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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다른 이름을 찾아서…세상의 아이들·10]# 오래된 # 미래를 가다- 라다크 편

경인일보 발행일 2017-12-05 제17면

아빠는 일 떠나고 엄마는 없는 맨발의 네 아이
광고에 이끌려 손 내민 고원에 연민을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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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한 포기 볼 수 없는 황량한 고원 라다크 고장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남기환 제공

바위절벽에 붙은 마을·청보리 물결·공차는 아이들 '설레는 이상향'
별보다 더 예쁜 눈을 가진 천막집 계집아이들 아른거려 밤새 뒤척여
검불처럼 가벼운 막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처럼 백팩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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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꼭대기에 사원이 있는 라마유르 마을. /남기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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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 아이들

바위 절벽에 간신히 몸을 붙들고 있는 마을엔 청보리가 물결을 이루고 아이들이 좁다란 골목에서 공을 찰 때마다 뽀얀 먼지가 폴폴 날렸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곰빠(사원)엔 룽다(풍마)가 펄럭이고, 붉은 승복을 입은 뺨이 발갛게 튼 어린 스님들은 동네 아이들의 공놀이를 부러운 듯 구경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공이 아득한 벼랑 아래로 떨어질 판인데 정작 축구를 하는 아이들은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아이들 표정이 어쩜 저토록 밝을까? 대체 저곳은 어딜까? 지상에 저런 피안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아니면 가상세계? 그 아름다운 광고 한 편은 내게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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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시인 제공

단지 모기업의 짧은 광고 하나로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그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이상향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작의 신호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라다크 땅 라마유르, 나는 그 마을을 수배하기 시작했고 2년 후 배낭을 꾸려 그곳을 찾아 떠났다.

라마유르를 거쳐 찾아간 마을 알치(Alchi)는 라다크(Ladakh) 중심도시 레(Leh. 3천505m)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인더스강을 끼고 있는 고원의 아름다운 마을이다. 특히 알치 곰빠(사원. Alchi Gompa)의 벽화는 라다크 지역에서도 불화(카슈미르 양식의 벽화)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내가 방문했던 시기 7월 말은 1년에 50여일 열린다는 육로가 열린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사방이 모래와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온통 황량하지만 강가에 미루나무가 서있고 보리밭이 물결치는, 주변에서 초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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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빠(사원)에 가면 이렇게 어린 나이에 출가한 스님들을 만날 수 있다. /남기환 제공

사원을 둘러싼 마을 어귀에는 당나귀가 보리타작을 하고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 주변엔 노란 살구가 유혹의 손길을 뻗었다.

도착 다음 날 여행자들은 가까운 계곡으로 트레킹을 떠나고 나는 인더스 강을 끼고 서쪽 마을로 가보기로 했다. 약 1시간 쯤 걸었을까. 천막 하나가 보였고, 아이들이 그 앞에서 놀고 있기에 지나가는 남자에게 물으니 아이들 아버진 일을 찾아 다른 마을로 가고 아이들만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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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서 유일하게 파란 보리밭이 있는 라마유르 마을. /김인자 시인 제공

나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다음 마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잊고 말았다. 수줍어서 눈도 못 맞추던 아이들이 사는 천막 안은 얇은 이불과 옷가지 몇 개, 냄비 두어개에 먹다 남은 한 됫박 정도의 짬바(보릿가루)가 전부였는데 가을까지는 거기서 그렇게 산다고 했다.

나의 모성은 어디서부터 나를 길들여 왔을까. 처음엔 낯선 내게 두려움과 경계심을 보이던 아이들은 사람이 그리웠는지 금세 친해졌고 우린 돌멩이 몇 개로 공기놀이와 소꿉놀이를 했다. 점심에 먹을까 싶어 챙겨간 샌드위치와 비스킷과 물은 순식간에 동이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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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가가호호를 돌며 자잘한 생필품을 파는 박물장수 가족들. /김인자 시인 제공

사연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아빠는 있고 엄마는 없다는 고만고만한 계집아이 넷, 이 조가비 같고 나팔꽃 같은 조무래기들에게 세상 전부인 엄마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척박한 땅에서도 아이들은 모두 맨발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왜? 라고 묻는 건 고문일 것 같아 나는 발가벗은 아이를 강가로 데려가 씻기고 안아주며 놀다 다음 날 다시 오겠노라 차례로 손가락을 걸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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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나무와 살구나무가 많은 불화로 유명한 사원이 있는 알치 마을. /김인자 시인 제공

그날은 전날과 비슷한 시간에 숙소를 나섰다. 고도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올랐다. 태양이 내리쪼이는 황량한 고원사막을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저 멀리 까만 점들이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신발을 신어도 뜨거운데 그 조그만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맨발로 나를 마중 나오다니, 멀리서 나를 확인한 아이들은 줄레! 줄레!(안녕하세요!) 고함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반가움과 슬픔이 교차했다. 나는 검불처럼 가벼운 막내를 안고 나머지 아이들을 앞세워 그늘이 있는 천막집으로 되돌아갔다.

돈을 벌어 먹을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처럼 나는 백팩을 풀었다. 빵과 사탕과 음료 앞에서 아이들은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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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된 여행스케줄을 취소하고 천막에 사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필자. /김인자 시인 제공

그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멀리 마중을 나와 있었고 다 다음 날도 그랬다. 슬픔이나 외로움을 알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렸고, 갓 돌 지난 막내에게 나는 유독 마음이 쓰였다. 저 어린 아이들끼리 서로 껴안고 추위를 녹이며 잠자고 먹고 며칠에 한 번 천막집으로 돌아온다는 아이들의 아버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살구나무 아래 주먹만한 별이 쏟아지는 평상에 누우면 밤마다 별보다 더 예쁜 눈을 가진 천막집 아이들이 아른거려 몸을 뒤척였다. 그런 날은 아이들을 만나러 가기 전 알치사원에 들러 잠시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그렇게 살아야 하고 나는 돌아가야 할 여행자가 아니던가.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더는 올 수 없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날은 아이들 표정도 어두웠다. 막내는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큰 아이의 표정은 '우린 아줌마가 좋은데 이제 내 동생들은 더이상 과자 같은 건 먹을 수 없는 건가요?'라고 묻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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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들자 수줍다며 깔깔대다가 그만 바닥에 누워버린 귀여운 현지 할머니들과 필자. /김인자 시인 제공

나는 얄팍한 연민을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고, 진짜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아무리 외롭고 춥고 배고프더라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잠시지만 온 몸으로 아이들에게 엄마가 되어준 것으로 족했다.

나는 지난 내 여행 중 가장 아쉬웠던 이별로 그날 아이들과 고원 한가운데서 점으로 사라지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 또한 시간이 가면 아이들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잊을 것이다. 그 여름 그들에게 산타클로스가 다녀갔다는 사실을, 그 산타는 황색피부를 가진 아줌마였다는 것까지도.

/김인자(경인일보 신춘문예 출신 시인·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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