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를 사로잡은 술 '압생트(Absinthe)'는 본래 스위스 태생이다. 18세기 말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면서 노동자, 농민의 술이 됐다. 40도 넘는 독주가 싼값에 거래되면서 가난한 문인, 화가, 음악가들도 '초록 요정'을 편애(偏愛)했다. 고흐, 고갱, 랭보, 피카소, 헤밍웨이 등 당대 최고의 문화예술인은 너나없이 압생트에 절었다. 알코올 중독으로 요절한 예술인이 부지기수다.
궁핍했던 이 땅의 문인과 예술인들은 소주를 유난히 사랑했다. 쓴잔을 입속에 털어 넣으며 찌든 삶을 씻어내고, 비루한 처지를 위로했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외상술로 타박받으면서도 잔에 기대 암울했던 시대를 논하고 생을 탐했다. 애주가 조지훈은 '주도(酒道) 18단계'를 농 삼아 자주 들먹였는데, 마지막 경지를 폐주(廢酒, 술로 인해 저승으로 떠난 사람)라 했다.
천재 시인 백석(1921~1996)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소주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는 위안이 된다. 나타샤를 사랑하나 가난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처지를 한탄하며 눈 쌓이는 겨울밤, 홀로 잔을 기울인다. 그리고는 취기에 젖어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고 망상(妄想)하는 것이다.
소주가 14도 시대를 맞았다. 충남지역 소주 업체 '맥키스컴퍼니'는 이달 초 14.9도인 선양(鮮洋) 소주를 출시하고 판촉에 나섰다. 16도인 전국구 '진로이즈백'과 '처음처럼 새로'보다 1.1도 낮다. 회사는 "소비 흐름에 맞추고 기존 제품과 차별화를 위해 최저 도수, 최저 칼로리 제품을 내놓게 됐다"고 한다.
희석식 소주가 처음 선보인 1920년대엔 35도였다. 이후 25도와 20도를 거쳐 마침내 절반 이하가 됐다. 독주를 싫어하는 젊은 세대와 여성층을 겨냥한 전략이 '맹물 소주' 시대를 열었다. 도수를 낮추면 원가는 줄고 판매량은 늘어날 것이란 얄팍함이 읽힌다.
도수가 떨어지면 '톡 쏘는' 맛이 옅어지고, 비린내를 감추기 힘들다. 취기가 오르려면 포도주 양만큼 먹어야 한다. 고단한 서민들은 '값싸고 빨리 취하는 그 옛날 빨간 두꺼비가 그립다'고 한다. 소주는 순해지는데, 세상은 더 독해지는 느낌이다.
/홍정표 논설위원