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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판타지 한 스푼 '혼돈의 한국사회' [경기도&미술관·(9)]

입력 2024-05-29 19:30 수정 2024-06-09 20:43

이흥덕의 '바나나 카페'


1993년作… 1990년대 관통한 '카페' 연작
폐쇄성·양면성 표현… 그 시절 풍경 녹여

이흥덕, 바나나 카페
이흥덕 作 '바나나 카페'. /경기도미술관 제공

이흥덕의 '카페' 연작은 1987년 <카페>에서 시작해서 1990년대를 내내 관통하다가 1999년에 <빈 카페Ⅰ·Ⅱ>로 이어졌고, <사비나 카페>(2003)로 막을 내렸다. 1987년부터 1993년까지 17점을 그렸는데, 가장 많이 그린 시기다. 그 중 <바나나 카페>는 1993년 작품이다.

그에게 '카페' 연작은 단순히 커피와 술을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카페' 밖의 세상을 적나라하게 투영시키는 마술의 '유리구슬'이다. 이 유리구슬에 비친 '카페'는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꿈과 비루한 현실, 날것의 현실에서 벗어난 '비현실', 현실을 월경해 버린 '초현실'이다. 끝없는 욕망의 판타지다. 그는 이 뒤범벅의 현실을 고스란히 화면에 심었다.

'카페' 연작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는 '만남'을 매개하는 카페 공간의 폐쇄성이고, 둘째는 낮과 밤에 따라 이율배반의 양태를 보이는 양면성이다. 셋째는 현실과 혼합된 신화와 판타지를 통해 혼돈의 한국 사회에 대한 미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페'는 화면 내부에서조차 벽으로 둘러쳐져 있고, 당시 카페들이 대부분 지하 공간을 활용했던 것을 상기시키듯 오직 조명에 의해서만 그 육감적 신체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1980년대 도시 카페란 유럽의 로드(Road) 카페들처럼 커피향과 예술적 향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카페의 양면성은 그 공간이 지닌 특이성 때문일 수 있다. 카페는 점심시간을 전후해 문을 열어 밤늦게까지 영업했다. 낮에는 주로 비즈니스맨들의 미팅 타임이 많았고,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커피와 음료를 소비했다. 이들은 말쑥한 검은 양복과 넥타이, 007가방을 들었거나 간편한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그러나 퇴근시간을 넘기면 맥주와 고급 양주가 메뉴로 올라오고, 여종업원들도 성의 뮤즈로 둔갑했다.

시인 황지우가 1980년대를 "죽음과 절망으로 가득 찬 공간이자 초월해보고 싶은 환멸의 공간"으로 인식한 후 "폭압적 현실에 대한 극도의 좌절감을 풍자라는 수법"으로 새겼듯이 이흥덕의 작품도 이러한 의미의 맥락에서 멀지 않다. 이들의 시어와 화어(畵語)는 동일적 정체를 가장한 쌍둥이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흥덕의 '카페'는 그 시대의 민화적 풍경화인 것이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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