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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인천·(19)]한성임시정부와 홍진

김민재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07-11 제1면

"병든 나라 고치는 병원 일꾼 되자"

고향 아닌데도 인천에 묻히길 원해
시립박물관 기념전 등 재조명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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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年 同胞(청년 동포)여 病(병)든 나라 고치는 病院(병원)의 일꾼이 되자."

인천에서 태동한 한성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던 홍진(洪震·1877~1946)의 묘비명 중 일부다. 1931년 그가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했던 말을 묘비에 새겨 넣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고통받는 대한민국을 치료하는 것과 동일시했다.

구한말 검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 홍진은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자유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 비밀 회합을 주도하며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기틀을 닦았다.



홍진은 인천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한성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한 절차를 인천에서 진행했고, 1946년 9월 사망 후에는 인천 땅에 묻히길 원했다.

인천 관교동·문학동 일대에 집안의 선영(先塋)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가 인천을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1946년 9월 13일 홍진이 묻힌 곳이 인천 어딘지가 정확히 남아 있지 않다는 거다.

홍진의 무덤은 1984년 12월 5일 인천 문학동에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했고, 1994년 10월 6일 같은 국립묘지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으로 한 차례 더 옮겨졌다.

인천시립박물관이 유족으로부터 홍진의 묘비를 기증받아 그를 기리고는 있지만,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표시라도 남겨 놨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묘비는 사망 두달 뒤에 건립됐다. 묘비에는 대한민국 28년 11월 9일에 건립됐다고 쓰여있는데 대한민국 28년은 임시정부 수립 해인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아 계산한 햇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 홍진이 인천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는 작업이 인천 지역사회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학계에서 홍진을 주제로 토론이 이뤄지고 있고, 인천시립박물관은 홍진 기념 전시회를 열고 있다. 홍진은 인천의 인물로 평가받아야 마땅한 독립운동가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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