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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 찾다가 만난 ‘고향의 정취’… 신경림 시인에게 영흥도란 [인천문화산책]

박경호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입력 2024-05-22 14:02 수정 2024-05-22 16:37

국민시인 신경림 22일 향년 88세로 별세

산문집 ‘민요기행2’ 인천 영흥도 여정 담아

신경림 시인. /경인일보 DB

신경림 시인. /경인일보 DB

시집 ‘농무’ ‘가난한 사랑노래’ 등을 쓴 신경림 시인이 22일 오전 8시17분께 암 투병 중 향년 88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193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태어난 신경림 시인은 1956년 문예지 ‘문학예술’에 시 ‘갈대’ ‘묘비’ 등 작품이 추천돼 등단했습니다.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로 시작하는 대표작 ‘농무’를 비롯해 시인은 농민과 서민 등 민중의 고달픔을 달래는 따뜻하고 잔잔한 민중시를 썼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민시인’으로 사랑받았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전국 곳곳을 찾아 민요를 수집하면서 그 여정을 쓴 산문집 ‘민요기행 1’(1985년·한길사)과 ‘민요기행 2’(1989년·한길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시인은 ‘민요기행 2’에서 인천 영흥도를 찾은 이야기를 ‘해서(海西)의 정서와 꿈’이란 제목으로 썼습니다.

시인은 애초 연안부두에서 백령도와 대청도로 가려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덕적도로 방향을 바꾸려 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이 영흥도로 향합니다. 영흥대교도, 거대한 석탄화력발전소도 없던 1980년대 영흥도에 정원 243명의 14t짜리 ‘관광8호’라는 배를 타고 갔다고 합니다.

시인은 “깨끗하고 맑은 동해보다 보기에는 구질구질하고 너절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더 짙은 서해가 나는 더 마음에 든다”고 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산문집 ‘민요기행 2’(2005·문이당) 표지. 한길사에서 펴낸 ‘민요기행 1, 2’는 구해 읽기 어려우나, 문이당이 발간한 ‘민요기행’은 전자책 등으로 읽을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의 산문집 ‘민요기행 2’(2005·문이당) 표지. 한길사에서 펴낸 ‘민요기행 1, 2’는 구해 읽기 어려우나, 문이당이 발간한 ‘민요기행’은 전자책 등으로 읽을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영흥도의 민요를 듣기가 만만치 않았던 시인은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향을 그리는 사람들은 시인에게 저마다 고향 이야기 삼매경입니다. 황해도 강령반도에서 온 실향민들은 강령탈춤이 해주탈춤이나 봉산탈춤보다 윗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신경림 시인은 영흥도에서 ‘해서(황해도)의 정서’를 느낍니다. 북녘 황해도의 정서가 담긴 쓸쓸하고 구슬픈 가락의 노래 ‘감내기’도 어렵사리 듣습니다.

‘울담정 밖에 꼴비는 도령아/ 외 넘어간다 외 받아 먹어라/ 받으라는 외는 제 아니 받고/ 물 같은 손목을 휘발마 쥔다/ 해는 지고 저문 날에/ 나의 갈 길이 천 리 같다/ 어서 가자 빨리 가자/ 우리 부모님 날 기다린다 (후략)’

‘감내기’는 ‘돌본다’는 뜻의 사투리라고 합니다. “모심으면서도 부르고 김매면서도 부르고 뱃일하면서도 부르는 일 노래가 되었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고 시인은 얘기합니다. 영흥도에서 하루를 지낸 시인은 배를 타고 선재도를 거쳐 대부도 방아머리를 들렀습니다. 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인천까지 가는 도로로 합승 택시를 타고 돌아옵니다.

신경림 시인이 인천에서 만난 해서의 정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한국 문단의 큰 별이 졌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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