다. 수많은 공무원이 생을 등지고 염산과 쇠망치 등으로 잔인하게 공격을 당할 때도 없었던 조치다.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는 평도 있지만, 최일선 공무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동시에 불거지고 있다. 민원트라우마를 겪는 공무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책 결정과는 멀찍이 떨어진 현장에서,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천민우 주무관 생전
2021년 여름 부평구보건소 코로나상황실에 근무할 당시 나정만·천민우·최권형 주무관.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

손흥민·블랙핑크·레드벨벳
관심사 얘기 나누던 1986년생 동갑내기

그저 누군가의 아들이자 형제이자 친구였는데
'순직' 무슨 소용인가
#내 친구 이름은 민우입니다
■ 내 둘도 없는 친구 천민우를 소개합니다. 저는 민우와 함께 인천 부평구보건소에서 근무해온 최권형이라고 합니다. 민우는 물리치료사로 일하다 2020년 6월에 늦깎이 공무원이 됐습니다. 저보다 6년 후배이긴 해도 1986년생 동갑내기인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됐습니다. 민우는 심성이 착하거든요.

남성 직원이 많지 않은 보건소에서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를 만난 건 행운입니다. 그해 여름 코로나19 상황실에 열흘 정도 파견된 우리는 밥 먹을 때마다 유럽에서 활약하는 손흥민 이야기를 나누며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민우는 자기가 뛰는 풋살팀에도 들어오라고 제안했는데, 제가 "축구하다 다치면 보건소 업무는 누가 하느냐"고 뿌리쳐 서로 깔깔대며 웃었던 적도 있습니다.

소주도 종종 마셨습니다. 블랙핑크와 레드벨벳 등 좋아하는 아이돌부터 결혼은 언제 하겠냐는 푸념까지 우리의 술자리는 많은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민우는 착실히 저축하며 내 집 마련을 꿈꾸고 있다고 했습니다.



민우는 2020년 9월 다시 코로나상황실에 배치돼 자가격리대상자 통보와 집단격리시설 점검 등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듬해 델타 변이가 확산하면서부터는 집에 제때 들어가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지난 2022년까지 매달 민우를 만났습니다. 작년부터는 일 년에 두 번은 꼭 민우를 만납니다. 그런데 민우와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민우는 2021년 9월 15일 스스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천민우 주무관 봉안당
추모공원에 안치된 故천민우 주무관. /최권형 주무관 제공

민우는 하루 300여명의 민원인과 통화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내가 왜 자가격리야 이 ××야", "나 자가격리하면 먹을 것 없으니까 네가 사와", "너 말고 높은 놈 바꿔 ××야" 등 폭언이 날아왔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 민우는 "권형아. 나 내일 정말 가기 싫어"라고 했습니다. 대신 가주겠다 했더니 민우는 "아니야. 내가 해야지"라며 엷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날 기운이 빠진 채 마른세수를 하던 민우가 두고두고 떠오릅니다. 애써 짓던 마지막 미소가 잊히지 않습니다.

민우는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기계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누군가의 아들이자 형제이자 친구였습니다. 이제 와 순직이 무슨 소용인가요. 적어도 평범한 인격체로만 살 수 있게 해주실 순 없었던 건가요. 벼랑 끝에서 소리 한 번 내지르지 않은 여린 친구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민원에 고통… 부모님께 털어놓으려 해도
근심만 더해드릴라 '속앓이'

시민의 권리 침해하고 공무원들을
괴롭히기 위한 행위는 민원 아니야
#이건 민원이 아니었습니다
■ 저는 화성시청에서 일하는 마흔두 살 김OO 주무관이라고 합니다. 저는 언성을 높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싸우려 한 적도 없습니다. 저만 참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민원인 A씨를 상대로 얼마나 길어질지 모를 법적 대응을 시작하려 합니다. 출구 없는 억지주장과 폭언·협박을 참고 또 참아 봤으나 집에 돌아가 소파에 기대앉아도, 밥을 먹을 때도, 자려고 눈을 감아도 온통 그 사람이 떠오르며 정신이 피폐해졌습니다. 한집에 사는 부모님께 털어놓으려 해도 근심만 더해드릴 것 같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공직생활 7년차인 저는 화성지역 건축관련 인허가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이렇게 대응하려던 건 아닙니다. A씨의 요구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났습니다. 자의적으로 만든 점검표를 내밀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점검제도를 문제 삼거나, 엄연히 관련법에 따라 설비된 시설을 놓고 '불법시설'이라는 일방적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법과 제도를 토대로 차근차근 절차대로 설명해봐도 돌아오는 건 폭언과 협박이었습니다. '징역 살게 해주겠다. 감방에 들여보내겠다'는 겁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한 번 걸어오면 붙잡고 놔주질 않았습니다. 정보공개청구·국민신문고 등 민원창구를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불만을 쏟아부었습니다.

화성 악성민원 피해 주무관
오랜 고민 끝에 민원인에 대한 법적대응을 결심한 화성시청 주무관이 그간 겪은 피해를 힘겹게 떠올리고 있다. /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제가 법적 대응을 결정하기까지는 동료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컸습니다. A씨가 똑같은 내용의 민원을 저의 전임자와 인접 지자체 공무원에게까지 제기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김포의 9급 공무원이 민원폭주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한 사건도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처럼 서른 중반의 늦은 나이에 공직에 입문했다던데, 그런 일을 겪는 와중에 책임감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조차 못 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악성민원은 폭언·폭행·협박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수천 건의 민원을 제기해도, 몇 시간씩 전화를 끊지 않아도 '국민의 권리'를 명분으로 당연시합니다. 어떤 지자체는 연간 9만건의 민원 중 2만건을 일곱 명이서 제기했습니다. 이게 정상인가요.

 

다른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고 공무원들을 괴롭히기 위한 행위에는 민원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안 됩니다. 악성민원은 민원이 아닙니다.

꾸준히 민원 제기하던 60대 남성
사무실 찾아와 과장 향해 '염산테러'

강력한 처벌이 효과적 해결책인데
"아무 일 없으면 보복 돌아올 것"
#고통받아도 되는 일은 없습니다
■ 지난 2021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포항시청 교통관련 부서 사무실에는 전 직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버스 파업에 따른 밤샘근무를 마친 직원들은 비몽사몽 새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시각, 택시면허 중개일을 하며 민원을 제기해 오던 60대 남성이 사무실에 들어서더니 과장의 자리 앞에 가서 앉았다.

잠시 후 이 남성은 통화에 열중하던 과장을 향해 미리 준비한 액체를 들이부었다. 정체 모를 악취가 코를 찌르고 사무실은 아비규환이 됐다.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남성은 공중에 액체를 흩뿌리며 난동을 부리다 경찰이 출동하고서야 제압됐다.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던 '포항 공무원 염산 테러사건'이다.

당시 선임급이었던 최규성(이하 가명)씨와 박상철씨, 공직 5년 미만이던 김준호씨는 사건을 목격한 동료들이다. 지난 27일 오전 포항시청에서 만난 이들은 과장이 부하들을 대신해 가해자 B씨를 상대하다 변을 당했다고 했다. B씨는 자신의 수익활동이 멈추지 않게 택시감차사업을 빨리 끝내 달라고 민원을 넣고 있었다. 제도나 절차상으로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최씨는 "과장님이 버스 파업과 관련해 일에 매진하고 계셨을 때라 방어할 틈도 없이 당하셨다"고 힘든 기억을 떠올렸다. 사건이 일어난 당일에 사무실은 평소처럼 운영됐다. 민원업무는 그대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포항 염산테러 목격자들
포항시청 공무원 염산테러를 목격한 동료들은 "김포 공무원 사건 이후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들지 않는다"고 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사건 이후에도 악성민원은 별로 줄지 않았다.

최씨는 "사건 얼마 뒤 통화하게 된 어느 민원인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될 것 같으니 '너희가 그렇게 하니까 테러를 당하는 거다'라는 폭언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강력한 처벌이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뭘 해도 처벌받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해도 아무 일 없네'라면서 보복이 돌아올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포항시는 엄격한 출입통제장치를 설치하는 등 자구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무윤 전국공무원노조 포항시지부장은 "읍면동에서 유사사태가 발생했을 시 무방비상태인 것도 문제다. 이는 전국적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내용만 조금씩 바꿔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민원폭탄이라든지 공무원의 감정을 자극하는 통화민원 등에 대해서도 정부 차원의 대책이 나온 적은 없다. 당장 모든 행정전화에 자동녹음시스템만 도입해도 공무원들의 근무여건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정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김우성·조수현·변민철기자 wskim@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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