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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스토리]해군 숨겨진 활약… 관객도 인천상륙작전 '참전'

박경호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6-08-26 제10면

'인천상륙작전' 영화 vs 역사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진
인천상륙작전 당시 항공사진. 월미도, 북성동 부두, 인천항 '독' 등이 내려다 보인다. 북한군 거점이었던 수도국산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상륙정들은 일시에 부두로 돌진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제공

유엔군 아닌 우리 영웅들 최후 조명 개봉 한달 만에 700만 동원
전문가 혹평속 뜨거운 관심… 역사적 장소 눈길 '인천 마케팅 효과'
맥아더 엑스레이작전 지시는 '영화설정' 실제는 한국군 단독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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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 단숨에 수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8일 만에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저지하기에 급급해 낙동강 전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을 카드로 적의 후방을 치는 상륙작전을 택했다.

당시 상륙작전을 펼칠 지역으로 전북 군산이나 경기 평택 등이 거론됐으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군 지휘부 대다수가 반대하는 '인천'을 낙점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함정 261척과 지상군 7만 5천여 명을 투입해 인천 앞바다에 총공세를 퍼부으며 상륙에 성공했고, 그 결과 북한군의 보급선이 끊겼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12일 뒤인 9월 27일 서울을 수복했다.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신화는 우리나라는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영화로 제작된 바 있으나, 흥행에는 좀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반면 지난달 27일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한 달 만에 누적 관객 수 700만 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영화의 성공을 계기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장소가 재조명되면서 '인천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기도 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반공영화'라는 지적도 있지만,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조금만 알고 나면 더 흥미롭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어떤 영화?

영화 '인천상륙작전' 제작 계획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해 8월이다. 세계적인 할리우드 배우인 리암 니슨(Liam Neeson)이 맥아더 역할을 맡아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영화는 160억 원이라는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것치곤 비교적 짧은 1년여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됐다.

인천에 있는 바이오기업인 셀트리온이 영화 제작에 30억 원을 투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관심이 큰 데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동문인 유정복 인천시장과 인천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 보자고 뜻을 모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영화는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인 유엔군이 아닌 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인천에 잠입해 첩보작전을 펼친 우리나라 해군 첩보부대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시로 대북 첩보작전인 일명 '엑스레이(X-RAY) 작전'에 투입된 해군 첩보부대 장학수(이정재) 대위는 부대원을 이끌고 북한군으로 위장해 북한군 인천방어사령부에 잠입한다.

해군 첩보부대원들은 북한군의 인천 앞바다 기뢰지도를 입수해 유엔군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림계진(이범수) 북한군 인천방어사령관에게 발각돼 위기를 맞는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마친 해군 첩보부대는 인천상륙작전 개시일 직전까지도 유엔군 함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월미도 북한군 해안포대를 발견했다.

주인공 장학수 대위는 인천항 방어요충지에 있는 월미도 해안포대를 점령하지 않으면 상륙작전에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살아남은 부대원 2명을 이끌고 기습을 감행, 북한군 포대를 전멸시키고 전사한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정식 개봉 전 시사회에서 '시대착오적인 반공영화', '다소 미흡한 만듦새' 등 언론과 전문가들의 혹평이 이어졌다. 이 같은 지적은 진보 성향은 물론 보수성향으로 구분되는 언론에서까지 제기됐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7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맥아더를 비롯한 유엔군이 주도한 줄 알았던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원천이 우리 해군 첩보부대라는 숨겨진 이야기가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영화 속 설정이나 줄거리가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만큼 당시 '엑스레이 작전'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됐는지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사진
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왼쪽) /CJ엔터테인먼트 제공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경인일보DB

#역사 속 인천상륙작전

전쟁 당시 미군 참모 대부분은 물론이고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조차도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자는 맥아더의 주장에 반대했다. 인천은 물살이 거세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최고 9m로 상륙작전을 펼치기엔 최악의 조건이라는 이유다.

게다가 썰물 때 나타나는 갯벌은 폭과 길이가 수백m 이상이라 도보 이동과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이 '5천 분의 1'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맥아더는 인천에 배치된 북한군 병력이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했다. 또 인천에 상륙하면 곧바로 서울까지 진격해 북한군이 보급선으로 이용하는 경부선 철도와 도로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인천'을 고수했다. 맥아더는 이 같은 논리로 트루먼 대통령과 미군 참모들을 설득했고,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았다.

미 공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며칠 전부터 1차 상륙 지점인 월미도 일대에 네이팜탄 등으로 폭격을 가했고, 미군이 상륙하기 전 월미도는 이미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의 월미도 주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상륙 지점은 월미도(그린비치), 동구 만석동(레드비치), 남구 용현5동 부근(블루비치) 등 3곳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한국군으로 유일하게 사상자가 난 부대가 바로 영화 속 주인공인 해군 첩보부대다. 당시 '엑스레이 작전'에 투입된 해군 첩보부대원은 17명이다.

이들은 8월 24일 새벽 영흥도로 잠입해 인천에 주둔한 북한군의 해안포 위치, 병력 규모, 해안 방어태세 등을 파악해 유엔군에 전달했다.

첩보부대장을 맡았던 함명수 전 해군 참모총장(엑스레이 작전 당시 소령)의 회고에 따르면, 우리 첩보부대는 인천에서 북한군 보안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을 포섭해 정보원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정보원을 통해 통행증을 만들고, 대원들이 월미도 방어진지 구축 공사장 등에 위장 취업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이틀 앞둔 9월 13일 해군 첩보부대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잔무 처리를 위해 고(故) 임병래 중위 등 대원 6명이 영흥도 본부에 남아있었는데, 14일 북한군 1개 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해 첩보부대원들과 전투를 벌였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적을 유인하는 사이에 부대원 4명은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그러나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해군 첩보부대 역사를 연구하는 임형신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영화에서는 맥아더 총사령관이 우리 해군 첩보부대에 '엑스레이 작전'을 직접 지시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인천상륙작전에서 한국군의 유일한 단독 작전이었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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