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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68]SF 페미니즘 '어둠의 왼손'

경인일보 발행일 2017-05-17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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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어슐러 르귄(1929~)의 '어둠의 왼손'(1969)은 SF문학사, 나아가 세계문학사상 가장 이채로운 존재다.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도 그러하거니와, 작품 속에 녹여낸 독특한 사회학적 사고실험은 '휴고상'과 '네뷸러상' 동반 수상이라는 양수겸장의 영광을 누릴만하다.

'어둠의 왼손'은 지구인 겐리 아이가 게센 행성을 은하계의 정치연합체인 에큐멘에 가입시키기 위한 행성 외교사절로 방문하면서 겪게 되는 고초와 세계관의 변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겐리 아이는 게센 행성의 국가 카하이드를 거쳐 카하이드와 경쟁관계에 있는 오거레인을 방문했다 스파이 혐의를 쓰고 풀레펜 농장으로 강제 수용된다. 절망의 순간, 카하이드의 재상이었다가 정치적 망명자 신세가 된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농장을 탈출하여 긴 빙하지대를 거쳐 카하이드로 돌아온다.

게센은 지구와 달리 양성인(androgyny)이 사는 행성이다. 지구인(terran)들처럼 남녀의 구별이 뚜렷한 것이 아니라 양성성을 갖는 인간들의 세계인 것이다. 게센인들은 평소에는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지 않는 소머기(期)라는 잠복기 속에 지내다가 발정기라 할 수 있는 케머기를 맞이하게 된다.



케머기에 이르면, 호르몬의 분비에 따라 누구든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하게 되며 이때는 상대자에게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된다.

'이성사회(bisexual society)'의 관습 속에서 살던 겐리 아이는 에스트라벤의 도움으로 오거레인을 탈출하여 빙하지대를 통과하던 중 케머 성태에 접어든 에스트라벤을 보고 처음에는 강한 혐오감을 느끼나 점차 게센인들의 양성성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된다.

이 양성사회 행성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슐러 르귄은 성적 차이가 성적 차별로 이어지는 '이성사회'의 억압과 불합리를 질타한다.

표면상 작품은 겐리 아이라는 지구인의 관점에서 외계인인 게센인들의 삶과 사회를 재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게센이라는 양성인 사회의 관점에서 지구라는 이성사회의 문제점이 그대로 재현되고 타자화된다. 당연하게도 게센 행성에서는 남성대명사(he)나 여성대명사(she) 같은 대명사는 존재할 수 없다.

어제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아가씨가 내일의 오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센이라는 양성사회의 이야기를 통해서 르귄은 인간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널리 통용되어 왔던 사회적 성-정체성인 젠더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를 문제화한다.

작품 제목 '어둠의 왼손'은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 연인처럼/ 함께 누워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이라는 '트로메 노래'에서 나왔다. 남녀와 좌우는 대립이 아닌 상보적 관계임을 일깨워주는 SF페미니즘, SF휴머니즘이 바로 '어둠의 왼손'이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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