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간 경영권 쟁탈전… 2대 총수 '몽헌'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대북사업의 일환으로 소떼를 몰고 방북하는 등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에 물꼬를 텄다. 하지만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연합뉴스 |
그러나 1998년 진보성향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되는 듯했다.
정주영·몽헌 부자가 그해 6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소 떼 1천1마리를 몰고 직접 판문점을 통과해 입북한 것을 계기로 북한과의 본격적인 교류 물꼬를 텄다.
그해 10월 2차로 소 떼 방북 길에 오른 정주영은 27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향후 30년간 금강산 독점개발권을 확보, 11월 18일 오후 5시43분에 관광유람선인 현대금강호가 정주영을 비롯한 현대 임직원과 관광객 889명, 승무원과 관광안내원 466명 등 총 1천365명을 싣고 4박5일 일정으로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해 금강산으로 향했다.
1999년 2월 현대그룹은 북한 관련 사업을 총괄할 현대아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현대그룹은 주력사업을 대북사업으로 전환, 금강산관광단지를 개발하고 개성에는 대규모 경공업단지 조성계획을 세우는 등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 정책'을 내세우며 한반도에서의 냉전청산에 골몰하고 있었으나 드러내놓고 북한에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대리인이 필요했는데 현대야말로 가장 적합한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런 탓인지 정부 주도로 추진된 빅딜은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 한화에너지의 정유부문을 현대정유에 넘기는 등 현대그룹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외환위기로 그룹경영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주영은 대북사업을 더욱 확대했다. 그러나 1999년 6월 서해교전이 발발하면서 대북사업도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 와중인 2000년 3월 현대그룹은 초유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정주영의 아들들 간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다. 당시 병환이 깊었던 정 회장이 은퇴한 후 몽구(2째), 몽헌(5째) 형제간의 불안한 투톱(공동회장제)으로 운영하던 중 경영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몽구와 몽헌 간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정주영의 장남 정몽필이 일찍이 교통사고로 사망해 몽구가 실질적인 장남이었다.
2000년 3월 14일 정몽구 공동회장이 정몽헌의 최측근 심복이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시키는 보복성 인사가 최초의 시발점이었다.
다음날 정몽헌 공동회장이 인사보류를 지시하는 한편 3월 24일에는 현대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정몽구의 공동회장 면직을 발표했다.
정몽구 '보복성 인사' 다툼 시발점
몽헌, 다수계열사 확보… 그룹 장악
몽준, 중공업·미포조선 등 '분리'
>> 3부자 동반퇴진 발표
5월 25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계열사 지분정리와 현대차 지분매입을 발표하자 다음날인 26일 현대 전 계열사의 주가가 폭락했다.
정부와 채권단이 현대그룹에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진 문책을 요구함으로써 정 명예회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 현대아산의 이사직을 포기하는 한편 5월 31일 정주영·몽구·몽헌 3부자 동반퇴진을 골자로 하는 경영개선계획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2000년 9월 정몽구가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현대서비스 등 9개 계열사를 분리해서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재발족하면서 마무리됐다.
현대자동차는 1967년에 설립돼 1974년 10월에는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인 승용차 '포니'를 생산해 한국의 위상을 높였고, 외환위기 중인 1999년 3월 기아자동차와 아세아자동차를 한꺼번에 인수해 국내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가 됐다.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몽헌은 명실상부한 현대그룹의 2대 총수가 됐다. 또한 정몽헌은 현대건설,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아산 등 수적으로 많은 계열사를 확보했다.
현대그룹의 위상에 큰 타격을 준 이 사건을 세인들은 '왕자의 난'으로 불렀다. 6남 정몽준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등을 분리해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됐다. 현대백화점도 이때 독립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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