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항복과 함께 온 소련군 약탈… 실제 해방 달콤하지 않았다"
이창식 前 경인일보 편집국장. /경인일보DB |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와 광복을 모두 겪고 한국전쟁 때 월남해 인천과 수원에서 기자로 산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의 육성으로 1940년대 광복을 전후한 한국 상황을 들여다 본다. 기사는 이 전 국장의 구술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한국전쟁 당시의 자신 사진을 보여주며 국민방위군 사건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경인일보DB |
자연히 배곯는 일이 많았고, 일제가 배급한 '면미'를 주로 먹었다. 소면을 좀 굵게 만들면 쌀처럼 보이는데 그걸 면미라고 했다. 그걸 얼마 없는 밥에 얹어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그걸로도 모자랐다. 콩에서 기름 짜내고 남은 찌꺼기로 대개 가축 사료로 쓰이는 '대두박'을 가져다 면미랑 섞어 먹었다.
질도 안 좋고 금방 상하는 대두박을 섞으니 십중팔구 설사하거나 배가 부글부글 끓었다. 가축사료로나 썼던 걸 인간에게 배급하니 오죽했겠나. 이모가 쌀을 배급받으면 며칠씩 그걸 나눠 먹었다.
김치밥을 자주 먹었는데 김치를 꺼내 총총 썰고 그걸 쌀과 섞어 밥을 지으면 그게 김치밥이다. 많이 먹던 향토음식 중 하나인데 이건 통상의 김치밥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쌀은 거의 없고 김치만 가득 넣어서 그저 배 채우기 수준이었다.
1942년에는 구정이 없어졌다. 오랜 시간 지켜온 관습, 명절이니까 바로 없애지는 못하고 숨어서 명절을 지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종종 들키는 경우도 있었다.
42년에는 쌀 뿐 아니라 육류도 배급제로 바뀌었다. 윤번제라고 해서 동네를 돌아가며 고기를 돈을 받고 배급했다. 고기 먹기 어려운 시기였는데 구하기도 어려우니 돈 있는 집안만 더 고기를 먹고 그렇지 못한 집안은 엄두도 못냈다.
학생들도 근로봉사라는 것을 했다. 오전 수업 마치면 오후에 근로봉사를 하는데 그때 평양 비행장 확장공사에 동원됐다. 자갈 운반도 하고 갖가지 심부름을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잡초도 제거했다.
전국 모든 학교에서 근로봉사를 했다. 뒷산에 올라 솔방울도 땄다. 솔방울을 따 착유하면 기름이 나온다. 그걸 아마 군용으로 사용했지 싶다. 키가 작으니까 손이 닿는 범위에서 솔방울을 땄다. 어떨 땐 떨어지라고 나무도 털었던 기억이 난다.
이창식 전 경인일보 편집국장이 한국전쟁 당시의 자신 사진을 보여주며 국민방위군 사건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다. /경인일보DB |
전쟁 후반기 일제가 미쳐가기 시작했다. 관청에 일요휴무제를 없앴고 석간신문도 폐간했다. 1944년 5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이 생긴다.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다.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보면 벌써 몇 년째 마무리도 못 짓고 양국이 대립만 하는데서 정치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해방소식은 천황(일왕)이 라디오 방송으로 해방을 승인한다는 내용을 음성으로 말하며 알았다. 음성을 못 들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들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만세를 외치면서 해방이 됐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숨겨뒀던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외쳤다.
해방이 되니 만주에서 부모님이 돌아왔다. 이미 집안은 풍비박산 난 상황이었다. 만주에서 지내시며 평양 집을 담보로 써 생활비용을 보전하셨던 것 같다.
해방의 기쁨을 느낄 새 없이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왔다. 약탈을 일삼았다. '다와이'(다와이 쩨무네·'달라'는 뜻의 러시아어)했는데 시계, 반지, 목걸이, 귀걸이 할 거 없이 여하튼 장신구라고 할 만한 것들은 보이는 대로 모조리 빼앗았다. 해방군이 아니라 약탈군이었다.
해방이 기쁘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 겪은 해방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아픔도 교차하는 시기였다.
구술/이창식 경인일보 前 편집국장, 정리/신지영·조수현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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