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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꽃]낙화유수

권성훈 발행일 2021-03-23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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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꽃이 피는 날엔 목련꽃담 밑에서 서성이고, 꽃이 질 땐 붉은 꽃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가지 거기에서 나는 너의 애절을 통한할 뿐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나는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배고파서 먹었으니 어쩔 수 없었으니, 남아일언이라도 나는 말과 행동이 다르니 단지, 변치 말자던 약속에는 절절했으니 나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힌 거지 운명이라고 해도 잡놈이라고 해도 나는, 지금, 순간 속에 있네 그대의 장구한 약속도 벌써 나는 잊었다네 그러나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모든 진리가 인생의 덧없음을 속삭인다 해도 나는 말하고 싶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함성호(1963~)


권성훈교수교체사진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꽃은 피어나기 위해 떨어지고 떨어지기 위해 피어난다. 3~4월에 개화하는 목련꽃을 보라. 그것은 작년에 '네가 죽어도' 올해 '나는 죽지 않고' 하얀 맹세로 피어나 있는 것이니. 이 봄도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아무 죄 없으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싶다면' 상대방에게 순간순간 충실해야 만이 후회로 남지 않는 것이다. '변치 말자던 약속'도 그 순간만은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지금, 순간 속에' 있다가 가는 것일 뿐. 함께 하는 동안 '모든 꽃들이 시든다고 해도' 시들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지금에 충실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처럼. '자연에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목련에게서 변할 수 없는 사랑의 이치를 발견하게 된다.

/권성훈(문학평론가·경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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