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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인천·(32)]日 강점기 3대 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 동참 이두옥·신대성

김주엽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9-10-24 제15면

"인천도 들고 일어나자" 교복 입은 투사들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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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인천공립상업학교 상급생에 속해 '광주 지지' 동맹휴학·강당 시위
당시 주동자 대부분 훗날 좌익으로 전향… 지역서도 주목받지 못해
개인 활동하다 조선공산당 공작위 함께 만들어… 구속 신세 되풀이
남로당 소속 이두옥은 고향인 제주 4·3사건 가담 총살 당해 생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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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19년 '3·1 운동', 1926년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앞선 두 독립운동이 고종·순종 황제의 붕어(崩御)를 계기로 민중이 들고 일어선 독립운동이었다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조선과 일본인 학생들의 다툼이 억눌렸던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은 사소했지만, 그게 촉매제가 되어 들불처럼 번져나간 독립 열망의 의지는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전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에서 동맹 휴학을 벌이거나 강당에 모여 시위를 벌이며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을 토대로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194개교에서 5만4천여명의 학생이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두옥

인천에도 광주의 학생들에게 힘을 보탠 학생들이 있었다. 

 

이두옥(1911~1950), 신대성(1909~?) 등 1930년 당시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두옥과 신대성을 포함한 시위를 주도했던 16명은 인천경찰서에 붙잡혔고, 이 가운데 12명은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인천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두옥·신대성 등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대부분이 훗날 좌익으로 전향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게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천 지역 학생들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930년 1월 17일. 학교 행사를 위해 강당에 모인 전교생 앞에서 인천상업학교 상급생 학생들은 크게 외쳤다.

"지금 광주학생 사건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민족적인 면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으니 다 같이 일어나자."
앞서 이들은 1929년 12월 13일 광주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 한 차례 동맹휴학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이 있기 약 2개월 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시작됐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중학교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밀치고 지나갔고, 이를 목격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이 일본 학생들에게 항의하면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출동한 경찰이 일본인 학생의 의견만 받아들여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이 커졌다.

이후 메이지유신 기념일인 11월 3일 신사 참배 이후 현 광주 충장로 일대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큰 싸움이 또 한 번 발생했고, 조선인 학생들이 학교에 항의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됐다.

광주의 소식이 전해지자 억눌렸던 조선인 학생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인 학생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가고 있던 터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발행한 자료를 보면 1924년 14차례에 불과했던 조선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이듬해 48건으로 급증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있던 1929년과 1930년에는 각각 79건과 107건에 달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이 늘어나자 학생들 간의 다툼도 늘어났다. 그러나 일본인 교직원은 조선 학생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했고 이에 항의하는 일도 많아졌다. 

 

또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식민지 노예 교육도 동맹휴학을 벌이게 된 또 다른 이유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하고 있다.


인천상업학교 상급생들은 더 많은 학생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교생이 모인 앞에서 연단에 올랐다. 

 

당시 인천상업학교 1학년생이었던 노형근은 '인고백년사'에서 "그날은 학생들이 정렬해 있었고 선생님들이 들어오시기 전에 상급생이 강당에 있는 탁구대를 들어서 출입구를 막아버리는 것이었어요. 한 상급생이 연단에 올라 웅변을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왔습니다. 상급생들은 문을 막은 채 항의 항언을 했습니다. (중략) 어느새 경찰서에 연락이 돼서 왜경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끝내 상급생 십여 명이 연행되는 뼈아픈 광경을 봐야 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이두옥과 신대성은 경찰에 연행된 16명의 상급생에 포함돼 있었다. 이들에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알려준 이는 인천상업학교 출신 차재정(1902~1963)이다.

차재정은 장재성(1908~1950)과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에 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였던 그는 7종의 격문을 만들어 전국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차재정은 격문에서 '검속된 광주 조선 학생 동지를 즉시 탈환하라/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항하라/살인적 폭도인 일본이민군을 구축하라/신간회와 청총(靑總)에 민족적 환기로 호소하라'고 주장하며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찰에 붙잡힌 그는 1935년 한 차례 더 경찰에 구속된 이후 친일로 전향했다. 차재정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다.

이두옥과 신대성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나게 된다. 별도의 재판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징역형을 받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이들의 독립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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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클릭아트

이두옥은 3·1절 11주년 기념 격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6·25때 남조선노동당 서울시당위원장을 지낸 이승엽(1905~1954)과 함께 했다.

1930년 3월 1일 이두옥은 현재의 중구와 동구 일대에 '3·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뿌렸다. 유인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1운동도 11년을 경과했다. 그러나 지금 도리어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는 그 정도를 더하고 있어 2천만 생령의 고통과 비애는 극에 달해 있다. 보라! 저 놈들의 은행, 회사, 상점과 수리조합 및 농장의 발전? 확장을! 그리고 우리 도시, 농촌의 파멸, 실업자와 빈민굴의 증가, 소작농민의 빈곤격화를! 피땀을 흘리며 노동하는 자는 조선의 노농 군중이고 영화와 향락을 누리는 자는 일본의 자본가와 지주가 아닌가! 그들은 이러한 착취와 야만적 압박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군과 경찰을 배치하여 감옥을 확장하며 악법과 가혹한 형벌로 우리 전위 투사를 도살하고 해방운동을 말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죽음에 당면한 조선 민중을 위한 운동과 죽음을 무릅쓴 투쟁은 창검과 철창으로 근절할 수 없다."

1929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조선인들의 삶도 어렵게 만들었다. 

 

쌀값이 폭락해 농촌의 삶은 궁핍해졌고, 도시 노동자들은 임금삭감과 실업으로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승엽이 불러주고 이두옥이 인쇄한 것으로 알려진 이 격문은 어려운 노동자들의 항거를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두옥과 이승엽은 이 격문을 서울로 옮겨 전국으로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인천에서 격문이 제작된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당시 서울로 격문을 가져가던 김점권이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두옥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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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경찰국이 보관하고 있던 이두옥과 신대성에 대한 비밀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제공

옥살이를 거친 이후 이두옥은 함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신대성을 만났다. 

 

이들은 함께 조선공산당 공작위원회를 조직했으나, 경찰에 또 한 번 구속되게 된다. 경기도경찰국이 압수한 이들의 비밀 문건에는 '혁명적 학생운동 방침', '반제투쟁동맹 조직테제', '반전 캠페인' 등 조선총독부에 항거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두옥과 신대성은 1934년 징역 3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또 한 번 갇히게 되었다.

출옥 이후 지하 운동에 전념하던 이들에게도 해방의 순간이 찾아왔다. 

 

신대성은 이승엽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1949년 서울 마포구 남로당책임자로 우익청년단에 잠입한 혐의로 구속됐는데, 이것이 신대성의 마지막 기록이다. 

 

남로당 인천시당과 전남도당에서 활동하던 이두옥은 자신의 고향에서 일어난 제주 4·3사건에 참여했다가 주동자로 붙잡혀 총살당해 생을 마감했다.

이두옥과 신대성은 나라를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해 태어났다. 그들은 학창시절부터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치열하게 싸웠지만, 좌익 활동을 했던 이력 때문에 그들의 주 활동무대였던 인천에서조차 철저하게 잊히고 묻힌 독립운동가가 됐다.

김원봉, 조봉암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오랫동안 추적해 온 이원규 작가는 "이두옥과 신대성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인천 지역에서는 한 번도 그들을 주목한 적이 없다"며 "이들은 북한에서도 조명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인천에서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고 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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