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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재벌사·83]현대-15 위성그룹-'한라' (상)

입력 2018-11-19 20:36

1997년 기준 16개 계열사 6조6천억 자산 보유 '재벌 1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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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의 사업에 가장 먼저 참여한 정인영 회장은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사업을 확장하는 등 재계의 부도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은 한라그룹 홈페이지의 역사관 모습. /한라그룹 제공

현대그룹 정주영 창업주의 형제들은 총 6명으로 장남 정주영 밑으로 인영·순영·세영·신영·상영 순인데, 신영은 1962년 독일유학 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정주영의 사업에 가장 먼저 참여한 자는 '부도옹(不倒翁)' 정인영(1920~2006)이다.

1989년 7월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사업을 확장, 재계의 부도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주영보다 5살 아래인 인영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마을에서 6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YMCA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2년 동안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 영어과에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76년 현대양행 설립 경영 전념
안양공장 '만도기계'로 독립시켜
국내 최대 자동차부품업체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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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영, 별도사업 시작
 

 

 

 


1947~1951년까지 동아일보·대한일보 기자를 지냈고, 6·25전쟁 때는 미군 공병대 통역으로 활동하면서 형 정주영이 운영하던 현대건설에 미군이 발주한 공사를 수주하도록 도왔다.

1951년 정주영의 요청으로 현대상운(주)에 입사해 1953년까지 전무이사를 지냈다. 1953년 현대건설로 자리를 옮겨 1969년까지 부사장을, 1969년부터 1976년까지 사장을 맡았다.

정인영이 별도의 사업을 영위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9월 스푼·나이프·포크 등을 만드는 (주)현대양행을 군포에 설립하면서부터였다.

현대양행은 1969년부터 자동차 부품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1968년에는 아트라스제지(주)를 설립했다.

1976년 현대건설 사장에서 물러나 현대양행 경영에 전념하면서 1977년 인천조선(주)를, 1978년 한라시멘트(주)를 각각 설립했다.

또 현대양행에 발전설비 생산을 추가, 세계은행(IBRD) 차관 8천만달러와 국민투자기금 등을 투입해 1976년에 창원기계공업단지 내 160만평 대지 위에 세계 최대 공장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공급능력 과잉에 따른 발전소 수주물량 부진과 자금난으로 현대양행 창원공장 건설이 중단된 상태에서 1980년 전두환 정부 출범과 함께 단행한 중화학 투자조정으로 창원공장이 정부에 귀속됐다.

정부는 1980년 10월 창원공장을 별도로 운영하는 한국중공업(주)를 설립한 뒤 2000년 두산그룹에 매각, 2001년에 두산중공업(주)로 상호가 변경됐다.

이후 현대양행 안양공장은 자동차부품 중심으로, 군포공장은 건설중장비 메이커로 각각 성장했는데 안양공장의 기계사업분야를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기계(주)로, 건설을 담당했던 자원개발부를 한라자원으로 각각 독립시켰다. 1980년 2월에 아스트라제지의 상호를 만도기계(주)로 변경했다.

만도기계는 1970~1980년대 자동차산업의 붐을 타고 현대자동차 등에 대한 납품을 통해 국내 최대의 자동차부품업체로 성장했다.

한라자원은 1982년 만도기계 공장증설공사를 맡았고 1986년에는 평택에 한라공조의 공장을 지었으며 1990년에는 한라건설(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한라건설은 1994년에 주식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1995년에는 서해안 고속도로 공사를, 1997년에는 목포 신외항공사를 개시했으나 그해 12월 계열사 빚보증 탓에 부도 처리됐다.

시멘트·건설·금융등 영역 넓혀
자금사정 불구 무리한 사업 확장
1997년 12월 부도 '35년만에 붕괴'

>> 현대그룹에서 독립


정인영은 만도기계의 성장에 힘입어 1976년 12월 인천 항동에서 한라중공업을 설립했다.

선박, 철 구조물, 집진설비 제작 등을 영위할 목적으로 설립했는데 이를 계기로 1977년에 정식으로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그는 1978년 1월에 한라시멘트를 설립하고 강원도 명주군 옥계면에서 시멘트생산에 착수했다.

1980년 7월에는 한라건설을 설립해 건설업에 진출했고 1986년 3월에는 자동차히터, 에어컨 등을 생산하는 한라공조를 설립했으며 1988년 9월에는 한라창업투자를 설립해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1996년 당시 한라그룹은 모기업인 만도기계를 비롯해 한라중공업, 한라시멘트, 한라건설, 한라창업투자 등 총 16개 계열사가 5조2천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1997년 기준 한라그룹은 자산총액 6조6천400억원으로 재벌순위 12위에 랭크됐다.

하지만 한라는 무모할 정도의 공격경영은 계속했다. 인천조선은 1990년에 한라중공업으로 바꿨고 1996년에는 전남 영암군에 150만t 규모의 조선소(삼호조선)를 건설했다.

현대, 삼성, 대우 등 조선소들이 공급과잉으로 '제 살 깎기 경쟁'이 한창인데 건설했던 것이다. 삼호조선소의 완공과 함께 한라중공업은 1996년 485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금융부채는 1996년 1조8천억원에서 불과 1년만인 1997년에는 2조5천억원으로 급증했다.

또한 한라그룹은 열악한 자금 사정에도 1997년에 전남 대불공단 내 제지공장을 완공하는 한편 재생타이어공장, 정보통신, 금융사업 등 무리할 정도로 신규사업에 착수했다. 

 

영국 웨일즈에 대규모 중공업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비롯 독일(펄프공장), 터키(신문용지 및 차량부품공장), 프랑스(천연가스사업), 인도네시아(자동차부품 및 펄프공장) 등 해외사업에도 주력했다.

정인영은 1997년 1월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그룹 경영권을 둘째 아들 정몽원에게 물려줬지만, 1997년 한라그룹의 부채총액은 6조5천억원에 이르러 30대 재벌 중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가장 높았다. 

 

한라는 1997년 12월 6일 부도 처리되면서 창업 35년만에 붕괴됐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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