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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칼럼] 가치관 전도(轉倒) 시대

입력 2022-12-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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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
일하는 노인들이 크게 늘었다. 2020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 고용률은 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4.7%의 2배를 훌쩍 넘어 선진국 1위를 기록했다. 정년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3명 중 1명꼴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하는 노인은 건강하다. 또한 국민연금 재정에 적신호가 켜진 지 오래여서 주목되나 월 30만원에도 못미치는 공공근로가 대부분이다.

민간에서 제공되는 일자리도 최저임금 이하가 대부분이지만 노인들은 오늘도 일거리를 찾는다. 고령층 빈곤이 결정적 이유이다. 2018년 기준 한국 65세 이상 인구의 상대 빈곤율은 43.4%에 이른다. OECD 1위로, 회원국 평균 15.7% 대비 무려 3배 가량 높다. 은퇴하고도 일터에 다시 나가야만 생계가 유지되는 현실이 한국 고령층 고용률을 끌어올렸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성인이 된 자식들이 부모 공양에 소홀하면 불효라며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요즘에는 자식들이 부모의 빈곤을 방치해도 흉이 안 된다. 장례(葬禮)문화도 급변했다. 화장(火葬)률이 1993년의 19.1%에서 2021년에는 90.1%로 한 세대 만에 5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부모가 물려준 자산이어서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자신을 낳고 키워준 부모의 시신까지 태워 없앤다. 결혼관도 빠르게 변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기를 맞은 청춘남녀의 혼인은 일생에서 가장 큰 통과의례였으나 근래 들어 비혼족(非婚族)이 격증한 것이다. 결혼 후 자녀를 낳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식까지 확산 중이다. 모 공중파 TV의 주말 예능프로인 '나 혼자 산다'는 10년 가까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고령층 빈곤' 일하는 노인들 크게 늘어나
화장률·비혼족·무자녀계획 결혼관도 급증


오랜 기간 동양 특유의 공동체사회를 지탱해온 유교적 가치관이 퇴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약과다. 국내에서 스타 연예인으로 활동 중인 미혼의 한 일본인 여성은 정자은행의 도움으로 백인 아들을 출산해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 체외수정, 대리모와 대리부, 유전자 편집 등에 대한 상당수 한국 청년들의 반응은 "그게 어때서?"이다.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의 커밍아웃 사례도 심심치 않게 확인된다.

최근 일본 도쿄지방법원은 동성 커플이 가족이 되기 위한 법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 판결했다. 조부모 세대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비윤리적인 사례들이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영원한 진리라고 치부되었던 가치관들이 무너지는 것이다.



전통이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운데 아무런 논쟁 없이 권위적인 것 혹은 존경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이나 습관인데 작금 들어 전통이나 관습, 규칙 등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기존의 윤리관을 더 빨리 무너뜨리고 있다. 미래학의 대가인 후안 엔리케즈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오늘날을 기성(旣成)의 윤리체계가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공포의 시대'로 규정했다. 현대인들은 기술이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바뀌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기존의 윤리도 급변하는 것이다.

4차산업혁명 기존 윤리관 더 빨리 붕괴시켜
선택폭 넓어 세대 갈등 더 커질 수 있어 고민


세상에는 '용인되는 것'과 '용인되지 않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존재하고, 기술은 그 기준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촉매제 혹은 지렛대가 된다. 기술이 우리의 오래된 믿음을 바꾸어놓으며 윤리라는 골대의 위치도 예전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일례로 200년 전의 산업혁명이 없었더라면 노예제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19세기에도 노예제를 윤리적 시각에서 보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결과, 내연기관과 전기 등 동력(動力)으로 무장한 기계의 생산성이 인력이나 자연력을 대체하면서 수천 년 동안 유지되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악습(惡習)이 자취를 감췄다.

대부분의 기술은 부(富)와 유용성, 접근성을 높여 과거엔 누릴 수 없었던 기회를 제공해서 사람들의 선택 폭도 넓혀 준다.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관대하고 이해심이 많으며 윤리적일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폭넓은 선택 탓에 기존 가치체계의 입지가 좁아져 세대 갈등은 더 심해질 수도 있어 고민이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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