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 소설가 |
내친김에 독자로서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성장기에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왔다. 교과서에 겹쳐놓고 몰래 읽는 문장은 한 숟갈씩 떠먹는 꿀처럼 얼마나 달콤했던가.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초조했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은 내 것이 아니기에 빨리 읽어야 했다. 스펀지처럼 활자를 빨아들이던 감각. 전면적이고 초월적인, 그 신비로운 독서 경험을 다시 누릴 수 있다면 인생의 몇 년쯤 거래할 용의가 있을 만큼 행복했다. 십대에는 책에 빠지면 주변 세상이 완전히 녹아 없어졌기 때문에 책에 집중하는 환경이라는 것을 따져볼 이유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책보다 사람을 읽어내느라 바빴고, 직장을 그만둔 이십대 후반에야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뷔페 접시에 조금씩 음식을 담는 것처럼 서가를 누비며 책들을 쌓아놓았다. 흥미로운 부분만 골라 읽는 호사스러움을 누리기에 공공도서관만큼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한 무더기 책들의 파도를 서퍼처럼 가로지르는 즐거움을 누리다보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했고 그저 그런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서관을 나설 때마다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내밀하게 꽉 채워진 시간을 보낸 뿌듯함이 밀려왔다.
서른이 넘어서 여행을 떠날 일이 더러 생겼다. 외국에 나갈 때는 그 나라 작가의 책을 들고 갔다. 그 곳의 언어로 캐온 문장을 그 땅에서 읽는 순간이 얼마나 딱 맞아떨어지는 감각을 선사하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남부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포지타노에 갔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해변이 텅 비어 있었다. 검은 모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읽던 책을 소리 내어 낭독해보았다. 겨울 하늘은 파랗고, 발밑에는 지중해가 출렁거렸고, 고개를 돌리면 책 속에서 묘사되는 자연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해변이 책 속으로 밀려들었고, 책 속의 문장이 하늘과 해변으로 번져나갔다. 이 완벽한 삼위일체의 순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종이 안팎의 세계 조화든 부조화든
그 자체만으로 충만한 삶의 멜로디
물론 반대의 순간도 존재한다. 울프의 문장과 '귀여운 배경음악'의 부조화와 같은 순간이 그렇다. 그러나 조금 물러서 바라보자 오히려 이 상황이야말로 울프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가 싶었다. 소설 속 램지 부인은 여덟 아이와 자기만족적인 남편과 그의 지인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녀의 일상은 다정함을 적절히 나눠주면서 주변 환경을 알맞은 농도로 물들이기 위해 존재한다. 동시에 내면 깊숙이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삶을 한번 바라보았고, 삶이 그곳에 존재한다고 분명히 느꼈다. 아이들과도, 심지어는 남편과도 나누지 않은, 절대적이고 사적인 뭔가가 존재한다고. 그녀가 한쪽에 있고, 삶이 다른 한쪽에 있는 사이에서 일종의 거래가 이루어졌는데 그녀는 늘 그 거래에서 더 나은 것을 취하려 했다. 그것은 그녀의 거래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무수한 거래를 통해 읽기와 쓰기를 해나가고 있다. 오늘 새롭게 터득한 것은 책에 몰두한 독자에게 눈앞의 세계는 전부 책에 대한 은유로 보인다는 것이다. 종이 안과 종이 밖의 세계는 조화를 이루든 부조화를 이루든 그 자체로 충만한 삶의 멜로디가 될 수 있다. 책과 인생이 맞닿는 가장자리의 풍경. 이 풍경의 경이로움을 위해 나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방금 본 부분을 작게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김성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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