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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경기] 선사시대~조선시대까지 '유물 출토' 하남 재조명

최규원 최규원 기자 발행일 2016-08-22 제9면

500년 백제 수도는 2천년 역사의 일부였다

철조석가여래좌상(하사창동)
하사창동에서 발굴된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 이하 철조불)은 철불로 높이 2.81m, 무게 6.2t에 이르는 현존하는 철조불 가운데 가장 큰 불상으로 10세기에 제작됐다. 하사창동에서 발굴된 철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하남역사박물관에 전시되는 철조불은 2013년 3D 스캔을 통해 재현된 것이다.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광주향교(전경)
하남시 '금암산 고군분' 발굴조사 계기 역사도시 가치 주목

백제는 기원전 한강 유역인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으나 고구려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천도됐다. 백제시대에 500년이 넘는 동안 하남은 백제의 수도였다. 그러나 하남에서 발굴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구려와 신라 유물이다. 과연 하남위례성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최근 하남시와 하남역사박물관은 하남에 존재한 백제의 유물을 찾기 위해 긴급 발굴조사에 나섰다. 금암산 고군분은 백제의 귀족계층이 묻혀 있는 무덤으로 백제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은 2006년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도로공사 과정에서 일부분 진행했을 뿐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백제 건국부터 웅진 천도 이전까지 500여년간 백제 역사의 중심을 관통했던 하남의 역사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하남의 역사 하면 많은 사람이 한성백제시대의 도읍지였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역사 시대 주요 유물이 발굴된 문화의 보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때문에 역사 발굴의 초점도 모두 백제에 맞춰져 있어 수차례 진행된 발굴에서 고구려와 신라의 유물이 나올 때마다 백제 건국의 수도인 하남위례성을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더 크게 느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백제의 중요성 못지 않게 하남은 고려 시대 개성 다음의 중심지였고,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경주 황릉사지에 버금가는 천왕사지터가 있고, 조선시대 역시 한양 천도 후에도 교육의 중심지였다.

다시 말해 역사적으로 하남은 백제 건국의 도읍지로서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도심지에 버금가는 제2의 수도에 가까운 대형 도읍지였다.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모든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으로 제2의 경주에 버금가는 역사 도시로 재평가받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한 역사학자는 "하남은 우리나라에서 2천년 역사의 모든 역사유물이 출토되는 유일한 곳이지만, 백제 유물 발굴에만 치중해 다른 역사를 등한시 하는 것은 안될 일"이라며 "이번 백제 유물 발굴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 하남의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제석실분(광암동)
광암동에서 발견된 백제 석분실(왼쪽 사진)과 신석기시대 유물로 미사동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무늬넣는도구.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 선사~삼국시대

신석·청동·철기 걸쳐 백제 포함 대규모 취락유적 나와…'고대 → 중세' 전환 과도기 문화 고스란히


하남지역 선사시대의 생활상은 한강변의 고고학적 유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미사지구 및 위례지구의 각종 석기도구, 미사리 유적의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 등은 하남의 선사문화를 보여준다.

미사리 유적은 1960년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래 여러차례 지표조사 결과 신석기 뿐만 아니라 청동기, 철기시대 전기에 걸쳐 형성된 중요한 유적지로 백제시대때까지 대규모의 취락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한반도 중서부 및 남부에 산재하던 50여개 정치체계의 통합, 한강 유역의 백제국을 중심으로 출현했다.

그러나 5세기 고구려와의 전쟁과 6세기 신라와의 전쟁 이후 쇠퇴하면서 하남은 자연스레 신라 체제로 편입됐다.

결과적으로 하남은 고대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하는 과도기 문화를 고스란히 갖고 있으며, 고고학적 유적으로 미사동과 망월동의 생활유적, 덕풍동과 광암동의 분묘 유적과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철제 무기류, 목재로 제작된 생활도구 등은 백제의 성립시기를 중심으로 한 하남지역의 천 년의 다채로운 변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빗무니토기와 무늬넣는 도구(신석기시대)
(위쪽) 동사지는 춘궁동에 위치한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절터로, 절터 중앙에는 보물 제12호와 보물 제1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있다.(아래쪽) 교산동 선법사 옆에 위치한 마애불의 높이는 93㎝이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코는 거의 떨어져 나가고 없다. /하남역사박물관 제공

■ 고려시대

983년 광주목 설치 지방행정 중심… 불교 발달 천왕사지·철조석가여래좌상 등 다양한 유적 분포


고려시대의 하남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940년 지방행정 구역을 주·부·군·현으로 나눴고, 983년 전국의 지방행정 상 요지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해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이 과정에서 하남에는 광주목이 설치됐다.

광주는 고려 수도인 개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사회·경제·군사적 면에서 중시됐으며, 고려 후기에는 몽골군을 막는 군사전략 요충지로 인식됐었다. 또한 불교 융성과 함께 광주목의 치소였던 하남에는 화려한 불교 문화가 발달하면서 덕풍천을 중심으로 금암산과 이성산, 객산 사에 불교 관련 다양한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불교 관련 문화재와 유적으로는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2호)과 삼층석탑(보물 제13호), 하사창동 천왕사지와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981호), 법화사지(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6호), 약정사지, 자화사지 등이 있다.

동사지(고려시대, 춘궁동)
조선시대 지방에 설립된 광주향교는 경기도 지역의 교육을 담당했다. /하남시 제공

■ 조선시대

세종때 경기도 관찰사영 옮겨 광주목사 겸임한 주요 도시… 광주 향교 등 교육·양반문화 두드러져


조선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지향했으며 '경국대전'에 의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했다. 또 국가 기본 이념인 성리학의 정착과 발달은 전 사회에 큰영향을 끼쳐 유교적 윤리규범 아래 양반 문화가 발달하게 됐다.

하남은 지방행정구역 중 경기도 소속으로 세종 때에는 경기도 관찰사영을 하남 고골(춘궁동)로 옮기고 경기도 관찰사가 광주목사를 겸임했다. 교육 분야는 서울에는 성균관과 사학, 지방에는 향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했는데 하남(옛 광주)의 교육은 광주 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호)가 담당했다.

또한 기계 유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함평 이씨, 경주 최씨, 능성 구씨 등이 하남 지역의 양반문화를 형성했다.

지리적으로도 한양의 배후지역으로 한강을 통한 수운과 육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왕래와 물류 유통이 활발한 교통의 길목으로 덕풍장, 창우장 등의 장터가 형성됐고, 여행객들이 머물 수 있는 역(덕풍동 역말), 원(도미나루 근처 도미원) 주막 등이 생겨났다.

하남/최규원기자 mirzstar@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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