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 명칭, 1920년대 신문에 등장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이정희 교수가 1일 진행된 '2022년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지역인문학센터 시민강좌'에서 비대면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으로 '한국 중국집의 역사'를 주제로 강연했다. 2022.4.1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지역인문학센터 제공 |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중국집'의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일까. 1920년대 한국어 신문에 등장하는 '중국집'은 '중국요리점'의 준말로 사용됐다.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화도진도서관, 구산동도서관마을이 공동으로 주최하고 경인일보 등이 후원하는 '2022년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지역인문학센터 시민강좌'의 '미각을 자극하는 중국요리의 문화사'두번째 강좌가 1일 오후 7시30분부터 8시30분까지 비대면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으로 열렸다.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이정희 교수가 '한국 중국집의 역사'를 주제로 강연했다. → 편집자주
일제강점기 중국집의 수는 많이 증가했다. 1930년 10월 화교 경영의 중국집은 2천774개에 달했다.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의 중소도시에도 중국집이 영업했다. 1920년대가 되면 중국요리가 조선 전역으로 퍼져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서울에는 '사해루'(四海樓), '금곡원'(金谷園), '열빈루'(悅賓樓), '대관원'(大觀園), '아서원'(雅敍園), '복해헌'(福海軒), '마화'(馬華), '제일루'(第一樓) 등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중국집이 많았다.
인천의 '중화루'와 '동흥루', '공화춘'도 서울 대형 중국집과 비교하면 손색이 없었다. 이들 대형 중국집은 해방 이후에도 영업을 계속했으며, 1970년대 문을 닫을 때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중국집의 주요한 메뉴는 우동, 잡채, 탕수육, 양장피였다. 우동은 가격이 30전 정도로 저렴해 중국집의 대표적인 요리였다. 현재 중국집의 대표 요리인 자장면은 일제강점기 발행되던 신문의 기사에 등장하지 않는 점을 보면 자장면이 대중화한 것은 해방 이후가 아닐까 한다.
대형 중국집은 여러 명의 주주로 구성된 합자 조직으로 설립됐다. 자본가는 자금을 제공한 동가와 노동력을 제공한 서가로 구분됐고, 중국집 관련 일체의 경영은 서가 측의 지배인과 부지배인에게 일임됐다.
대형 중국집은 역사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개최된 곳은 서울의 '아서원'이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나석주가 중국에서 인천으로 입항해서 숙박한 곳은 공화춘이었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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