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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칼럼] 삼중당문고(三中堂文庫)

조성면 발행일 2022-06-22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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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
시인 서정주를 키운 것은 '8할의 바람'이었고, 우리 세대 문청들을 키운 것은 '삼중당문고'였다. 인생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마치 군대 병영생활 같았던 학교에서 나를 지탱시켜 준 것은 친구들과 삼중당문고였다.

시내버스비가 50원이던 그때 시절 방과 후 학교(북중학교)부터 세류동 집까지 꼬박 40~50분을 걸어서 다니며 아낀 돈으로 재개봉 동시상영관에서 철 지난 영화를 보거나 삼중당 문고본을 샀다.

학교도서관도 있었지만 모양만 도서관이었지 책도 많지 않았고 그나마 문이 닫혀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국어교과서와 자습서 외에 문학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던 내게 수원 종로 일대에 즐비했던 서점들은 꿈의 거리요, 정신의 해방구였다. 주머니가 가벼운 중학생에게 접근이 가능한 책은 안현필의 '영어실력기초'와 완전정복 시리즈의 자습서들 그리고 삼중당문고가 거의 전부였다. 버스비를 아껴서 살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기에 신학기 집에서는 자습서를 사야 한다고 돈을 타내 헌책방에서 철 지난 전년도 자습서를 구입하고 그 차액으로 몇 권의 문고본을 더 샀다. 황순원의 '일월',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이광수의 '흙' 그리고 염상섭·김동인 등 주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작가들의 작품을 사서 읽었다.  


버스비·자습서 살 돈 아껴 읽은 문학작품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삶의 지지대 역할


'안나 카레니나', '춘희', '여자의 일생' 등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봤고 '데미안', '지와 사랑' 같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나 '마의 산', '파우스트', '일리아드 오디세이' 등은 당시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작은아버지의 서재에서 꺼내 읽었다. 헤세는 잘 읽혔으나 다른 작품들은 뭔지도 모르고 억지로 책장만 넘겼던 기억이 난다.

우리 문고본은 1927년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첫 권으로 시작한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의 영향을 받으며 세상에 나왔다. 1907년 박문서관을 세운 노익형이 1939년 도남 조윤제의 '교주 춘향전'을 시작으로 박문문고를 내기 시작했다. 이어 외솔 최현배가 1928년 정음사를 만들면서 문고본을 냈고, 그밖에 을유문화사·삼성출판사·동서문화사 등에서도 앞다퉈 문고본을 펴내며 지식과 도서 보급에 큰 기여를 했다.



이와나미 문고는 독일의 레클람문고를 모방한 것인데, 일본 근대의 모델이 독일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가령 도쿄대학의 핵심적인 연구방법론이자 일본이 관학(官學)으로 내세운 실증주의도 랑케의 역사연구방법론을 수용한 것이며, 초대 내각 총리대신을 거친 이토 히로부미도 영국과 독일에서 신문명과 근대 법률을 배우고 익혔다. 일본 근대문학의 신기원을 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독일의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의 소설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에서 큰 영향을 받았거나 이를 표절했다는 의심을 받을 만큼 독일은 일본의 근대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만큼 이와나미 문고가 레클람을 모방했다는 것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니다. 또 멀게는 세계적인 출판사인 펭귄의 페이퍼북도 문고본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요즈음 쉽게 살 수 있는데 독서 열정 시들
책 귀했던 '문고본 시대' 오히려 전성기


요즘은 출판된 책도 훨씬 다양해지고 책을 구입하기도 쉬워졌지만, 책과 독서에 대한 열정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책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지면 질수록 책을 더 읽지도 구입하지도 않는 것이다. 전통적인 동네 서점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고,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서점들도 책보다는 임대 수입이나 옷과 문구와 카페 등을 운영하여 얻은 부대 수입으로 유지되는 것 같다.

책이 귀하고 소중했던 그 시절 염가로 독서에 대한 열망을 채워주던 문고본 시대가 오히려 책의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자꾸 그때의 문고본 시대가 그리워진다.

/조성면 객원논설위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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