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이슈&스토리] '업무 스트레스로 극단 선택'… 故 이찬희 연구원이 남긴 것

신지영·이시은 신지영·이시은 기자 발행일 2022-02-11 제10면

갑질·과로 '쳇바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나

2022020901000314000016431
지난달 26일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은 먼저 하늘로 떠난 동료 이찬희씨를 기리며 풍선에 메시지를 적어 날렸다. /독자 제공
 

현대자동차의 4세대 '투싼'은 2020년 9월 3일 실루엣을 드러냈다. 티저(teaser)로 공개된 투싼은 어두운 실내에서 이른바 '천사의 날개'라고 불리는 전면 그릴 위로 밝은 빛을 뿜고 있었다. 현대차는 이 디자인을 '파라메트릭 다이나믹스 테마'라고 불렀다.

티저 공개로부터 채 2주가 지나지 않은 9월 15일 오전 9시, 4세대 투싼NX는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됐다. 언젠가 이 투싼의 테마를 디자인 했을 현대차 디자이너 고 이찬희 씨는 투싼이 전 세계에 공개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가 9월 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2022020901000314000016432

티저 광고 속 투싼NX의 모습은 보았을까. 그것 역시 확실치 않다. 당시 이씨는 조울증 진단을 받고 6개월 휴직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가 목숨을 끊었던 시점, 투싼이 공개되던 시기는 이씨가 복직을 한 달 앞뒀을 때다. 복직이 가까워질수록 조울증 증상은 더 악화됐다.

그의 아내는 "남편은 10년 차 연구원이었다. 신차 공개를 1년 앞두고 책임 연구원으로 승진하면서 업무 스트레스가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디자인 책임을 맡은 상사의 지적과 폭언으로 그가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정황이 나타났다. 디자인을 위해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이씨의 죽음은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대하는 회사의 태도 때문에 더 큰 공분을 샀다.

익명을 전제로 한 직장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가던 이씨의 이야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삭제되기 일쑤였고 사측이 그의 죽음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까지 샀다.

 

1111.jpg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은 26일 오후 12시 연구소 본관 앞 공원에서 이찬희 책임 연구원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찬희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한 데 모인 남양연구소 직원 150여명은 저마다의 언어로 추모의 뜻을 전했다. 2022.1.26 /독자 제공

이씨 아내는 "믿고 싶지 않다. 사측의 대처가 정말 말도 안 된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일을 겪었다. 장례식장에선 현대차 직원이 시댁에 '아드님이 인재였다'며 회사 생활에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전했다.



이씨 죽음을 외면한 건 회사만이 아니었다. 지난 8일 근로복지공단 경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이씨 유족이 신청한 유족급여지급 청구를 불승인했다. 사망과 업무의 연관성이 낮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씨의 죽음이 업무 때문이 아니었다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오승탁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남양연구소위원회 의장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고인에 대해 회사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고, 공단은 고인의 죽음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비상식적이고 시대적 요구에도 역행하는 판정을 내렸다"고 분노를 토했다.

2020년 9월 현대차 4세대 '투싼' 공개 앞서 하늘로
책임연구원 승진후 '밤샘·상사 폭언' 조울증 악화
커뮤니티 은폐 의혹 등 사측 외면에 직원들 큰 공분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 유족 급여마저 '불승인'

 


이씨가 속했던 현대차 연구개발본부는 지난달 21일 다음과 같은 글을 직원들에게 보냈다.

"무엇보다 고 이찬희 책임연구원의 안타까운 죽음을 가슴 깊이 애도합니다. 유가족분들과 직원 여러분들께 1년여가 지난 지금도 충격과 상심이 크게 남아 있는 것에 대해 어떠한 위로의 말로도 다 헤아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조속한 시일 내에 제3의 외부기관을 통해 연구소 내 비상식적인 업무 관행을 비롯한 조직문화 실태 전반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고 신속하고 투명하게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하겠습니다."

상술한 제3의 외부기관은 현대차의 법률자문을 담당했던 법무법인이 추천한 인사들로 꾸려졌다. 해당 법무법인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노사 관계 전문가, 의대 교수 등 3인을 개선위원회로 구성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현대차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근로기준법은 직장내 괴롭힘 여부가 문제된 경우 사용자에게 지체 없이 그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실시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현대차는 이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자체조사를 실시하는 대신 개선 위원회를 설립하여 직장 내 괴롭힘 등 조직문화의 개선을 위한 조사와 연구를 위임하였습니다. 위원회는 법무법인 화우의 추천을 받아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독립적인 전문가 3인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중략) 개선위원회는 현대차로부터 독립하여 활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추천을 한 법무법인과도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위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sagsgsadgs.jpg
현대자동차 직원들이 지난 17일 오후 화성 현대차 남양연구소 앞에서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죽음으로 내몰린 고 이찬희씨를 추모하고 있다. 2022.1.17 /이시은기자 see@kyeongin.com

사내 반응은 싸늘했다. 유족·노조·직원들의 의견을 듣지 않은 채 구성된 위원회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루아침에 만들어서 무엇을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는 한탄이 나왔다.

개선위는 관련자 면담, 익명 설문조사, 심층 인터뷰, 진상 조사 등의 활동을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이 사건 관련자로 지목된 이찬희씨의 상사는 지난 4일 입장을 밝혔다.

그는 "저는 외부기관에 의한 이번 조사의 객관성, 중립성과 엄정성을 최대한 존중하며 사실 관계에 기반해서 답변을 하고 조사를 받겠습니다. 아울러 조사를 통해 나오는 결과는 겸허하게 수용하고 존중하겠습니다. 언론과 여론에 의해 '사회적 타살', '살인'과 같은 단어가 언급되고 있는 상황에서 저는 필요하다면 수사기관의 조사라도 응해서 고 이찬희 책임연구원의 사망과 관련한 저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고 만약 응분의 책임이 확인된다면 이에 따른 처벌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자숙의 시간을 보내며 저의 과오를 반성했고 여러분들이 겪으셨을 심적 고통도 헤아려 보았습니다. 모쪼록 이번 조사가 과거의 안타까운 사건에서 우리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는 글 말미에 "여러분이 다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디자인센터가 되길 희망한다"고 썼다. 언론과 여론은 그를 '사회적 타살범'이나 '살인범'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고 이찬희 책임연구원의 아내가 남긴 편지에 적혀 있다.

현대차 연구개발본부, 최근에서야 실태조사 공지
유족·노조 등 의견 배제 위원회 구성에 반응 싸늘
고인의 아내 "용기내준 직원들 공감·위로에 감사
아빠는 세상 포기한게 아니란말 아이에 전하고파"


이씨의 아내는 다음과 같이 썼다.

"1년4개월 간 묻혔던 저희 남편 일이 제 작은 목소리로 과연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 몸도 마음도 상해가며 했던 이 얘기들이 또 묻혀버리진 않을지 불안했던 마음과 달리 마음을 다 전하지 못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이 슬퍼하고 공감하며 위로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유족이 '몸도 마음도 상해가며' 어렵사리 다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씨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222.jpg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은 26일 오후 12시 연구소 본관 앞 공원에서 이찬희 책임 연구원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찬희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한 데 모인 남양연구소 직원 150여명은 저마다의 언어로 추모의 뜻을 전했다. 2022.1.26 /독자 제공
333.jpg
현대차 남양연구소 직원들은 26일 오후 12시 연구소 본관 앞 공원에서 이찬희 책임 연구원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었다. 찬희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한 데 모인 남양연구소 직원 150여명은 저마다의 언어로 추모의 뜻을 전했다. 2022.1.26 /독자 제공

"남편이 떠난 이후 이제는 홀로 아이 둘을 키워야 하는 입장이라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아빠가 많이 보고 싶을 텐데 이 상황을 견디고 밝게 자라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힘을 얻습니다. 아이들을 보며 언제까지 아빠가 어떻게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는지 말을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나중에 받아들일 나이가 된다면 '아빠는 이 힘든 세상을 포기한 게 아니야'라는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 또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선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질 않길 바라며 용기냈던 일들이 저보다 나서기 힘드셨을 텐데 그런데도 나와주신 직원분들의 용기로 이 세상이 조금 바뀔 수 있겠냐는 막연한 생각이 조금 현실로 다가온 느낌이었습니다."

힘들게 한 자 한 자 눌러썼을 아내는 "회사는 유가족과 용기 내주신 직원분들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 주셔야 합니다. 남편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아주 아픕니다. 앞으로도 힘든 일이 많겠지만 저는 아이들을 위해 살아가고 아이들에 의해 살며 끝까지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겠습니다"라고 편지를 마무리했다.

세계 굴지의 자동차 회사에서 가장 잘 팔리는 차를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언론도 여론도 누군가를 살인범이라고, 사회적 타살범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디 그 가족이 '아빠는 세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야'라는 말을 할 수 있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선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만 어떤 죽음은 말한다.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말라고 말이다.

/신지영·이시은 기자 sjy@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2022020901000314000016433




# 키워드

경인 WIDE

디지털스페셜

디지털 스페셜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

더 많은 경기·인천 소식이 궁금하다면?

SNS에서도 경인일보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