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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자리가 없거든

입력 2024-06-30 19:33

연극 '연안지대'는 전쟁으로
저마다의 상처·사연 남긴 이야기
장례 통해 서로 연대를 경험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걷는 설정
이 작품의 미덕중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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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연극 '연안지대'(와즈디 무아와드 작, 김정 연출, 6월 14~30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레바논 내전으로 열 살에 고국을 떠나야 했던 와즈디 무아와드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다.

연극은 주인공 윌프리드에게 전해진 아버지 이스마일의 사망 소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윌프리드에게 숙제가 생겼다. 아버지를 어디에 묻을 것인가. 왕래가 없던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다. 윌프리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로 한다.

처음 생각은 분명했다. "아버지를 어머니 곁에 묻어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외갓집 식구들 생각은 달랐다. 윌프리드에게 당연해 보였던 일이 외갓집 식구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부터 살인자를 희생자와 함께 묻었니?" 아버지가 살인자라니. 엄마 잔은 윌프리드를 낳다가 죽었다. 허약해서 아기를 갖기 힘들었던 잔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느라 윌프리드를 돌보지 않았다. "네 이모들과 이모부들이 네 교육을 전부 책임졌다." 외갓집 식구들에게는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묻을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아버지가 남긴 빨간 가방에서 편지를 발견한다. 부치지 못한 편지다. 편지는 윌프리드와 아버지를 이어주는 실타래가 된다. 지난 시간의 여백을 채우고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고국으로 갈 겁니다." 하지만 고향 땅에서도 아버지는 눕지 못한다. "왜요?" "자리가 없거든." 시신을 묻기 위해 망자의 관을 열어 망자와 망자를 함께 묻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은 자들이 모든 땅을 차지하고 있어." 더욱이 아버지는 고국에서 도망친 자로 낙인이 찍혔다. "도망친 곳에서나 묻힐 수 있지." 그렇게 아버지는 고향 땅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났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윌프리드는 아버지를 메고 도착 없는 길을 나선다. 고향 땅에서 쫓겨난 자에게 도착할 장소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도착 없는 출발은 순례와 닮았다. 그 길의 여정에서 윌프리드는 만나고 발견한다. 지뢰를 밟은 사이드를 잊을 수 없어 밤낮 노래를 부르는 시몬, 두건을 쓴 아버지를 적으로 오인해 총은 쏜 아메,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아버지와 성폭행당하는 어머니를 봐야 했던 사베, 엄마는 떠났고 아빠는 본 적도 없는 마시, 사람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전화번호부를 짊어지고 다니며 암송하고 기록하는 조세핀. 이들은 전쟁이 남긴 저마다의 상처와 사연을 짊어지고 윌프리드와 함께한다.

메리 캘도어는 '새로운 전쟁과 낡은 전쟁'에서 민족, 인종, 종교의 정체성을 내세우며 경제적 이익을 위해 행사하는 폭력에 주목했다. 이들은 전쟁을 영속하려고 한다. 그래야 지금의 지위와 권력을 지속할 수 있다. 데이비드 킨이 전하는 시에라리온의 팔기 게임(sell-game)은 전쟁이 남는 장사가 되는 상상 불가의 사례이다. "한 도시에서 철수하면서 뒤따라 들어오는 반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남겨 놓는다. 반군은 무기를 챙기고, 시민들에게서 주로 현금의 형태로 전리품을 뜯어낸 뒤 스스로 물러난다. 그 순간 정부군이 도시를 다시 점령하고 자기들도 약탈을 하고 불법 채굴을 자행한다." 전쟁을 승리로 끝내는 게 과거 낡은 전쟁의 목표였다면 새로운 전쟁은 그 목표가 다르다. 낡은 전쟁에서는 군인 사망자가 대다수였다면 새로운 전쟁에서는 민간인이 대다수이다. 새로운 전쟁이 태우는 연료의 땔감은 주로 어린아이와 여성이다.

연극 '연안지대'는 윌프리드가 시몬, 아메, 사베, 마시, 그리고 조세핀과 함께 연안지대에 도착하는 이야기이다. 출발은 윌프리드 혼자였으나 도착은 동료와 함께였다. 윌프리드는 아버지의 장례를 시몬, 아메, 사베, 마시, 그리고 조세핀과 함께 치른 셈이다. 장례를 통해 나의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이고 너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라는 연대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태운 땔감, 그 모두를 위한 장례이기를 빌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상처받고 억압받은 자들과 함께 걷는다는 설정은 이 작품의 미덕 중의 미덕이다.

/권순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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